* 작품명 : 한결같이 싫어하는 너에게
* 작가명(필명) : 김사과
* 장르 : BL
* 연락처 : 010-4111-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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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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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한결이다. 

1월 23일 대학교 합격 발표 날, 이한결은 투신했다.
2월 21일 대학교 OT 날, 이한결은 참석했다.
3월 4일 대학교 개강 날, 이한결은 출석했다.





*





“한결아.”

6교시 전공 필수 수업이 끝났다. 
왁자지껄한 무리 속에서 태수가 한결을 불렀다. 한결도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태수는 훨씬 컸다. 체교과도 울고 갈 큰 키와 덩치. 그런 태수를 보기 위해 한결은 또렷한 눈을 들었다.

“응?”
“오늘 개강 파티 올 거지?”
“어…”

개강 파티. 본래 개강 첫 주에 했어야 할 자리가 둘째 주까지 밀린 터라, 거르면 더 눈에 띌 게 분명했다.

그래도 내키지 않아 뜸을 들이자 한결에게 동기 여럿이 시선을 돌렸다. 

“안 올 거야?”
“한결아. 당연히 갈 거지?”
“이한결, 너 저번 번개도 안 왔잖아. 오늘은 안 됨. 필수임.”

이제 막 대학생이 돼 공들여 꾸민 여자아이들이 한결을 재촉했다.

“갈게. 재밌겠다.”

살포시 미소를 띤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러운 움직임에 노을이 어렸다. 몇몇이 그 모습에 볼을 붉히고 꺄르륵거렸다.

“대박…”
“한결이 자주 웃으면 좋겠다.”
“우리 바로 갈 건데. 그럼 같이 가자.”

신난 여자아이들은 한결을 둘러쌌다. 

“개파 어디래?”
“거기 있잖아. 저번에 우리 갔던데.”
“아, 청학동?”

부산스러운 무리가 좁은 복도를 꽉 채우며 지나갔다. 문득, 저 멀리 뒤에서부터 걸어온 큰 키의 남자가 그 사이를 기어이 뚫고 앞서나갔다. 툭하고 한결의 어깨를 치기도 했다.

“어후, 뭐야.”
“아. 왜 치고 가.”
“쟤… 걔잖아?”
“걔?”
“우리 과야?”
“응. 경영 D반. 반도 같아. 이름이…”

무리에서 치인 여러 명이 새된 소리를 내며 남자의 뒤통수를 째려봤다. 

“…무결. 도무결.”

수진이랬던가. 활달해 보이는 그녀가 이름 뒤에 입모양을 벙긋하고 덧붙였다. 
그리고 한결은 소리 없는 그 단어를 아주 분명하게 읽었다.

찐따.

찐따라고.

그녀의 친구 연아도 확실히 읽었는지 의문을 표했다.

“왜? 키도 크고 괜찮아 보이는데…”
“맨날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혼자 우중충하게 앉아서 필기만 죽어라 하는데 무슨.”
“두꺼운 안경은 왜 빼먹냐.”
“옷도 좀… 맨날 비슷하지 않냐.”

사내녀석들이 쯧,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OT 때 쟤가 질문만 계속 해서 늦게 끝났잖아.”

그랬던가. 한결은 신입생 OT가 영 기억나질 않았다. 그때는 한창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니까….

“분위기 자체가 어둡잖아.”
“저런 애들이 백퍼 사고 크게 친다니까.”
“딱 봐도 벌써 아싸.”

저마다 도무결에 대해 한 마디씩 보탰다. 한결은 혹여 그에게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훌쩍, 멀어질 뿐이었다. 

무리는 경영학과 건물에서 나와 비탈길을 내려갔다. 개강 직후, 교정을 걸어가며 한결은 언젠가 읽은 문구를 곱씹었다. 빛바랜 기억 속의, 봄은 세상에서 가장 큰 기적이라는 문구를.
이 계절이 기적이라니. 지금의 나는…….

상념은 술집에 도착하여 깨졌다. 테이블을 잡고 보니 옆쪽 테이블 맞은편 구석에 도무결이 앉아 있었다.

‘착할 것 같은데….’

몇 번이나 흘끔흘끔 그를 관찰했다. 그는 찬물을 마시느라 마스크를 내렸을 때마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무척 낯가림이 심한 듯했다.

‘그냥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 아닐까.’

이내 한결은 그에 대한 관심을 지우고 술잔을 들었다. 
동기들부터 선배, 교수님까지 다가와 술을 한 잔씩 건네는 통에 바짝 긴장해야 했다.

오늘로 음주는 인생에서 두 번째. 주량이 꽤 된다는 걸, 첫 음주 때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을 위한 대비는 언제나 필수였다.

“한결아. 너 어디 산댔지?”

OT 때부터 부쩍 챙겨주곤 했던 현우 선배가 안주를 챙겨줬다.

“저 여기 앞에 라메종 오피스텔이요.”
“라메종? 헐. 거기 관리비 개비싼데?”
“여윽시 있는 집 자식.”
“그래요? 어머니가 내주셔서 전 잘 몰라서…”

작게 손사래를 치자 집을 물었던 현우 선배가 부럽다는 눈초리로 한결의 손목을 유심히 살폈다.

“어머니? 야. 한결이 진짜 도련님이네.”
“그쵸 형? 우린 엄마 엄마 하는데.”
“뭐 어쨌거나 라메종 사는 거 부럽다. 근데….”

현우 선배가 한결의 손목 시계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거 시계도 엄청 비싼 거 아니야?”
“이거 저도 선물 받은 거라…”
“여윽시 선물 받는 클라스도 차원이 다르고요.”

태수와 재민이 현우 선배와 속닥거렸다.

“형. 이거 시계 가격 제가 찾아봤는데…”

한결은 시계를 다른 손으로 슬쩍 가렸다.
이게 그렇게 비싼 거였구나. 차지 말걸. 아니, 오히려 더 자주 차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올라오는 낭패감을 억눌렀다. 초조한 마음에 얼음물을 홀짝이니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뭐지.’

건너편 구석 테이블. 도무결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주시 중이었다. 물잔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다시 봐도 제게 향해 있는 뚜렷한 눈길.
한결은 지지 않고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아까 거뒀던 관심을 이어갔다.

동기들 말이 맞았다. 검은 옷으로 무장한 그는 어두운 아우라를 뽐냈다. 
어두운색 청바지, 검은색 후드집업. 후드를 눌러쓴 데다가 앞머리는 왜 또 그렇게 치렁치렁한지 눈을 다 가렸다. 게다가 마스크에 안경까지 써서 도무지 얼굴의 살색이라고는 보일 틈이 없었다.

하지만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는 가려지지 않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태수만 해 보였다. 아니, 태수보다 클 것도 같았다. 덩치는 좀 더 마르고 단단할까. 
이런저런 가늠을 해보이던 한결은 남자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자 왠지 모를 위협을 느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한결은 눈웃음을 곱게 접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장 화장실로 향하는 척하다가 자연스럽게 청학동을 나와 아예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빌딩 바로 옆, 어둡고 좁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하. 힘들다.”

골목길 바닥에 짓씹히고 더럽혀진 담배꽁초들이 수북했다. 군데군데 더러운 물이 고인 곳에 먼지가 떠다녔다.

“좀만 더 노력하다가 집에 가자….”

꽉 막혔던 긴장이 풀리자 조금씩 취기가 올라왔다. 마른세수를 하고 고개를 하늘로 올렸다. 딱딱한 시멘트 벽돌에 머리를 기댔다. 어두운 밤하늘에는 인공위성만 촘촘해 보였다.

다들 이런 인생이 좋은 걸까. 어쩌면 행복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너무 피곤했다. …봄이란 원래 이런 거였나.

깊은 숨으로 호흡을 골랐다. 다시 건물을 향해 들어가려는데, 어두운 그림자가 불쑥 한결 위로 드리웠다.

“……?”

온통 검은색으로 무장한 녀석. 도무결이 골목길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야?”
“…아니잖아.”
“응…?”

마스크 안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뚜렷하지 않았다. 
내가 술에 취한 건가.

정신을 가다듬은 한결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골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도무결이 좁은 입구를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

“저기, 비켜줄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도무결이지?”

한결은 두 눈을 똑바로 치켜올렸다. 
안경을 벗었는지, 도무결의 깊은 눈매가 언뜻언뜻,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났다. 네온사인의 번쩍거림이며 시끄러운 아이돌 노래 소리가 시야를 함께 어지럽혔다. 
그의 시선이 목덜미를 따라왔다.

“좀 비켜주면 고맙겠어.”

다부지게 말하고 어떻게든 지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도무결이 벽으로 한결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너 무슨…!”

뿐만 아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억센 손아귀에 턱이 잡혔다. 당황한 한결이 입술을 마저 벌리기도 전에, 도무결의 무거운 목소리가 모든 걸 멈춰 세웠다.

“아무리 봐도 네가 이한결은 아닌데?”

도무결의 눈빛에 선연한 냉기가 서렸다. 한결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야. 너 누구냐.”

눈앞이 온통 깜깜해졌다.

역시 이 계절은 기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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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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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도 놓치지 않겠다는 사나운 시선. 보일 듯 말 듯한 눈매에서 턱 끝에 매달린 마스크, 어깨에 내려앉은 어둠, 어느새 그의 팔목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목까지.
차례대로 훑으며 한결은 굳었던 몸에 힘을 풀었다.

한결이 숨길을 찾은 건, 영원 같던 침묵이 흐르고 난 뒤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
“내가 이한결인 게 문제야?”

어두운 골목길 안, 자신의 목소리가 울렸다. 꼭 다른 사람의 목소리같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니면 내 이름을 물어본 거야?”
“…….”
“너 이름 도무결 맞지?”

도무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기색이 느껴졌다. 턱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느슨해졌다.
한결은 재빨리 도무결의 손을 떼어내며 그의 압박에서 벗어났다.

“너 취한 것 같다.”

그가 마스크를 내리고 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한결이 하는 양을 순순히 바라만 봤다. 한결은 괜히 벽에 붙었던 등을 털었다. 

“그만 들어가보는 게 좋겠어.”

실은 오소소 솟은 소름을 숨기느라 바빴지만 애써 태연히 뒤돌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쏟아진 건 조소였다.

“하. 거짓말을 잘 하네.”

거짓말.

마스크를 내린 덕분에 더 선명해진 목소리가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 송곳 같은 단어를 실어 보냈다.

쿵쿵. 쿵쿵.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뛰는 심장 소리가 바깥으로 들리기라도 할까 봐, 한결은 어깨를 움츠렸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런 어깨를 도무결이 치며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한결은 눈을 치켜 떴다. 자신에게 향하는 무시무시한 그 얼굴을, 용기를 내 올려다봤다.

“저기, 나는 네가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살랑, 밤바람이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내려진 마스크 사이를 지나갔다. 한결의 시야 가득 냉기 어린 얼굴이 담겼다. 

이마부터 턱선까지 연결된 매끄러움, 그 위에 우뚝 솟은 콧대가 주는 충격적인 수려함.
넋을 잃은 동시에, 네온사인이 번쩍였다. 
한결은 떠올렸다. 늪 속에 매복해있다가, 먹이가 오면 한 방에 으스러뜨릴 재규어를.

…인간이 저렇게 생길 수 있는 건가. 잘생겼다. 무섭도록 잘생겼네.

“아, 아무튼…”

바람은 다시 불지 않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그의 높은 콧대를 다시 뒤덮었다.
한결은 순간, 금세 사라진 바람이 아쉬웠다.

“아무튼은 됐고.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단 건 알아둬.”
“…….”

도무결이 말을 끝내자마자 마스크 아랫부분을 거칠게 잡아당겨 콧등까지 끌어올렸다. 위축된 한결은 입술을 달싹일 뿐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우리 학교 생활 즐겁게 해보자.”

큰 손이 어깨를 툭, 그러나 깊게 짚고 떨어져 나갔다. 마스크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한결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웃었다. 무척 즐겁다는 듯.





* * *




데구르르. 
돌멩이를 차고 또 찼다. 돌멩이는 구르고 또 굴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한결의 마음은 아까 그 골목길에서부터 좀처럼 나아가질 못했다.

‘대체… 뭐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불어온 바람에 드러난 얼굴은 얼핏 기억이 날 것도 같지만 익숙하지는 않았다. 

기억에도 없고 사진에도 없던 얼굴. 

한결은 이토록 헤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결이 품고 있던 감정은 확실했다.

‘의심’ 그 자체. 마치 한결이 누군지 알고 있는 듯한 그 눈.

한결은 너무나도 초조해진 나머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얏…”

오피스텔까지 걸어가던 길, 입술 끝에 핏방울이 맺혔다. 씹다 못해 기어코 입술 살까지 물어뜯은 탓이었다. 비릿한 맛이 혀에 감돌았다.

아. 알게 뭐야, 입술 따위. 

“…도무결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이름이 비슷하네. 한결, 무결. 무슨 사이라도 되는 걸까?

‘이건’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심지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여동생에게까지도. 

그는 도무결에게 잡혔던 턱을 몇 번 쓸었다. 센 힘과 뜨거운 열기에 잡아먹힐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었다.

심란한 발걸음을 재촉해 오피스텔 앞에 도착한 한결은 조용히 정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곳은 원룸 오피스텔인데도 불구하고 요즘 신축 아파트스럽다고 부동산 중개인이 떠든 적 있는 곳이었다. 물론, 신축 아파트에 살아본 적 없는 한결은 그 ‘신축 아파트스러움’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한결에게 지금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걔 뭐야 진짜….”

앞으로는 또 어쩌고.

한결이 탑승한 엘리베이터가 매끄럽게 가장 꼭대기 층을 향해 올라갔다. 이 건물의 가장 윗층, 가장 넓은 원룸이 그의 자취방이었다.

삐비비빅. 

비밀번호를 누르고 오피스텔에 들어왔다. 비밀번호는 두 개의 생일을 합쳐 만들었다. 07141130. 익숙한 8자리였다.

‘그래도 집에 왔다. 오늘 너무 피곤해.’

한결은 털썩하고 작은 소파에 주저앉으며 멈칫했다.

집. 집이라니.

어느새 이곳을 집이라고 부르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소파 위로 무릎을 웅크리고 머리를 파묻었다.

한결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원룸에 쓸쓸함이 맴돌았다.

소파 뒤 놓인 간이 칸막이 뒷부분이 침실이었다. 침대는 무려 킹사이즈였는데도 조금의 갑갑함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화장실에는 욕조까지 딸려 있었다. 욕조 있는 집은 처음이어서, 이런 호사를 내가 누려도 될까 고민도 했었다.

호사. 집을 둘러보고 오분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뒤에는 단 한 번도 그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건 그보다는, 형벌에 가까웠다.
4년짜리 시한부 형벌 그러나 평생 지고 가야 할.

소파에 앉아 집을 한 바퀴 둘러봤다. 이 집에 자신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세면도구도, 원래 입던 옷도 최소한으로 가져다 두었다. 
한결이 소중히 여기는 물건도 책상 위에 놓인 액자 두 개가 전부였다. 중학교 졸업식 사진, 고등학교 입학식 사진이 꽂힌.

불행히도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은 없다.

탁. 탁.
한결은 액자 두 개를 엎었다. 지금 계속 이 사진을 보면, 눈물이 쏟아지겠지.

이어서 그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 던졌다. 매번 단정히 스타일러에 걸었던 겉옷도 오늘은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래도 시계는 고이 풀어 서랍에 넣었다. 평소에도 조심하긴 했지만 비싼 거란 걸 알고 나니 더 조심스러워졌다. 술자리에서 이야기가 떠올라 가격을 검색해 볼까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이 중 그 무엇도 내 것이 아닌데. 그게 무슨 소용이야.

방을 가득 채운 값비싼 명품들 사이에서, 한결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오도카니 섰다. 

상념은 띠링, 하고 울리는 알림음에 흩어졌다. 휴대폰을 켜보니 어머니였다.

[ 이번 달 월새 좀 더 빨리 부처주련 ]

휴대폰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파스스한 메시지 창의 불빛이 오늘따라 더 피곤하게 동공에 스며들었다.

[ 병원비로 써부럿네 ]

어머니는 맞춤법을 곧잘 틀렸다. 어렸을 적, 당신은 밭을 매느라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바였다. 중학교 입학 이후, 그런 말을 듣는 일상이 어느 집에나 있는 흔한 레퍼토리가 아니란 걸 알았다.

터지려는 한숨을 꾹꾹 누르고 휴대폰 창을 껐다. 

“…쉬지 말자. 쉬지 말자.”

그는 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한숨을 참는 버릇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다. 언젠가, 한결이 한숨을 연달아 몇 번이고 내쉬었을 때.

‘한숨 많이 쉬면 오던 복도 달아나. 내가 다 가져갈 테니까 이제부터 쉬지 마.’

한숨이 나올 때마다 먹으라고 목캔디를 교복 주머니에 꽂아줬다. 그날은 하교 후에 모처럼 어깨동무하고 코인노래방에서 삼십분이나 함께 놀았다. 어느 이른 겨울날이었다.

벨소리가 울렸다. 

메시지를 읽고도 바로 답장하지 않으니 전화를 한 것일테지. 보지 않아도 수신자는 어머니일 게 뻔했다. 

병원은 또 왜 간 건지. 그러게 이럴 때 쓰라고 준 비상금은 대체 어디다 또 쓴 건지. 

쏟아낼 말은 많았지만 한결은 그저 무표정하게 욕조에 물을 받을 뿐이었다.

가볍게 샤워하고 뜨거운 물이 콸콸 담긴 욕조에 몸을 누였다. 녹진한 피로가 몰려왔다. 차올랐던 무력감이 발끝으로 빠져나갔다. 멎었던 사고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알바비가 말일에 들어오는데. 미리 달라고 말해도 어려울 텐데. 남은 비상금이 얼마더라.

그는 무릎을 세워 끌어당겨 웅크렸다. 찰박, 하고 물소리가 나더니 욕실에 고요만 남았다.

대충 마무리하고, 한결은 주섬주섬 제 옷을 꺼내 입었다. 
로고 프린트가 다 벗겨지고 목은 늘어난, 빛바랜 흰 티셔츠. 옷에 밴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꼬릿한 집 냄새가 물씬 풍겼다. 가슴 한편이 우릿했다.

꾸물꾸물 침대로 올라간 그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 밤, 꿈속은 목캔디 향이 솨아아 퍼지는 겨울이었다. 한결은 아주 오래, 퍽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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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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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과 1학년 D반의 ‘설득의 미학’ 수업.

“…에… 가끔가다 마케팅을 왜 경영학과가 배우냐, 그거 광고홍보에서만 하면 되는거 아니냐, 이런 얘기를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이 수업은 1학년 대부분이 싫어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지루하기로 유명한 노교수의 강의이기도 했고, 교재도 학교 스토어에서 7만 원인 두꺼운 양장본으로 무겁고 비쌌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의실은 지독한 휴면에 빠졌다. 2학기 마케팅원론을 배우기 전, 1학기 전공 필수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을 수업이었다.

“…고로 마케팅이란 서비스, 제품이 신뢰를 기반으로…”

다행인 건 점수 받기가 까다로운 편이 아니란 사실이었다. 출석, 팀플 리포트를 꼼꼼히 하면 A+을 받을 수 있다는 조언을 현우 선배에게 들었다.

“…고객과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말이죠.”

한결은 벌써 세 번째 수업 내내 개괄만 설명하는 강의라도 필기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대학 입학 직후, 망아지처럼 날뛰는 1학년 동기들 사이에서 성실, 노력만큼은 자신감 넘쳤다.

하지만 오늘은 지난주 개강파티 때와 같은 차림의 도무결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후드를 눌러쓴 그 뒤통수, 떡 벌어진 어깨나 의자가 불편한지 가끔 뻗어대는 다리 모양이 거슬렸다.

신경 쓰지 말자. 나랑 상관도 없는 사람이다. 앞으로도 상관 없을 사람이다. 도무결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거야.

되뇌고 되뇌었다. 그러다가 한결은 받아적던 노교수의 말 끝에 이렇게 적고 말았다. 

마케팅 = 신뢰, 설득, 도무결.

화들짝. 한결은 검은색 동그라미를 도무결, 세 글자 위에 겹쳤다. 종이가 구멍 뚫릴 듯 금세 새카맣게 변했다. 혹시 뒷면에 글자가 비치는지까지 확인을 끝내자 수업은 과제 이야기로 옮겨가 있었다.

“거… 팀플 주제는 여기 네 가지 중에 선택하세요.”

빛이 반사된 화이트 보드에 네 가지 주제가 보드마카로 쓱쓱 그려졌다.

사랑과 소비.
사랑과 혐오.
설득의 진실.

한결의 굳은 시선이 마지막 주제 위에서 멈췄다.

…명품과 짝퉁.

마케팅 수업인데 왜 양심이 찔리는 거지. 

저도 모르게 움찔한 한결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팀플 조를 짰다. 

“팀플 조는 2인 또는 3인 1조로 짜서 조교한테 제출하세요. 오늘 십 분 일찍 끝내줄 테니까…”

아무래도 태수네 애들이 여섯 정도 되니까, 그쪽이랑 할 생각이었다.

태수 쪽 방향을 살펴보다 저 멀리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앞을 다시 봤을 때, 자신을 지켜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음… 강의 시작 시간은 항상 엄수하세요. 오늘 지각한 두 명은… 앞으로 지켜볼게요.”

오늘 지각자는 태수와 연아였다. 저멀리 뒷자리에 앉은 둘이 멋쩍은 표정으로 꾸벅 노교수에게 목례했다.
탁탁. 책상을 두드린 노교수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사랑. 이 두 글자. 이게 핵심이에요. 신뢰와 설득이 기반이 되는. 그게 아니면 다 허상이고 인정받지 못해요. 고객 중심 기업들의 본질을 볼 줄 아는 학생이… 크흠… 이번에는 얼마나 될지… 기대하겠어요.”

노교수가 느린 손짓으로 강의 종료를 알렸다.

한결은 가방을 정리했다. 태수에게 바로 물어볼 작정으로 몸을 틀었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태수도 마침 한결을 불렀다.

“한결아! 너…”
“야. 너.”

하지만 도무결이 더 빨랐다. 얼마나 빨랐는지 하마터면, 한결이 1초만 더 빨리 돌았으면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을 뻔했다.

방심한 사이에 이렇게 가까이 오다니. 분명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무슨 일이야?”

한결은 짐짓 괜찮은 척을 했다. 잠깐의 부딪힘이었지만, 우중충한 옷을 입은 것과 달리 도무결에서는 시원한 향기가 났다.

“같은 조 하자.”
“…나랑?”
“말했잖아. 앞으로 우리 학교 생활 즐겁게 해보자고.”

그는 즐겁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까 맡은 그 향기까지 코끝을 밀고 들어왔다. 한결은 흡 하고 숨을 참았다.
이어서 도무결이 고개까지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친해지기로 했잖아.”

뜨거운 숨이나 무거운 목소리가 마스크를 뚫었다. 감각이 예민해지면서, 그를 밀쳐내고 싶다는 충동을 꾹 참았다.

“미안. 나는 태수네랑 할 거야.”
“아. 그래?”

힐끗,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니 태수와 수진이 조를 짜는 중이었다. 그 사이에 있던 연아가 눈이 마주치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그러더니 직진해서 그들에게 왔다.

“한결아, 혹시 팀플 할 사람 정해졌어?”
“아. 지금 안 그래도…”
“그… 우리는 나랑 태수랑 수진이랑 셋이 하려고. 미안해.”
“어?”
“아니. 나도… 그 너랑 태수랑 하고 나랑 수진이랑 하면 너무 좋긴 한데…”

도무결이 흥미로운 시선을 던졌다. 그러더니 아예 팔짱을 낀 채, 책상 위에 걸터앉아 관람했다.

“아니면 그 반대도 너무 좋고. 나는 너랑 둘이 해도 좋은데…”

연아는 한참을 횡설수설하더니 실토했다. 도무결 쪽에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귓속말을 건넸다.

“태수가 수진이랑 이어달라고 부탁해서. 셋이 하려고. 진짜 미안해!”
“아….”

그런 거였구나.

부탁받은 일 자체가 난감한지 연아는 연신 울상을 지었다. 한결은 작게 웃어 보였다.

“말해줘서 고마워, 연아야. 내가 눈치가 없을 뻔했다.”
“진짜 미안해. 나도 너랑 진짜 같은 조 하고 싶거든? 저놈의 김태수만 아니면. 근데 내가 개파 때부터 시달려가지고 알겠다고 했거든.”
“아냐. 진짜 괜찮아. 난 다른 사람이랑 하면 돼.”

합장하듯 두 손을 모아 단단히 빌고 빈 연아는 못내 미안한지 밥 약속을 잡고야 돌아갔다. 한결은 강의실을 한 바퀴 둘러봤다.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다른 사람? 나?”

도무결 말고.

“아니. 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내가? 너를?”

도무결의 손가락이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움직였다. 팔짱은 여전히 낀 채였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당연히…”

…넌 내가 이한결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보드라운 입술이 잘 다물린 지퍼처럼 일자가 됐다.

서둘러 태수와 수진, 연아가 강의실 앞으로 향하고 남겨진 한결은 난감해졌다. 조교는 아직 앞에서 뒷정리 중이었지만 빨리 조를 제출해야 했다.

“내가 너 도와줄 수 있는데.”

도무결의 목소리에 짓궂음이 가득했다. 강의실을 차분히 둘러보았지만, 이미 조편성을 끝내고 다들 나갔는지 어느새 휑했다. 아니면 이미 조를 짠 게 분명한 두세명이 모여 주제를 논의 중이었다.

짧게 눈을 깜빡인 한결은 항복하고야 말았다.

“좋아. 같이 하자.”

조교에게 조 편성을 적어내고 교탁 앞에 선 두 사람은 휴대폰 번호를 교환했다.
한결은 도무결, 이라고 간결히 그를 저장했다. 도무결이 뭐라고 저장하는지는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잘해보자. 앞으로 쭉.”
“그래. 그럼 다음에 봐.”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비칠비칠 단상을 내려왔다.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도무결이든, 이 순간이든, 그게 뭐든. 빨간 비상등에 불이 들어와 마음속에서 위잉위잉 돌아갔다.

도무결이 그를 불렀다.

“거기. 너.”
“왜?”
“이대로 가려고? 주제 정해야지.”
“다음에 정하면 안 될까?”
“왜?”
“…그야…”
“빨리 정할 수록 과제할 시간이 늘어나는데 오늘 정하는 게 가장 좋을 걸.”

너무도 맞는 말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껄끄러움 때문에 피하려고 한 거라고 말할 수도 없으니, 한결은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난 그럼 네가 하자는 주제 할게.”
“괜찮겠어?”
“뭐가?”

도무결이 불쑥, 긴 손가락을 들어 화이트보드 위를 가리켰다.

“난 특히 이 주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한결의 떨리는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화이트보드 위로 옮겨갔다.

“무조건 이걸로 할 건데.”

그 끝은 정확히 그를 움찔하게 만든 주제에 닿아 있었다.

명품과 짝퉁.

비릿한 미소가 도무결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조여오는 긴장감에 한결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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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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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앞 2층짜리 카페는 한적했다. 도무결과 마주 앉은 자리는 2층 테라스가 훤히 보이는 자리였다. 도무결이 2층으로 음료를 들고 올라왔다.

“여기.”

투박한 머그잔에 단정히 담긴 따뜻한 밀크티. 그제야 오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걸 자각했다.

“고마워. 잘 마실게.”

계산도, 가져다주는 것도, 자연스럽게 도무결이 했다. 틈을 봐서 카드를 내밀거나 진동벨이 울리면 일어날 준비를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고 도무결이 마스크를 내렸다. 개강 파티 때처럼 한 모금 넘길 때마다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덕분에 가려졌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저렇게 생긴 얼굴을 대체 왜 가리고 다닐까.

한결은 무의식적으로 자칫 사나워 보일 수도 있는 도무결의 눈매부터 콧대,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번뜩 눈이 마주쳤다. 도무결이 씨익 웃으며 한 손으로 괴고 있던 턱을 들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마스크 내리고 멀쩡히 마시길래. 개강 파티 때는 안 그랬잖아. 그때는 고개까지 숙이고 마시는…”

한결은 말을 하다 말았다. 자신이 도무결을 쭉 지켜본 걸 실토하는 것 같았다. 시선을 밀크티로 내렸다.

“미처 몰랐네. 네가 나한테 관심이 그렇게 많았을 줄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궁색한 변명, 지는 기분에 한결은 주제는 꼭 다른 걸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두 사람은 결국 조편성을 한 김에 주제까지 정하기로 했다.
강의실에서 마저 주제를 논의하려다가, 다음 수업 학생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난감해졌다. 도무결이 먼저 학교 앞 카페로 자리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그의 말대로 1차 리포트는 중간고사 기간, 2차 리포트는 기말고사 기간에 제출이라 일찌감치 정해두는 편이 나았다.

“난 무조건 이 주제로 할 거야.”

툭. 노트북 화면 위의 ‘명품과 짝퉁’을 도무결이 짚었다.

“아니. 1차 리포트 주제로 난 이게 좋겠는데.”

한결이 가리킨 건 그 바로 위 주제였다. 

설득의 진실.

도무결이 김 빠지는 소리처럼 웃음을 내뱉었다.

“아까는 내가 하자는 주제 한다며, 진실 쪽이 더 힘들텐데.”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도무결이 바로 이 주제를 고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한 말이었다. 왜 하필 명품과 짝퉁이람.
아니면… 정말 ‘진실’에 대해 뭘 아는 건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한결은 강의실에서 열심히 받아 적었던 노트 필기를 펼쳤다. 포인트 부분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했다.

“팀플은 같이 하는 건데 힘들 게 뭐가 있어. 교수님께서 신뢰와 설득이 마케팅의 기반이라고 하셨으니 그 키워드에 맞춰서 1차, 2차 리포트를 구성하는 게 더 좋아보여서 그래. 1차 리포트 주제는 설득의 진실로 하자. 명품과 짝퉁은 자료조사만 해도 어마어마할 거야. 다 할 수 있겠어?”
“자료조사야 해 봐야 아는 거지.”

도무결의 눈길이 조막만 한 입술에 가 박혔다.

“삼주 내내 교수님이 개괄만 설명하신 이유가 있을 거야. 그때 강조하신 교수님의 마케팅 철학을 생각해 봤을 때도, 명품과 짝퉁은 너무 일차원적인 느낌이 강해. 1차 리포트 주제는 설득의 진실로 하고, 2차 주제를 사랑 관련된 걸로 가는 좋겠어.”
“처음이네.”

반사적으로 고개가 들리고 종이 위에 손가락이 멈췄다. 팔 한쪽을 굽혀 턱을 괸 도무결이 굳은 무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봤다.

“…뭐가?”
“보는 거.”
“…나를?”
“네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거 처음 본다고.”

…그야 극도로 조심했으니까.

언젠가 삼촌이 동생에게 초콜릿을 선물해 줬던 때가 떠올랐다. 딱 한 번 만난 삼촌이었다.

13살 때던가. 제 몫은 없는 게 슬프고 초콜릿은 너무 먹고 싶어서 새벽에 일어났다. 몰래 하나 꺼내 먹으려고.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녹는 초콜릿이 야속해서 어떻게든 아껴 먹느라 입과 손이 엉망이 됐다. 그 모습을 잠에서 깬 동생이 봤었다. 5살이나 어린 동생의 초콜릿을 뺏어 먹은 한심한 오빠. 그 뒤로는 초콜릿을 절대 먹지 않았다.
지금 딱 그런 기분이었다. 절대 보이면 안 되는 걸 보인 느낌.

흥분한 나머지 무심결에 흐트러지다니.

한결은 턱하고 막히는 호흡을 골랐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쨌든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1차 리포트 주제는 설득의 진실로 하자.”
“싫은데.”
“왜?”

도무결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여유로운 자세가 마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어, 라고 한결에게 속삭였다.

“우리 이렇게 하자. 난 명품과 짝퉁으로 하고 싶고 넌 설득의 진실로 하고 싶고.”
“…….”
“그런데 넌 처음에는 ‘내가 고른 주제를 하겠다’고 하더니 말을 바꾼거고.”
“…….”
“여기서 약속을 어긴 건 너니까, 나를 네가 설득해 봐. 마침 설득의 진실 주제랑도 딱 맞네.”
“주제 하나 고르는 걸 설득하란 소리야?”

말도 안 되는 비효율에 한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정면으로 노려보니 도무결이 여유롭게 두 손을 마주잡아 깍지를 꼈다.

“주제도 설득하고 네 존재도 설득하란 소리야.”
“…그게 무슨…”

따뜻한 밀크티 때문일까.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네가 이한결인 걸 설득해 봐.”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도무결이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아니면 네 이름을 알려주든가.”
“이름… 이한결, 인데. 너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어디 병원이라도 가지 그래.”
“그래? 병원에 가볼까?”
“대체 무슨 이한결하고 헷갈리는지 모르겠는데…”
“병원도 나쁘지 않네. 가서 뭐 유전자 검사라도 할까?”
“…뭔 유전자 검사야?”

그는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는 거들떠도 안 보고 훌쩍 2층 계단을 내려갔다.

“일주일 줄게.”

드르륵 의자를 뒤로 끌며 따라가다가 멈춰섰다. 

“저기…”

그러니까… 간단한 일일 것이다. 설득하면 된다. 자신을 다독이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좀 전까지 달달했던 밀크티가 썼다.





* * *






이한결이 누군지 알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주말에나 온다던 정 비서의 차량이 평일 어느 날, 주상복합 앞에 세워져 있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시죠.”
“지금 들어오시랍니다.”
“이 정도는 전화로 해도 되잖아요.”

못마땅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으나 정 비서는 아랑곳없었다. 별수 없이 검은색 세단에 몸을 싣고 본가로 향했다.
그 전에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단정히 넘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찐따스러운 도무결은 학교 생활로 충분했으니까.

부모에게는 대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보나마나 또 정 비서가 자신의 행색에 대해 보고했을 것이다.
룸미러로 정 비서를 바라보며 도무결은 낮은 비웃음을 흘렸다.

의미 없는 풍경들이 익숙한 고급 빌라촌으로 변했다.
성북동 본가 정문이 열리며 세단이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선팅이 짙은 차창 안에서 생각들이 부유했다.

‘좋겠다. 다 가져서.’
‘넌 인생이 참 편하지?’
‘하루만 너로 살아보고 싶다.’

시작은 언제나 부러움. 중간은 시기와 질투. 끝은 굴복, 그리고 거머리. 차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된 사람들의 절차였다. 귀찮음을 떠안는 건 도무결의 몫이었다.
뭐 하나라도 떨어지는 게 있을까 눈을 빛내는 인간들을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모조리 떨궜다. 대학에서는 철저히 외부를 차단하고 싶었다.

친구가 필요했던 적도 있었지만, 겪어보니 역시 혼자가 가장 편했다.

차에서 내려 여전한 저택을 둘러봤다.
급작스럽게 부를 일을 유추해봤지만 감이 잡히질 않았다. 평일에까지 부른 만큼 중요한 일이기를. 그래야 이 불쾌감이 좀 가실 테지.

공손히 인사하는 가정부를 지나쳤다. 못 보던 얼굴인데 젊었다. 아버지가 또, 란 생각을 평소처럼 흘려 보냈다. 유유히 저택 홀을 지나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 저편에서 어머니가 홀연히 나타났다.

“왔니?”
“네.”

집 안에서도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갈한 머리 모양이나 손목이며 목에 액세서리가 채워진 삶은 어렸을 때부터 익숙했다. 그러나 짧은 위화감이 그의 발끝에 돌았다.

“서재에 있을게요.”
“네 아버지는 7시쯤 오실 거야. 식사 때 부르마. 조촐히 차리라고 했다.”

‘네 아버지’.
그들의 부모는 서로를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로 지칭하곤 했다. ‘우리’라는 건 ‘차성’을 이야기할 때만 존재했다.

그는 목례한 뒤 2층 서재에 틀어박혔다.
이 저택에서 자신의 방만큼이나 오래 머무는 곳이었다. 그는 종이가 주는 얇은 인생들과 그 위에 번진 잉크들의 소란스러움으로 저택의 고요를 달랬다.

책을 읽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저녁은 조촐히 준비했다더니 정찬이었다. 열 명도 거뜬히 앉을 수 있는 식탁에 도무결과 부모가 자리 잡았다. 식사 내내 다이닝 홀에는 정적이 흘렀다.
세 사람 모두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는 법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도무결은 묵묵히 밥 숟가락을 제 입으로 퍼날랐다.

정말 식사를 하자고 부른 건지, 부모는 내내 별 말이 없었다. 식사 후에는 차를 마시며 얼마 전, 할아버지를 찾아온 고모 부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도무결의 사고가 멈춘 건 그 대화 끝에 나온 어떤 이름 때문이었다.

“무능하기만 해서는. 이번에 제 자식이 청림대 입학했다고 뻐기는 꼴도 더는 못 봐줄 정도다.”
“무결이한테 청림대 정도는 당연한 걸.”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도무결은 지금까지 고모든, 고모부든, 그의 자식인 사촌이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자신의 앞길에 해가 되기에는 너무 시시한 존재였으므로.

“그 한결이가 너랑 같은 경영학과라던데.”
“……그래요.”

찻잔을 든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고모 댁의 외동아들 이한결. 도무결은 자신이 지금 알맞은 이름을 들은 게 맞는지 머릿속으로 수십 번 대화의 맥락을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는 청림대 경영학과 이한결을 말했다.

내가 아는 그 사촌 이한결이… 지금 청림대 경영 이한결이란 말인가.

낯선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청림대 경영이 워낙 커서 같은 과인줄 당연히 몰랐겠지만.”
“…네.”
“얼굴 본 것도 8살 때가 마지막이지 않니?”

그럴 리가. 모를 리가.

경영학과 이한결은 단 한 명뿐이었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통틀어. 개강하고 2주, 한결은 유명했고, 독보적이었다.

“또 어떻게 달라붙을지 모르니 조심하거라.”

도무결이 아는 이한결.
책과 책 사이, 햇볕 아래 그 자식.
눈물을 떨구고 눈부시게 웃던 그 남자애.

그 이한결이… 이한결이 아니야?

도무결은 낮게 목을 가다듬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다시 넘기고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다.

“이미 알아서 조심하고 있겠지만.”
“네.”

역시 자신의 행색을 알고 있는 부모였다. 그러나 도무결의 정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널 아예 해외로 보내는 건데.”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무릎 위로 두 팔을 세우고 깍지를 꼈다. 뭔가를 고민하는 도무결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가 충고했다.

“적당히 거리를 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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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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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메아리치는 말.

‘안 엮이면 더 좋고.’

아버지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학교 앞 주상복합으로 돌아가는 길. 도무결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할아버지는 명문을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쳤다. 소 키우고 돼지 치며 자라, 배우지 못해 한이라고 했다. 
굴지의 대기업 차성그룹을 일구고도 사그라들지 않는 울분. 

고모 부부는 그 빈틈을 노려 자식의 명문대 간판과 졸업을 걸었고 할아버지는 지분을 걸었다.

‘청림대 졸업하면 지분을 주겠다니, 아버님도 참….’

고아한 어머니는 상스러운 거래에 치를 떨었다. 아버지의 반응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것들이 기어이 자식을 팔았어. ’

아버지는 성장통으로 급격히 키가 자라버린 무결의 어깨를 몇 번이고 토닥였다.

‘무결아. 너는 다르다. 너에게 이건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열일곱 살, 고1 무렵이었다. 그 후 그 일은 새카맣게 잊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이한결이 그 이한결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내가 아는 경영학과의 이한결은 하나뿐인데. 사촌 이한결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게… 사촌 이한결이라고?

‘확인해 봐야겠어.’

진짜가 뭔지, 지금 이한결은 누군지.

학교 앞 주상복합에 도착한 도무결은 책상 앞에 앉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휴대폰을 꺼내 학과 사무실에 전화를 거는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경영학과 신입생 중에 이한결이란 학생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경영학과에 이한결 학생이 두 명인데요. D반의 이한결 학생 말고요.”

학과 사무실에서는 이한결은 한 명뿐인데, 학적 정보를 함부로 알려 줄 수는 없다, 어디시냐, 무슨 일이냐 질문이 돌아오긴 했지만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내일 과사무실에 가서 좀 더 정확히 알아봐야겠어.’

그는 손을 놀려 이한결의 옛 전화번호를 찾았다. 일년에 한두번, 부모 모르게 연락을 하곤 했지만 고등학생이 되고서는 그마저도 끊겼었다. 도무결은 연락처 속 이한결이란 이름을 꾸욱 눌렀다.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

도무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휴대폰 전원을 꺼둘리가 없을텐데, 휴대폰을 바꿨거나, 번호를 바꿨거나 둘 중 하나려나.

카톡에 들어가봤지만 프사는 기본 프사로 당연히 사진은 없었다.

‘악바리같이 잘 살고 있을 줄 알았더니….’

진짜 이한결은 어디서 뭐하는 걸까.

다음으로는 책상 위에 노트북을 열었다. 강의 시간표를 펼쳤다. 언젠가 D반 단톡방에 너도나도 시간표를 공유했던 게 떠올라 스크롤을 올렸다.
찾아낸 강의 시간표 캡처 옆에는 작게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한결. 경영학과 D반 20xx학번.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한 손으로는 펜을 집어 들고 시간표를 맞췄다. 다행히 아직 정정 기간이었다. 

‘이한결이 뭐든, 내 사촌은 확실히 아니야.’

그렇다면 지금의 이한결은 대체 누구지? 

도무결은 의자에 깊숙이 등을 묻었다.

OT 때 본 이한결은 수줍고 조용조용한 모습이었다.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누가 봐도 곱게 자란 도련님이었다.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자세였다.
뒤풀이에서는 술 한 잔도 마시지 않고 취한 동기들을 챙겼다. 누가 토해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등을 두드려주고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는 이한결은 항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필경 산들바람 같은 미소에 다들 홀린 거겠지. 이한결이 혼자 있는 건 보기 어려운 광경이 되었다. 도무결이 지켜본 바로는, 정작 본인은 묘하게 혼자를 더 편해하는 듯 보였지만.

자신과는 다른 존재.

그를 보면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이미 몇 번이나 그를 좇는 자신을 발견한 터였다.

‘그 날 도서관에서 본 것 때문이겠지.’

도무결은 긴 손가락으로 펜대를 돌렸다.

그가 이한결을 처음 본 건, 신입생이 모두 모였던 OT 때가 아니었다.
3층 국내도서 열람실. 최초의 겨울 햇살 같던 미소를 본 건, 그곳이었다.

학교 OT 전날, 혼자 학교에 왔었다.
청림대 수석이라는 쾌거를 이룬 후였지만 별다른 감흥도 없던 때. 부모를 따라 몇 번이나 모임을 따라 다니는 게 신물이 나서였다. 칭찬을 가장한 노림수들이 같잖았고, 숨이 막혔다.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정처 없이 걸었다. 바람 쐴 겸 쏘다니다 보니 중앙도서관에 다다랐다. 담쟁이로 뒤덮인 고딕 양식이 명문대스러웠다.

앞으로 4년을 헤쳐나갈 곳.

그는 끝이 예정된,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가늠했다.

‘무결아. 우리 꼭 성공하자. 나는 꼭 성공할 거야. 성공해서… 이 지긋지긋한 집을 나갈 거야.’
‘그래. 난 아직 지긋지긋하진 않지만 뭐… 이보다 더 성공해도 나쁠 거 없지.’
‘안 되면 난 도망갈 거다. 진짜로 아주 멀리멀리.’

자연스레 옛 추억이 떠올랐다. 아직 성공에 반도 안 왔다는 생각에, 압박감이나 막막함보다는 무감각이 컸다.
그땐 아니었지만, 그도 모든 것들이 지긋지긋해진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도무결은 게이트를 거쳐 기계적으로 열람실을 돌아다녔다. 1층의 라운지에서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2층 제1자료실과 강사 전용 캐럴을 지나 3층 제2자료실에 다다랐다. 철학부터 사회학, 통계학을 눈으로 훑고 문학에서 멈춰섰다. 방학이라 전반적으로 한산했고 조용해서 발걸음 소리도 숨죽여야 했다.
어디선가 재채기 소리가 들려 멈춰섰다. 건너편 책장에 한 남자애가 있었다. 국내문학 코너였다.
마침 비어 있는 책장이 있어 건너편이 온전히 시야에 들어왔다.

두꺼운 책을 든 남자애는 동그란 코끝을 찡긋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명문대라 그런가, 대개 이 정도 대학에 다니는 어느 정도 있는 집 애겠거니 싶을 정도의 정갈함이 창문에서 쏟아진 햇볕을 만나 반짝였다.

재채기가 장서들 사이에 숨어들었던 먼지를 깨웠는지 폴폴, 먼지들이 부유했다. 

그 애는 춤추는 먼지를 천천히 눈으로 쫓았다. 재채기를 또 나오려는지, 입을 가렸다. 손에 가려져 얼굴이 눈 위로만 드러났는데, 그게 묘하게 낯이 익었다. 흐리멍덩한 어느 순간의 기억을 헤집는 동안, 그 애는 손을 내렸다. 두번째 재채기는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애가 책장에 좀 더 몸을 기댔다. 볕이 더 쏟아지는 바람에 도무결은 눈매를 잔뜩 좁혔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는 눈꼬리나 가느다란 목선에 빛이 가닿았다. 밤색 코트를 입은 몸선이 선명히 번졌다. 진한 코트색과 반대로 하얀 손, 그래서 특히나 핏줄이 도드라지는 그 손에는 책이 한 권 들려있었다. 열람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책 이름이 아마…

≪모순≫

이었던가.

눈가만큼이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이며 책을 따라 속삭였다. 행간을 얼마 읽지도 않았는데, 또렷한 눈이 흐려졌다.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도르륵 볼을 굴렀다. 큼지막한 방울이 턱 끝에 위태롭게 매달렸다. 그것이 톡, 하고 책 위로 떨어지기 전에, 얇은 손이 재빨리 훔쳐 지웠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만약 겨울을 처음 본다면, 난 저렇게 울 것 같아.

그런 눈물이었다.

봄에게 오지 말라고, 제발 오지 말라고. 저 정도로 애써 웃어 보일 것 같아.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도무결이 그 장면을 목격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멈춰섰을 장면이었다.

눈물을 훔치자마자, 남자애는 떠났다.  
도무결은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그쪽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척 서성였다. 그 애가 맞았던 햇볕을 맞으며. 어디선가 본 그 눈매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데구르르.

도무결의 손 위에서 돌아가던 펜이 멈췄다. 

그 남자애가 같은 과라는 걸, 이름은 이한결이란 걸, 안 게 신입생 OT 때였다. 이후로는 시선으로만 그를 좇았다. 내가 왜 보고 있지? 의문이 들 때면, 남자애가 우는 건 처음 봐서, 대학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이라서, 다양한 이유를 떠올렸다.
게다가 지켜본 바로, 이한결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도 띄는 애였다. 그는 경영학과 외에 다른 과에서까지 선망의 눈길을 받았다.

아. 물론, 그 ‘이한결’은 아니지만.

내가 이미 네가 이한결이 아닌 걸 아는데. 넌 나를 어떻게 설득할까. 어떻게 증명할까. 네 진짜 이름을 알려줄까….

벌써부터 앞으로가 기대됐다. 도무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증명하지 못하면.

내가 직접 알아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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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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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조심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길게 얘기하는 거 처음 봐.’

어제 도무결의 그 한마디가 자꾸 발끝에 채였다. 
늘 신경 쓰고 있었는데.
리포트 주제에 흥분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한결은 시곗줄을 매만졌다.

애초에 ‘그들’이 원한 건 세 가지였다.

첫째, 1등을 할 것.
둘째, 행동거지로 얼굴에 먹칠하지 않을 것.
셋째, 항상 말은 짧게, 조금만 할 것.

첫째와 둘째 조건은 그들의 격조 때문이었고 셋째 조건은 들킬 위험 때문이었다. 말이 길어지고 많아질수록 정보량이 늘어나고 실수가 늘어날 게 분명하니까.

얕은 숨을 몰아 쉰 한결은 곧 필기에 집중했다.

2교시 교양은 동기들 대부분과 시간표를 맞춘 강의였다. 조모임도 없고 오픈북 시험이 전부라서 수업 태도가 불량하거나 대리 출석이 잦은 대형 강의. 태수는 수진이와 속닥이며 필담을 나눴고 연아는 아까부터 졸았다. 그래도 재민이와 다른 동기 하나-주안이었던가-는 강의를 듣는 척이라도 했다.

그들 사이에서, 한결은 교수님의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었다. 이미 입학 차석이었고, 첫째 조건 때문에 무조건 이번 학기에는 과탑을 해야 했다.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뇌가 그걸 처리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보다 훨씬 많은 일을…”

띠리리링.

책상 위에 꺼내 둔 한결의 휴대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필기를 하느라 조금 늦게, 거절 버튼을 눌렀다. 

옆에 앉은 재민과 주안이 한결을 빤히 바라봤다. 왜 진즉 무음이나 진동을 해두지 않았냐는 그런 눈치였다. 

강의실 앞을 살피니, 교수는 못 들은 척, 매끄럽게 수업을 이어갔다. 

“…흠… 해요. 어떤 사람이 자꾸 떠오른다면, 그건 뇌가 이미 그 사람을…”

통화 목록을 터치했다.

[ 내동생♥︎ ]

어머니께 월세는 다음 날 바로 보냈는데 집에 무슨 일이 생긴걸까.
한결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신호음이 몇 번 가더니 동생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나나야. 미안해. 수업 중이라 거절했었어.”
『오빠! 수업 중이었구나. 내가 더 미안.』

내 동생 한나나. 

밝기도 밝고 어여쁘기도 어여쁜 누이는 착하기까지 했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피어올랐다.

“아냐. 집에 무슨 일 있어?”
『아니! 오빠 보고 싶어서. 집에 언제 와?』
“저번 주말에도 갔는데 그새 또 보고 싶었구나. 앞으로 주말마다 갈 거야. 매일 보고 싶어?”
『당연히 보고 싶지! 그게 그냥…』

왠지 목소리가 어두워서 미안해졌다. 한나나는 그곳에서 매일 고생일 텐데. 자신만 좋은 오피스텔에서, 이런 창창한 대학 생활을 누리다니.

『어젯밤에도 엄마아빠 싸웠어. 오빠가 있었으면… 나보다 잘 말렸을 테니까 생각나서 연락했어.』

또 그랬구나, 지겹지도 않나.

한결은 입술을 잘근 씹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나나야.”
『아냐! 오빠가 뭐가 미안해! 절대 아냐!』

아니. 그냥. 은 한나나의 말습관이었다. 제게는 아니, 그냥을 안 쓰면 말 못하는 한국인 귀신이 붙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괜히 말했다. 오빠 신경쓰게.』
“나나야.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숨기지 말고 다 얘기해.”
『으응… 알았어. 오빠. 그럼 주말에 오는 거지?』
“빨리 갈게. 금요일 저녁에 갈게.”
『아싸. 내일 오네! 오빠, 내일 저녁은 우리 둘이 따로 편의점에서 라면 먹고 들어가자. 나 라면볶이 먹고 싶어.』

그래그래, 나나야. 오빠가 사줄게…

한나나의 쾌활함이 애처로움을 애써 숨기려는 노력임을 모르지 않았다. 한동안 수다가 이어지다가 전화를 끊었다.

한결은 다시 강의실에 들어가 수업을 마저 들었다. 한나나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귓가를 떠돌아 필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삼십여 분 남은 수업이 끝나고, 동기들과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원래 동기들은 학교 앞 맛집에서 점심을 먹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결이 따로 학식을 먹겠다며 몇 번이고 거절하자, 동기들은 돌연 그 계획을 취소했다. 자기들도 한결과 같이 학식을 먹겠다는 거였다. 
한결은 옅게 미소 지으며, 속으로 작은 긴장을 피워 올렸다. 타인과의 접촉은 최소화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리는 교양관을 빠져나왔다. 

“한결아. 그런데 넌 왜 맨날 벨소리로 해 놔?”
“…응?”

학식 자판기 앞에서 수진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옆에 선 태수가 뭔가 떠올랐는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도 한결이 수업 때 한 번 문자 소리 울렸지.”
“아…”

휴대폰은 언제나 벨소리로 해두었다. 전화는 음량을 줄이지 않았지만, 그 외 알림은 가장 작은 크기로 줄여두었는데 아무래도 들렸나 보다. 

“한결이 상남자네? 우아하게 생겨서는 의외다.”
“난 진동 따위 하지 않는다! 무음 따위 개나 줘라!”

한결은 난처한 기색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노력했다. 빨리 대답해야 주제가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

“꼭 그런 건 아닌데… 벨소리로 해둬야 연락을 잘 받아서.”
“한결이 진짜 다정하다. 요새 카톡 씹는 애들이 한둘이 아닌데.”
“다들 언어와 표현 수업 과제는 했어?”

억지로 대화 주제를 돌리며 식판을 집어들었다. 다행히 이후에는 미팅 후기나 누가 과제를 망했다느니, 어느 수업은 어땠느니 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도무결 이름이 튀어나온 건 그 부근이었다.

“야. 맞다맞다. 대박인 게 쟤가 우리 과 수석이래.”
“누구?” 
“방금 창문으로 지나간 찐따.”
“아, 그니까 누구!”
“누구긴 누구야. 도무결이지.”

학관 창문이 바로 마주보이는 자리에 앉은 재민과 주안이 주거니 받거니 말했다.

도무결. 그 단어에 한결의 젓가락이 멈칫했다.

방금 밖에 도무결이 지나갔나 보다.

“근데 쟤 방금 여기 엄청 쳐다보지 않았냐?”
“밖에서 여기 뭐 볼 게 있다고.”
“우리 중에 쟤랑 친한 사람 있어?”
“있겠냐. 수석인 건 어떻게 알았어?”
“과사 갔다가 주워 들었지.”

도무결이 수석이었구나. 그럼 이번엔 자신이… 수석을 할 수 있을까.

도서관에 더 자주 들르고 집에서도 내내 공부에 몰입해야겠다는 스케줄 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주말에는 공부하기 어려우니까 평일에 더 매진해야 했다. 한결은 볼 안쪽을 깨물었다.

“공부랑 사귄다 했더니 수석이네.”
“그래도 대단하네.”
“난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공부만 하고 싶지는 않다.”
“저렇게 해서 과탑 못하면 병신임.”

재민이 밉살궂게 비꼬자 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 말이 좀…. 수석 정도면 괜찮지 않아?”

한결도 엉겹결에 본심이 툭 튀어나왔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좋은 거라고 생각해.”

무리 일동이 한결을 바라봤다. 잠깐의 적막이 흘렀다.

아차. 싶었지만 한결은 무덤덤히 밥을 씹었다.

“하하하. 그치? 뭐 열심히 해서 다른 사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래. 저러고 다니는 것도 낯가림이 심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연아가 뒷말을 보태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수진도 그렇게까지 찐따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로 거들었다.

이들이 도무결의 진짜 얼굴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도무결의 그 얼굴을 아는 사람은 저뿐이겠지.

네온사인이 터져나오던 밤에 보았던 그 얼굴. 오늘도 마스크와 모자로 꽁꽁 싸맸을, 남들은 아무도 모르는 그의 순간. 
얇은 짜릿함이 한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동시에 걱정이 앞섰다. 일주일 준다고 했으니까, 남은 기간은 6일.

‘…그 도무결을 대체 어떻게 설득하지.’

뭐라도 아는 것처럼, 의심 덩어리인 도무결 앞에서 ‘명품과 짝퉁’ 주제 리포트를 태연히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 도무결 : 설득 언제 할 거야? ]
[ 도무결 : 주제든 이름이든 ]
[ 도무결 : 진짜 이름이 이한결? ]

양반은 못 되겠네.

한결은 갑작스런 체기에 말없이 국만 퍼먹었다.






*





“이건 어불성설이야.”
“아하.”
“애초에 나 자체가 이한결인데 내가 이한결이란 걸 대체 어떻게 설득하라는 거야?”

야외 테이블에 두 사람은 연적처럼 마주 앉아 있었다. 도무결의 긴 다리가 벤치 의자 밖으로 보란듯이 삐죽 튀어나왔다.

“존재하지 않는 걸 존재한다고… 증명하라는 거랑 다름없어.”
“이한결은 존재하는데? 여기.”
“…….”

도무결이 손가락으로 한결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문제는 진짜냐 아니냐.”

삐죽, 입꼬리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이 상황이 퍽 재밌다는 거다. 한결은 발끈했지만 그 뒤에 어쩌지는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애초에 같은 조를 하지 말 걸. 아니, 같은 조가 된 순간 내가 주제를 먼저 정해버릴 걸. 아니! 그냥 주제가 어찌되든 그냥 수강 포기를 해버릴까. 어차피 도무결이 껄끄러운 거…

말을 고르던 한결은 방향을 틀었다.

“도무결. 넌 내가 뭘 어쩌길 바라? 짠. 난 사실은 이한결이 아니라 외계인이야, 라고 말하기라도 할까? 아니면 혹시 명품이나 짝퉁에 뭐 한 맺힌 거 있어?”

말을 하다보니 더 열이 받은 한결이 이를 꽉 깨물었다. 반면 도무결은 여유만만이었다.

“음… 나는 이 주제를 하고 싶다고 했고 넌 싫다고 했고. 그래서 네가 날 설득 중일 뿐인데 여기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지? 참고로 난 명품이든 짝퉁이든 내 맘에 들기만 하면 상관 없다는 사람이 한 맺힌 것도 없어.”

도무결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의 ‘명품과 짝퉁’을 가리켰다.

한결은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네 말이 맞아.”
“좋아. 그럼 인정하는 거야?”
“그래.”
“네가 이한결이 아니란 걸? 그럼 알려 줄 거야?”

도무결이 턱을 괸 고개를 들어 성큼 다가왔다.
테이블 위를 턱 짚고 삽시간에 가까워진 얼굴에서 코끝이 달아오를 정도로 맹렬하고 달콤한 향이 끼쳤다. 이게 민트인가, 박하인가, 두 개가 같은 건가… 스친 생각을 슥슥 지웠다. 어차피 이런 향에 익숙해질 필요가 없었으니까.

“아니. 주제를 처음 정한 명품과 짝퉁으로 하겠다는 말이었어.”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주제였지만, 일단 선정해주고, 수강 포기를 알아볼 작정이었다.

“아쉽네. 이름을 알려준다는 줄 알았는데.”

차분한 시선으로 얄미운 입꼬리를 노려봤다. 한쪽만 비뚜룸히 올라간 입가가 정말 아쉽다는 표정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눈을 마주 둔 채 물었다.

“내 이름이 그렇게 궁금해?”
“어. 알려주려고?”

도무결은 예상대로 먹이를 낚아챘다. 바싹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에게 기대감이 서렸다.

“응. 알려줄게.”
“뭔데.”

눈동자가 한 박자 멈추고, 한결은 그를 한 번 훑고 뱉었다.

“…이한결.”
“…어?”
“이한결이라고.”

고개를 들어 여상히 데자와 캔에 남은 밀크티를 입에 털어넣었다. 시선을 내리까니 도무결이 꿀꺽, 대는 자신의 목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입맛을 한 번 다시고 도서관 앞 야외 테이블에서 먼저 일어섰다. 그의 시선이 입술까지 따라왔다.

“…너 지금 장난하냐?”
“내가 알려준 게 마음에 안 드는구나? 어쩌지. 내 이름은 그것뿐인데.”
“하….”

도무결이 모자를 고쳐쓰며 실소를 흘렸다.

“주제는 정했으니까 됐지? 설득이고 뭐고 덕분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많이 쏟았네. 진즉 이렇게 할 걸 그랬다.”
“…….”

한결은 밀려오는 자잘한 승리감에 웃음이 슬슬 흘러나왔다.

“리포트는 전에 얘기한 대로 메일로 보내서 취합하는 걸로 해. 앞으로 잘 해보자. 도무결.”

도무결의 어깨를 가벼이 두드린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유유히 도서관에서 멀어졌다.

“…저게 아주…”

도무결은 삐딱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한결이 응달 코너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쉽게 알려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러니까 더 궁금하네. 도대체 뭘까, 너는.

무어라 정의되지 않은 결 하나가, 흉골 어딘가에서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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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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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자리잡았지만 바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이미 몇 번 목격한 도무결의 비웃음이 눈가에 아른거렸다.

샤프에 힘을 주자 샤프심 끝이 부러졌다. 다시 토독 샤프를 누르고 머리를 힘주어 짚었다.

집중해야 했는데. 안 그래도 연락이 왔는데.

[ 중간고사 준비 들어갔겠지. ]
[ 1학기 성적도 할아버지께 보여야 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
[ 네가 뭘 빚졌는지 잊지 말아라. ]

송곳 같은 글자들이 한결의 동공을 찔렀다.

그래서 더더욱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도무결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도무결은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걸까?’

이해 가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한결이 아니라고 의심하는 건 왜 인지. 그 수려한 외모를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것 또한 이유를 알기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도무결이 더 수상한 느낌이 강했다.
그러나 그게 이상하게도 못나 보이지는 않았다. 극도의 개인주의로 공부만 파는 수석.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
고고한 한 마리의 학? 아니. 그렇게까지 우아하지는 않다. 도무결은 뭐랄까, 그보다는 눈을 떼기 어려운 느낌이었다.
마치… 바라보면 자신을 삼켜버릴,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은 그런 느낌.

뭐가 됐건 더 이상 엮여서 좋을 게 없어.

평소에는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마주할 때 형형한 빛이 깃든 눈을 보면 몸서리가 쳐졌다.
시곗줄을 느리게 매만지며 지난날을 되돌아봤다. 벌써 하루의 대부분을 도무결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하는 데 쓰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가벼웠다. 이대로 수강 포기까지 해서 자신이 없어지면 과제는 도무결 혼자 해야겠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그를 떠올리니 고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수강 포기가 안 된다고요?”
“왜 안 돼요, 되긴 되죠. 근데 지금 보니까 한결 학생이 이걸 드롭하면 한 학기 충족학점 1점이 모자라다는 거죠. 학점 꽉 채워서 겨우 1점 모자란 거긴 한데…”
“…….”
“이게 전공 필수라 계절학기도 안 열리고, 그래서 내년 신입생들하고 어색하게 같이 듣던가 해야 하는데 그러느니 그냥 수강하는 게 백 번 낫다 이거죠.”

신입생이라 잘 모르나본데… 라면서, 과사무실 직원은 친절하게 몇 번의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오지랖 부려서 미안한데 그냥 들어요.”

한결을 설득하는 직원은 눈웃음을 치더니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묻지도 않은 경우의 수까지 얘기해주는 걸 보면, 과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흘러나오는 건 이 직원 때문이겠구나, 짐작이 됐다.

어쨌거나 충족학점이 모자라면 1학기 과탑도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한결은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포기했다. 

그들의 조건은 지켜야 했고, 도무결은 뭔갈 아는 것처럼 호시탐탐 죄어오고. 둘 중에 따지고 보면 그들의 조건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아직 뭐가 어떻게 된 건 아니니까….

게다가 이렇게까지 도무결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신경쓰는 것도, 속절없이 휘둘리는 것도 이제는 짜증도 났다.

결국 직원에게 미소로 감사를 표하고 과사무실을 나왔다. 
소중한 공강 시간을 도무결에, 과사무실에 써버렸으니 최대한 빨리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늘 가던 도서관이 아니라 이공계 도서관으로 향했다.

[ 황연아 : 한결아 우리 중도갈건데! ]
[ 이한결 : 아 미안. 난 집에서 하려고 ]
[ 김태수 : 내가 한결이네 오피스텔 살았으면 나라도 거기서 공부함 ㅇㅇ]

오전에 나눈 단톡방 메시지. 
최대한 무리와 떨어지고 싶은 마음에 정신을 차려보니, 집에서 한다고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 후였다. 

다행히 이공계 도서관은 중앙도서관에서 이십분은 넘게 걸어야 했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짜증과 피로가 뒤섞인 머리에 봄바람이라도 한 번 식혀줬으면, 정도의 마음이었다. 
그렇게 이공계 캠퍼스 후문에 다다랐을 때였다.

평소엔 학생 발길이 뜸한 그 길목에, 시야를 단번에 가르는 차 한 대가 정차해 있었다. 누구라도 한 번쯤 힐끗할 만한 외제차였다. 차에 관심 없는 사람도 모를 수가 없는 그런 차.
운전석에서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정중히 열었다.
저 비싼 차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무심코 흘려 본 한결의 발걸음이 다음 순간 멈춰버렸다.

모자를 한 번 더 깊게 눌러쓰며, 한 남자가 그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머리카락에 감춰진 사나운 눈매.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도 가려지지 않는, 형형한 광채.

…도무결?

한결은 자리에 붙박이가 돼 꼼짝없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저런 외제차와 도무결이라니, 싶었지만 위화감은 없었다. 그만큼 그는 자연스럽게, 얼굴이 가려진 채로도, 고급스러웠다.

그동안 받아들였던 사실과 눈앞의 광경을 일치시키느라 한결의 사고가 느리게 흘렀다.

‘옷도 좀… 맨날 비슷하지 않냐.’

언젠가 재민이가 했던 말이었나. 

차에 올라탄 도무결이 차 창문을 반쯤 내렸다. 먼지를 내보내려는지, 입고 있던 집업을 벗어 털었다. 모자를 벗고 잔뜩 눌린 머리를 손으로 헤집어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곧 앞좌석에서 누군가 헤어용품을 건넸고, 도무결은 머리를 손질했다. 동시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이게 무슨…”

…그러니까 진실은 도무결이 대단한 집 자제라도 된다는 뻔한 이야기였던 거다.

그냥 외제차도 아니고 무슨 수행 비서라도 되는 듯 보이는 차문까지 열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웃기지도 않네. 정체는 자기도 숨기고 있으면서”

한결은 습관적으로 시곗줄을 매만졌다. 오늘따라 손목을 감싼 고급 가죽이 무겁게 느껴졌다.
도무결 정도면 ‘그들’과 어쩌면 연관이 있을까? 그래서 의심하는 걸까? 이름이 비슷하기도 한데. 한결. 무결.

곤두선 경계심이 발목을 붙잡았다.

‘…이걸 어떻게 한 방 먹이지?’

서둘러 도서관을 향하던 그는, 뒤를 돌아 외제차가 사라진 자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두고 봐. 진짜 잘해보자고.




*





금요일 6교시가 끝나자마자 한결은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후줄근한 후드티와 낡은 청바지로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탔다. 당연히 고가의 시계며 가방 또한 챙기지 않았다. 
앞으로 1시간은 넘게 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재음의 집은 대한민국에서 땅값이 가장 높기로 유명한 자치구에 속했다. 하지만 그의 집은 불우했다. 자치구 가장 끄트머리의 맞지 않는 조각을 끼워 맞춘 동네. 그곳의 가장 높은, 끝도 모를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다 보면 집이 나왔다.
한나나와는 그 계단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편의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마을버스에서 내렸다. 십 분 정도 더 걸으면 나오는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 걸터앉은 한나나가 보였다. 멍하니 건너편 상가의 치킨집에 정신을 빼앗긴 채였다.

“나나야. 오빠 왔어.”
“오빠!”

한나나는 가방을 내팽개치고 달려들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니야, 오빠? 너무 배고파. 여덟 시도 넘었어.”
“미안해. 생각보다 머네.”
“아냐. 오빠. 뭐라고 하는 건 아니구. 그냥…”

화사하게 웃어 보이자 한나나는 세탁한 지 얼마 안 된 운동화만 애꿎게 내려다봤다. 물론 운동화는 프린트가 다 벗겨져 있었지만.

우리가 비록 없지만 깔끔하게 살자.
중학교 입학할 때, 동생과 새끼손가락 걸고 한 단 하나의 약속. 비록 그는 집에서 나왔지만, 동생은 아직도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혹시 나 삼각김밥도 먹어도 돼?”
“당연히 되지. 오빠가 다 사줄게.”
“진짜지? 바나나 우유도?”
“그럼. 천하장사 소시지도.”

두 사람은 모두 동생이 좋아하는 것들만 잔뜩 골라 계산대에 섰다. 그의 몫은 매운 컵라면 하나뿐이었다. 한나나가 콧노래를 부르며 테이블에 먹을 것을 늘어놓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오빠. 근데 진짜 무슨 일인데 그렇게 서울 멀리까지 간 거야?”
“아니… 그냥…”
“오빠 지금 나 따라한 거야?” 
“응. 맞아.”

남매는 순식간에 저녁을 해치웠다. 그가 특히 매운 라면을 잘 먹지 못하니 한나나가 타박했다.

“오빠는 매운 거 잘 못 먹으면서 꼭 고르더라.”
“맛있잖아.”
“근데 잘 못 먹잖아. 그럼 애초에 먹질 말아야지.”
“그러게.”

밥을 다 먹은 남매는 차곡차곡 계단을 올랐다. 봄밤이 소란스럽지 않게, 두 손을 꼭 잡고.

“오빠. 올라가다가 소화 다 되겠어.”
“뭐 더 사올걸 그랬나?”

십 년도 넘게 오르는 이 계단이, 남매는 여전히 어려웠다. 어쩌면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살아도, 살아도, 매일이 어렵고 어려운 게.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는 게. 

그는 종종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괜찮아. 오빠 다음 주에도 올 거야?”
“응. 이번 주부터 주말에는 마트에서 다시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어. 이제 매주 와야 해.”
“진짜? 그럼 나 토요일 점심에 놀러 갈래.”

우와마트는 동네의 가장 큰 마트였다. 이곳에는 삐까번쩍한 대형마트가 들어서기에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편의점만 있기에는 어중간해서 적당히 큰 동네 마트 장사가 잘 됐다.

“일요일에는 교회 갈 거지?”
“응... 가야지.”

한나나는 교회를 좋아하면서 싫어했다. 아침 청소년부 예배를 드리면 나오는 간식, 점심 대예배를 드리면 나오는 점심 국수, 오후 예배를 드리면 나오는 간식. 이 세 가지를 특히 좋아했고, 지루한 설교나 청소년부 활동은 싫어했다.
한재음 역시 어렸을 때 몇 번 가봤지만 일찌감치 발걸음을 끊었다. 그는 차라리 배가 주린 편이 나았다.

끼이이익.

쇳소리가 요란한 철문이 열렸다. 보안이라고는 신경 쓰지도, 쓸 것도 없는 집. 헉헉거리며 따라온 한나나가 말없이 바깥 방으로 들어갔다. 집은 총 세 개의 문이 있는 조악한 조립식 건축물이었다. 안방과 부엌이 있는 첫째 문, 한나나의 방인 둘째 문, 자신의 바깥 방, 셋째 문. 화장실은 한나나의 방 옆에 자그맣게 하나가 딸려 있었다.
그는 심호흡 후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면 바로 안방이 있고, 그 옆에는 간이 부엌이 딸린 구조였다.

“저 다녀왔어요.”
“어. 왔니.”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을 켜두고 시체처럼 누워 응시하던 어머니가 건성으로 인사했다.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 옆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잠들었고, 어머니도 한 잔 한건 마찬가지인지 안색이 불콰했다.

“일요일 저녁에 다시 나가요.”
“그래. 밥은 먹었지?”

텔레비전에서 콰광 큰 소리가 들렸다. 중요한 드라마 장면인 듯, 어머니가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 이어서 이제 그만 문을 닫으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고개만 꾸벅해 보이고 문을 닫았다.

주말이 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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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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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오피스텔로 돌아오는 길. 몸도 마음도 잔뜩 지쳤다.
입학하고 얼마간은 순탄한 날들이 지속됐었는데. 그는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이게 다 도무결 때문이야.

따져보면 개강 파티 이후 줄곧 그랬다. 초조함에 거스러미도 없는 손톱을 만지작거렸고, 피곤도 차곡차곡 쌓였다. 열람실에서 집중하다가 밤 늦게 오피스텔에 도착하면 씻고 과제를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삐비비빅 소리와 함께 오피스텔 문이 열렸다. 한결은 널찍한 원룸에 들어섰다.

서랍 안에 조심스레 시계를 내려놓았다. 가방은 소파 옆에 두고, 허물처럼 옷만 우선 갈아입었다. 맨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으니 이제야 숨통이 트였다.
환기를 위해 열어두고 간 창문으로 봄바람이 따라왔다. 한결은 멍하니 계절을 실감했다. 책상 위로 짙은 보랏빛 노을이 깔렸다.
액자 두 개가 윤슬처럼 빛났다.

중학교 졸업식 사진, 고등학교 입학식 사진.
사진 속 활짝 핀 웃음.

유난히 함께 있을 때면 더더욱 반짝이던 시절은, 이제 한 번의 눈 깜빡임보다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불과 몇 주 전에는 뭘 봐도 눈물만 도르륵 흘리던 겨울이었는데 이제는 봄이었다. 그때만 해도 차라리 죽었으면 싶었는데, 제가 여전히 살아있는 걸 보면 죽음은 간절함을 싫어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위로.
지금은 가장 먼 속죄.

언제까지 피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한 번은 만나야 한다고, 사진 속 두 사람이 속삭였다. 그는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 만나고 싶은데 만나러 가도 될까요? 이제 그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잘할게요. ]

답장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저런 상황을 가늠하자 피로가 다시금 몰려왔다. 그는 눈을 깊이 감았다. 답장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필요할 때만, 편할 때만 연락이 오는 것. 이것 또한 받아들여야겠지.

만날 수 없다면, 지금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는 결심이 빠르게 섰다.

한결은 내려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들고 이번에는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까지 펼쳐두고 비장하게 검색을 시작했다.
도무결이 자신을 의심한다면, 자신도 의심해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지피지기 백전불태. 텅 빈 손에 뭐라도 알게 되면 무기가 하나 생긴 기분이 될 것이리라.

이름, 학과, 학번, 영어이름. 학교 커뮤니티부터 인별까지 꼼꼼히 둘러봤다. 그래도 수석 입학이니까 인터뷰나 기사라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컸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화면이 반복됐다. 한결은 노트 위에 동그라미들을 마구 그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도무결은…”

뭐하는 애지. 얼마나, 뭘 알고 있는 거지.

무거운 숨결이 둔탁하게 흩어졌다.

그 사이로 도무결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노트 위에 복잡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무서운 동그라미들이 생겼다. 한결은 그 삐죽삐죽 동그라미들 위로 선을 그었다. 고슴도치 같은 모양이 몇 개나 만들어졌다.

그는 그 종이를 가만히 바라보다, 결심이라도 한 듯 펜 끝으로 가운데를 푹 찍어 구멍을 냈다.








*





한 주가 지나고, 다시 돌아온 설득의 미학 수업. 한결은 태수네와 바짝 붙어 앉았다. 조금의 틈이 생기면 도무결이 혹시 말을 걸어올까 봐도 그랬지만,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도무결의 정체를 생각할 시간. 제대로 한 방 먹이고, 그의 의심을 떨쳐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이 서질 않았다.

수업이 예정대로 끝나고, 무리는 짐을 쌌다. 태수가 수진을 챙기며 모두에게 물었다.

“이제 다들 슬슬 중간고사 공부하고 있냐?”
“어우. 난 대학 오면 공부 안 할 줄 알았는데.”

저마다 앓는 소리를 내는 와중에 한결은 간결히 답했다.

“그럼.”
“한결이는 역시 성실해. 공부해야 되는데 너무 하기 싫어!”

진저리를 친 연아가 먼저 인사하더니 재민과 주안의 팔목을 잡고 한쪽으로 끌었다. 한결에게는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점심은 태수랑 수진이 둘이 먹어야겠다. 우린 따로 약속이 있어서.”

아…. 둘이 있게 피해 줘야겠다.

연아에게 응답으로 눈을 깊게 깜빡여 보였다. 그녀는 정말 성실히 태수와 한 약속을 이행 중이었다. 개강하고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정말 좋은 친구가 됐다.
그 옆의 재민이 제안을 건넸다.

“야. 너도 같이 갈래? 민주 선배 만나는 건데 그 선배가 너랑 밥 먹어보고 싶다고 했음.”
“아냐. 나는 따로 일이 있어서 가볼게.”

한결은 필요할 경우 짓는 예의상의 단호한 미소를 끌어올렸다. 자신이 이런 표정을 지으면 대부분 물 흐르듯 넘어가 주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작은 무기 중 하나였다.
무기가 통한 듯, 재민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내일 봐!”
“아, 맞다. 한결아. 우리 오늘 저녁에 광장 잔디밭에서 술 노상할 건데 심심하면 연락해.”

태수의 제안에 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연락할 리가 만무했다.
시끌벅적했던 강의실이 금세 조용해졌고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큰 그림자가 홀로 건물을 빠져나가는 한결의 뒤를 밟았다. 누군지 뻔히 알았기에 따라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어디 가?”

건물 서관 쪽 응달진 복도를 지날 때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곳, 도무결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주제는 정했잖아.”

싸늘한 기세에 본능적으로 뭘 또 알아냈나, 의식 한 켠이 술렁거렸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가소롭다는 듯 픽 하고 웃음을 뱉었다.

“너 설득의 미학 드롭하려고 했다며?”

무표정했던 한결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도무결은 수석이었으니까, 어쩌면 교수나 사무실 직원이 더 호의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곧장 들었다. 그는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팔 안에 단단히 안으며 복도 끝쪽으로 몸을 돌렸다.

상대하지 않으리란 단호한 입장 표명이었다.

“네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네.”
“같은 조니까 상관이 아주 많지 않을까?”

성큼, 도무결이 쫓아왔다. 

“드롭 안 했으니까 됐잖아. 그만 가줄래.”
“이름도 안 알려주고, 드롭하려던 것도 안 알려주고. 너는 말 안 하는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는 복도 끝에 다다른 한결의 어깨를 짚었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털어내며 사납게 고개를 들어 도무결을 올려다봤다.

“너도 말 안 하는 게 아주 많던데.”

여기서 이렇게 쓸 카드가 아니었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어서 그랬다.
그는 짧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묘한 위압감을 뚫고 기분 좋은 도무결의 향이 진득하니 살갖에 와닿았다. 한결은 말을 이어갔다.

“너야말로 이렇게 꽁꽁 싸매고, 다 가리고 다니는 거. 왜 그런 거야?”
“…….”

늘 우아한 선을 그리던 한결의 눈매가 답지 않게 사나움을 뿜었다. 비아냥이 쏟아졌다.

“어디 재벌집 사람이라도 되시나 봐요. 도무결 도련님.”
“…….”
“옷도 맨날 똑같은 거 입고 다 가리고 다니는 이유가 뭘까? 서민 코스프레 중이신가? 도둑맞은 가난같은 건가. 알고 보면 맨날 입는 이 옷도 다 명품이려나.”
“…….”
“대답 좀 해볼래, 도무결?”

말을 하면 할수록 그동안 받았던 의심을 돌려주는 기분이라 쾌감이 일었다. 동시에 미세하게 구겨지는 그의 얼굴이 기분 좋았다. 늘 무표정한 도무결에게, 내가 이런 변화도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한 마디 더 꺼내려는데, 도무결이 응수했다.

“…그래서?”
“뭐?”
“명품 맞아. 새로 나오면 우리 집에 따로 먼저 갖다 주거든. 그 중에 아무거나 집어 입는 거고.”
“…….”

모자를 고쳐쓰며, 나름대로 사납게 치고 들어온다고 찌르는 꼴이 꽤 귀엽다고, 도무결은 생각했다.

“난 딱히 숨긴 적 없어. 귀찮아서 그러지.”

도무결은 어깨를 으쓱해보이고 한결을 관찰했다. 이런 반응은 계획에 없었는지 동공이 흔들리더니 뺨이 발그레해졌다. 그래도 맹렬했던 그 기세는 꺾지 않았다.

“그래? 그럼 네가 귀찮지 않도록 나도 따로 소문내지 않을 테니까, 너도 나 좀 귀찮게 굴지마.”

한결은 몸을 홱 문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어깨를 잡혀 꼼짝없이 몸 전체가 도무결을 향해버렸다.

“그런데 진짜 신기하네. 어떻게 알았어?”

반항적인 눈빛이 마스크와 도수 없는 안경을 뚫고 도무결에게 닿았다.

“뭐야. 이거 놔.”

우악스럽게 잡힌 어깨를 빼내려는 듯 한결이 손을 들었지만 풀리지 않았다. 몸을 뒤트는 꼴에 도무결은 심사가 뒤틀렸다. 

투욱. 

포기할 줄 모르고 움직이는 덕분에 한결이 들고 있던 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너 나만 따라다녔나 봐.”
“그게 아니라…”

이한결이 아니라면 대체 이건 누굴까.

도무결은 제 앞에 있는 남자애를 샅샅이 되짚었다.
겉보기에는 온유하고 우아한 척하지만, 보면 볼수록 말도 안 듣고 고집도 있고 쓸데없이 절박했다. 하여간 이한결과는 달랐고, 아니었다.
절박한 건 좀 닮았나 싶기도 했지만.

“난 네 이름도 모르는데 이건 좀 불공평하지 않나.”
“…이한결이라고. 내 이름.”

흐읍. 한결이 숨을 삼켰다. 

어깨를 붙잡힌 채 어느새 복도 코너로 몰린 상황이, 위협적으로 다가왔지만 왠지 무섭지는 않았다. 자신보다 더 큰 도무결이 때릴 수도 있지만. 저 날카로운 눈빛이 이한결에 대해 어딘가 소문이라도 낸다면.
하지만 때리진 않을 것이다. 맞는 것도 상관없긴 했지만. 게다가 언제나 정말 무서운 건 소문보다 그 안의 진실이었다.

한결이 꼼지락대자 도무결이 눈썹을 찌푸렸다.

“따라다닌 주제에 이렇게 만지는 것도 싫어해서야 되겠어?”
“…허락도 없이 만지면 당연히 누구든 싫을 거야. 놔 줘.”

어금니를 사리물며 답하자 도무결은 그제야 어깨를 놔주었다. 잔뜩 움츠러들었다가 풀리는 어깨뼈의 느낌이 묵직했다.

“난 안 싫은데. 어쩌지.”
“…….”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듯 주저하더니 말했다.

“끝까지 진짜 이름을 안 알려주니까 뭐… 야. 너. 저기.”
“한결이라고.”

이를 악물며 이름을 내뱉은 한결은 서둘러 떨어진 책을 주우려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상대방의 손이 더 빨랐다. 그 큰 손으로 마스크를 내리더니, 가벼운 입매가 후 하고 책 표지의 먼지를 불었다. 바닥에 떨어지며 더러워진 부분도 스윽 닦아 주었다.

“어떡하냐. 나도 이제 너 따라다녀야겠다.”

도무결이 책을 건넸다. 그것을 잽싸게 잡아채자 뒷말이 따라붙었다. 진득한 목소리가 한결의 귓가에 내려 앉았다.

“내가 네 이름 알아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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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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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왠지 뻐근했다. 낮에 도무결에게 붙잡힌 이래로 쭉 그랬다.
다시는 닿고 싶지 않다는, 경계심이 곤두섰다. 무엇보다 그 말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어떡하냐. 나도 이제 너 따라다녀야겠다.’

너의 정체를 바로 옆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야 말겠다는 선전포고 말이다.
한결은 강의실 뒷자리에 자리 잡은 태수네 옆에 앉았다. 수진이 반색하며 반겼다.

“한결아. 오늘은 앞에 안 앉아?”
“아. 가끔 같이 듣는 것도 좋잖아.”
“오. 개감동. 우리 놀기만 하는데 품어주다니. 여윽시 이한결.”

재민이 오바스러운 리액션을 보이자 연아가 깔깔 웃었다. 고백한 대로, 놀기만 하는 걸 좋아해도 언제나 반겨주는 좋은 동기들이었다. 자신들의 피드를 서로 돌려보며 어젯밤 술자리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이 사진 뭐냐. 첨 보는데?”
“야. 내가 어제 스토리에 올린 거잖아. 관심 좀?”
“술값도 선배들이 다 내줘서 진짜 감동했잖음.”
“중간고사 끝나고 한 번 더 고?”
“한결아. 너도 한 번 꼭 와라.”
“그래. 다음에 시간 맞춰볼게.”

고개를 끄덕인 한결은 토독 샤프심을 눌렀다. 동기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도무결을 곱씹었다.

재벌이란 건 확실한데, 가리고 다니는 이유, 숨기는 이유는 대체 뭘까. 어떻게 하면 이걸 알아낼 수 있을까?

도무결을 미행이라도 해야 하나.

한결은 턱을 괴다가 화들짝 자세를 바로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도무결을 따라다닐 생각을 하다니. 내가 왜.





* * *





며칠이 몇 달 같았다.

한결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내려올 때마다, 도무결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쓴 지난날이 스쳐갔다.

도무결은 정말이지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가 말한 그대로 붙어 다니면서 친해지기라도 할 생각인지.
불행히도 1학년 대부분의 수업은 공통 수강이었다. 언어와 표현부터 아카데미 기본 영어 수업, 설득의 미학 수업까지 합하면 거의 모든 수업을 같이 들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전공도 아닌 일반 교양 두 개가 도무결과 겹쳤다. 강의실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한결은 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수업 시간 내내 그를 곁눈질하며 자책했다.

왜 같은 수업을 듣는지 진즉 몰랐을까. 도무결이 이렇게 눈에 띄는데.

“너도 이 수업 듣네. 같은 조원이라 그런지 반갑다.”

한결에게 유독 집요하게 구는 그는 함께 수강한다는 걸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 뻔뻔히, 모른 척 한결 옆에 앉았다. 물론 마스크에 다 가려서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못 봤지만.

“나는 태수네랑 앉을 거야.”
“거기 자리 다 찼던데. 아하. 혹시 대놓고 나 피하는 건가?”

같이 듣는 태수네 쪽에 앉으려는 노력도 했지만 언제나 도무결이 먼저 옆자리를 냉큼 차지했다.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쳐도 소용없었다.

“한결아! 지난 번에 필기… 엇… 옆에… 음… 아무튼 지난 번에 필기 빌려준 거 말이야…”

태수도 대놓고 위아래로 도무결을 몇 번 훑어봤다. 도무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한 번은 혼자 듣는 교양 수업 옆 책상에 모르는 가방이 턱 하고 올라왔다. 눈을 드니 도무결이었다. 

“도무결… 너 이 수업도 들어?”
“아니.”

뜨악한 자신에게 도무결은 마스크를 스윽 내리더니 입 모양으로 벙긋했다.

청강.

듣지도 않는데 청강을 하러 왔단 거다. 단지 한결이 듣는다는 이유로.

그때 얼마나 열 받았는지 한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수업에 최대한 집중하긴 했지만, 도무결을 신경쓰다보면 몇 번이나 앉아있던 자세가 흐트러지곤 했다.

‘나만 따라다녔나 봐.’

도무결이 했던 말이 반대가 됐다.

이쯤 되면 누가 따라다니는 건지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자신이 약자임이 분명했으니까. 구태의연하게 화난 티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극할 게 분명했다.

한결은 혼자 학식 식판을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유일하게 도무결과 겹치는 수업이 없는 날이었다.
지난번처럼 청강이라도 하면 어쩌지? 아침부터 한 고민이 무색하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숨이 트였다. 가져온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물을 떠 왔다. 태수네도 없어서 오랜만에 차분한 식사가 기대됐다. 

먹을 수 있는 한 느긋하게 학식을 먹었다.
한결은 먹을 때의 여유로움이 좋았다. 늘 음식과 싸우듯 먹는 부모님 밑에서 들인, 정반대의 습관이었다.
식사 도중, 도무결은 오늘은 뭘 하길래 안 보이는 건지 샛길로 샜던 생각에 찔끔 놀라긴 했다. 자신보다 키가 큰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기도 했다.
그것 외에 식사 시간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식판을 잘 반납하고 한결은 이공계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난 번, 집에서 한다고 거짓말한 이후, 늘 그곳에서 공부하는 습관이 들었다. 아는 사람도 없고 공부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도서관으로 잘만 가던 발걸음이 문득, 지난번 그 길목을 기웃거린 건 호기심이었다. 오늘은 도무결이 따라붙지 않아서. 나도 그 인간의 뭔가를 또 캐낼 수 있을까 싶어서. 다양한 무의식들이 한결로 하여금 고개를 빼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결은 보았다.

평소처럼 우중충한 옷과 마스크로 중무장한 도무결. 냉랭한 태도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다소 높은 어조였다.

“…할아버지 한 분 안 계신다고 이 난리 치는 게 너무 웃긴데요.”
“본가에서는…”

전에 보았던 중년 남자가 그 외제차 앞에 건조히 서 있고, 다른 통통한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그는 자못 비굴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도무결에게 굽신거렸다.

‘차성…?’

좀 더 잘 듣기 위해 한결은 타다닥 앞서 나가 골목 벽돌 뒤에 섰다. 생각만 했던 그 미행을 지금 하고 있는 거다. 자각하자 숨이 멈췄다.

“실장님. 확실히 하죠. 아버지는 오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가 오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전 안 갑니다.”
“그럼 본가에는 뭐라고 전할까요.”
“저는 차성그룹 명예회장님 뜻대로 할 거라고 전하세요.”

짓씹듯 마지막 말을 내뱉은 도무결이 인상을 찌푸렸다. 잊었던 뭔가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앞으로 학교나 자취방에 이렇게 불쑥 찾아오지 마세요. 절대. 세 번은 없습니다.”

여태껏 들은 것 중 가장 낮은 온도의 서늘한 목소리. 용건이 끝났는지 도무결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한결은 살살 걸으며 최대한 조심히 왼쪽 옆 골목으로 피했다. 그러다 혹시 뒷머리카락이라도 보일까, 쿵덕이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상가 뒤편으로 숨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숨을 고르는 사이, 방금 들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차성그룹. 명예회장. 도무결.

설마….

‘어쩌면, 그 애도 우리처럼 이곳에 불시착한 걸지도 몰라.’

언젠가 들었던 그 말. 저 애가 그 애구나.

조각난 퍼즐들이 맞춰지며 한결은 도무결을 그려냈다.

겨울 바람의 목캔디 향이 골목에 맞지 않게 퍼졌다. 지금은 봄인데.

한결은 그만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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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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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지만 가재도구라고 부를 게 없었다. 천원마트에서 산 싸구려 냄비, 후라이팬 하나씩과 수저, 빈 반찬통, 머그컵, 밥공기, 국그릇 두 세트가 전부였다. 식기가 전부 짝 지어 있는 이유는 혹시 모를 사태-한나나가 이곳에 올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주방까지는 세세하게 안 챙겼다. 애초에 밥을 해 먹을거란 가정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뭘 먹든 관심 따위 없으니까.

다행인 건 전기포트가 있다는 것. 

바지런히 따뜻한 물을 끓였다. 얼그레이차를 우린 뒤, 찬 우유를 넣어 밀크티를 만들었다. 한참 머그잔을 쥐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신성한 의식같은, 한결만의 극도의 스트레스 대처법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다 조금 미지근해졌다 싶어 밀크티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제야 고여있던 생각이 흐르기 시작했다.

도무결이 차성그룹 직계였구나.

엉킨 실타래가 풀렸다.

‘그래서 알고 있었구나.’

나를. 이한결을. 

하지만 ‘이한결’을 차성에서 본지 10년도 넘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한결’이 아니란 걸 알아본 걸까. ‘이한결’이 도무결과 쭉 연락했을까. 둘이 친했을까. 어떤 사이였길래….

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자세한 내막은 그도 모르니 의심에서 멈춘 것이리라.

손끝이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머그잔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밀크티의 온기를 좀 더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따뜻한 용기였다. 앞으로 4년은 더 이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는 응원같은 것.

들킨 건 들킨 거고, 내막만 잘 감추면 어찌하지 못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진실을 추락시킨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기로 했으니까.

“…내가 안일했어.”

이한결이 이한결이 아니다. 
그러나 차성그룹 그 누구도, 그게 도무결이라고 해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는 입술을 세게 씹었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 * *






도무결은 이한결에게 꽤 공들였다. 그가 어떤 흔적이라도 흘리리란 기대감으로 붙어다녔다.
정체를 알아챌 만한 힌트는 없었지만 즐거웠다. 
옆자리에 자신의 가방을 둘 때마다 미세하게 올라가는 눈꼬리. 툭, 팔꿈치를 치면 떨리는 입가. 그런 모양을 지켜보는 일은 묘한 충족감을 줬다. 말을 걸면 단아한 목소리가 짧게 흘러나왔다.
경계를 세우면서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은 다 했다.
이한결이 아닌 이한결은, 이한결처럼, 다정한 사람이었다. 닮은 부분이 있었다.

다시 돌아온 설득의 미학 수업.
도무결은 오늘 특별히 배포된 유인물을 정리했다. 어김없이 옆자리에 앉은 한결을 바라보니, 그는 이제는 함께 앉는 게 익숙해진 듯, 타박도 하지 않았다. 태수라든가. 그런 애들이 ‘저 새끼 또 저러네.’라는 식의 말을 뱉긴 했지만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뭘 그렇게 봐.”

그런데 한결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유난히 날을 세운 느낌으로 자신을 쏘아봤다. 두 사람 사이에 가방을 억지로 집어넣는 의도도 눈에 뻔히 보였다. 최대한 닿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번 주부터 명품과 짝퉁 리포트 시작해야지. 생각한 방향 있어?”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메일로 얘기하자.”
“메일?”
“내 메일 주소 문자로 보낼게. 아니면 네가 보내든지.”

도무결은 이거 봐라, 싶었다.

“만나서 하는 게 빠를 텐데, 생각보다 비효율적인 분이셨네. 이한결 씨.”
“만날 시간 없어.”

한결이 재빨리 응수하며 기다란 속눈썹이 차갑게 깜빡였다.

“왜?”
“바쁘니까. 각자 생각한 방향대로 자료조사해서 합본 만들어서 각자 훑어보고 각자 결론 도출해서 다시 합본하자. 합본은 내가 할게. 이번 주말까지 각자 자료조사 부분 메일 보내.”

숨은 쉬긴 한 건지, 다다다 쏟아내더니 벌떡 일어났다. 미묘하게 각.자. 부분에만 강세가 들어간 것 착각이 아니라고 도무결은 결론내렸다. 한결은 말하는 동안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도무결은 돌아서려는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합본은 내가 더 잘하는데.”
“그래. 그럼 네가 해. 네 메일 주소 알려주면 거기로 보낼게.”

좀 더 아웅다웅하는 재미를 느껴볼 생각이었는데 어째 흘러나온 대답이 순순했다. 물론 한결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반대로 무척 싸늘했지만.

“너 내가 무섭구나.”
“니가 뭐가 무서워?”
“들킬까봐.”

한결은 잡힌 팔목을 슬며시 빼냈다. 그도 더 이상 힘줘 잡지 않았다.

“글쎄….”

썰물처럼 학생들이 빠져나간 강의실 안은 조용했다. 덩그라니 둘만 남은 곳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들킬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또 그와 마주칠 뻔한 시선을 집어넣었다. 분명 고의적인 회피였다.

“이름.”

불쑥. 그조차 예상 못한 단어가 입을 열었다. 

“나이.”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눌러썼던 후드 속 머리카락을 올렸다. 훤한 이마가 드러났다. 

“사는 곳.”

매끈한 콧대와 얼굴 전체의 윤곽이 한결의 동공에 박혔다.

“가족.”

한여름의 맹렬한 햇볕에 두 눈을 뜰 수조차 없을 때, 한결은 유난히 심장이 두근거리곤 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랬다.
실내였는데. 형광등 불빛만 반짝이는데. 한 박자 늦게 돌아오는 숨을 내쉬었다.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온몸의 근육이 쪼그라들었다. 도무결은 뒷걸음질 치는 한결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들킬 게 이렇게 많은데 무슨 소리지.”

큰 손을 들어 어깨를 푹하고 짚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압박감에 한결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굳은 몸을 삐걱 움직여 도무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꺼주면 고맙겠어.”

겨우 한 마디 내뱉고 돌아섰다. 

강의실 밖으로 발을 디딘 한결에게, 도무결이 집요한 한 마디를 보태며 따라왔다.

“우리 다음 수업도 같이 들을 텐데.”

아직 멀었어, 너.






* * *





이한결의 냉대는 계속됐다. 이틀 정도가 흐르자 리포트 주제를 꺼냈을 때를 제외하고는 웬만한 말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개무시를 하겠다?”
“…….”

그 단아한 목소리가 자취를 감춘 것도 모자라 눈을 맞출 일도 없었다. 한결이 아예 자신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한결이도 참다 참다가 터진거지.”
“쟤가 갑자기 친한 척 했잖아. 이상했어.”
“한결이가 착해서 그동안 참은거지.”

그런 말들도 돌았다. 하등 신경쓸 바 아니었다. 
다행인 건 그나마 수업은 출석했기 때문에 눈앞에 둘 수 있단 점이었다.

시야에 이한결이 들어올 때마다 도무결은 불쾌감에 뱃속이 자글자글 끓어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방긋 잘도 웃어보였다.

왜. 나에게만.

두 단어가 머리를 조였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이한결의 시간표를 확인했다. 오전 공통 수업은 끝났고 자신은 오후가 비어 있었지만, 이한결은 5, 6교시 연강이 남아 있었다.
6교시 이후에는 도서관에 가려나 집에 가려나. 우연을 가장해 다시 한 번 마주치면 맑은 눈으로 저를 봐줄까.

그는 교양관 앞 등나무 벤치에 앉았다. 두 시간 내리 이한결을 기다릴 심산이었다. 책을 펴들었다. 중간고사가 코앞이었다.
종종 벚꽃잎 몇 개가 책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해가 기울었다. 그즈음, 도무결은 고개를 들어 교양관 정문을 주시했다. 

그리고 아.

빳빳한 폴로 셔츠에 단정한 면바지를 입은 이한결. 그가 살포시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도무결이 본 그는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 걸 좋아했다. 소란스럽지는 않지만 항상 눈으로 주위 풍경을 좇는 것도 좋아했다.

벚꽃잎이 부드럽게 그와 어울려 공중을 부유했다. 수수한 차림인데도 멀리서도 눈에 띄는 유려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디서 본 적 있는 풍경 같은데. 
기시감을 접으며 도무결은 성큼, 그를 따라갔다.

의아해진 것은 이한결이 오피스텔로 갔을 때였다. ‘이대로 집에 갈 리가 없는데, 도서관으로 다시 가려나?’ 하고 위를 올려다봤다. 몇 층에 사는지 몰랐지만, 해가 져가는 중에 불이 켜진 층은 없었다.
잠시 후, 전혀 다른 차림의 이한결이 나왔다. 죄다 후줄근한 옷에 늘 하던 고가의 시계도 없이 손목이 휑했다. 그래도 봐줄 만했다. 

그는 빠른 발걸음으로 지하철을 탔다. 도무결은 그를 따라 홀린 듯, 가장 마지막 순서로 열차에 탑승했다.
도무결은 괜히 모자를 한 번 더 눌러썼다. 옆 칸에 선 이한결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부드러운 목덜미가 언뜻언뜻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지하철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시선은 이름도 모르는 남자애에게 고정한 채.

네가 누구든, 그게 어디든 끝까지 따라가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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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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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마트 물류 아르바이트는 본래 주말만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에는 금요일 저녁에도 일해줄 수 없겠냐는 부탁을 받았다. 중간고사 공부 시간이 빠듯해서 고민하던 한결은, 시급을 오백원 더 쳐주겠다는 말에 수락했다.
천원도 아니고 오백원. 

땅에 떨어진 동전 하나도 아쉬운 처지.

오백원이면 한나나 마이쮸 하나는 사줄 수 있을까. 저만 보면 날뛰듯 달려오는 여동생을 마음에 담으며, 그는 마트 창고 한구석에서 환복했다.

보풀이 심하게 일어난 검은색 반팔티에 낡은 마트 조끼를 걸쳤다. 바지는 고등학교 체육복 바지를 대충 입고 고무줄을 조였다. 알바는 한겨울에도 반팔을 입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주말마다 쌓아온 노하우였다. 땀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인데도 일이 끝나면 온몸이 푹 절었기 때문이다.

“이틀 전에 장씨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 고마워.”
“네. 괜찮아요. 저야 하루 더 일하고 좋죠.”

마트 사장이 인사차 한 번 창고에 들렀다. 그는 마트 정규직인 장씨 아저씨-정확한 이름은 몰랐다-가 빠졌구나 그러려니 했다.

한나나가 집에서 혼자 외롭게 기다릴 것이다. 짐을 빨리 정리할수록 빨리 퇴근할 수 있었으므로 그는 서둘렀다.

마스크와 목장갑을 끼고 어깨를 휘휘 휘둘렀다. 일을 시작하기 전, 그만의 작은 준비운동이었다.

턱. 턱.

창고 안의 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스크 밖으로 대롱대롱 매달리는 땀방울이 늘었다.

끼이익.

마트 창고 문을 활짝 열었다. 봄의 찬 기운이 창고에 들어와 시원했다. 그는 젖은 마스크를 벗고 정수기에서 물을 한 잔 떠왔다.

벨소리가 울렸다.

[ 내동생♥︎ ]

“어. 나나야. 오빠 지금 알바 중이야.”
『주말만 한다더니?』
“이번 주만 금요일도 하기로 했어.”
『오늘 언제 끝나?』

한나나의 목소리가 처량했다. 혹여 그 옛날의 저처럼 갈 곳 없어 떠돌고 있을까 봐.

“아마 10시는 넘어야 끝날 거야.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그래?”
『그것도 그렇지만 그냥… 사실은 벌써 9시 넘었는데 저녁을 못 먹었어.』
“왜 못 먹었어…. 돈 보내 줄까? 오빠한테 말하지.”
『아니. 그게 아니고 혼자 먹기 싫어서.』

애들은 전부 금요일 저녁은 패밀리 데이라고 집에 갔어. 자신이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니라고, 한나나는 덧붙였다.

집에 들어가기 싫고.
혼자 먹기 싫고.

그는 목장갑이 뒤틀리는 줄도 모르고 꽈악 아귀 힘을 주었다.

“나나야. 마트로 와…”

부모는 가난을 이고 지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머리가 크면서부터 가난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들이 생겼다.
삶이 너무 무거워서, 먹고 살기 바빠서로 합리화되는 무기력. 무관심. 무능.

나 혼자도 힘든데 니들까지 따라다니면서 어떻게 뒤치다꺼리를 하겠니.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그는 자신과 한나나가 받은 애정이라곤 조금 독특한 이름 하나뿐이라고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제 이름이 싫었다.
한나나는 독특하다며 좋아했지만 자신은 질색했다. 중고등학교 때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면 두근대던 가슴이 진정됐다.

“…오빠 알바 끝나면 같이 치킨 먹자.”
『진짜? 좋아! 나 지금 독서실이라서 금방 갈 거야.』

한나나는 신이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는 마트 창고 밖으로 나가 롤테이너들이 모여있는 한쪽 구석에 자리잡았다. 작은 구루마 중 하나를 가져와 박스로 페달을 억지로 고정시키고 그 위에 앉았다.

쭈그려서 십여 분간 물을 술처럼 홀짝이기.
이 또한 알바의 루틴 중 하나였다. 그는 자연스레 마트에서 쏟아지는 빛공해를 등지고 어둠을 바라봤다. 가끔 정체 모를 것들이 하늘을 떠돌기도 했다. 꽃잎이나 나뭇잎이나 눈이나.

무심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눈 대신 봄밤의 차가운 공기만 한 줌 잡혔다 흩어졌다. 
어느 겨울에 눈을 잡으려 애썼던 풍경이 천천히 펼쳐졌다.

눈이 엄청 많이 왔던 날이었는데.

마침 주머니에 있는 초콜릿을 만지작 거렸던 손가락. 그래도 내가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고 생각하며, 눈을 바라봤던 길고 긴 시간. 그때 한창 사춘기라 그랬지.
깊게 두 눈을 내리깔자, 그 밤이 미지의 세계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일어났다.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 * *





한나나는 창고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앞뒤로 까딱거렸다. 영락없는 사춘기 중학생다운 모습이었다.

“오빠. 오빠. 오빠.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응. 나나야.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과 기다려 사이에 끙차, 기합을 넣으며 그는 서둘렀다. 이것이 마지막 물류 파트였다.

“이게 마지막이라서 이것만 하고 사장님 뵙고 올게.”
“응! 착한 나나는 여기서 얌전히 있을게.”

마침 사장님이 창고 밖으로 나온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트 뒷문에서 두 사람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 주말에는 물류가 좀 적으니 일요일은 안 나와도 된다고 했다. 추가로 오백 원이 더 붙은 오늘치 시급은 따로 현금으로 봉투에 넣어서 주었다. 마트 사장님은 월급은 계좌로, 추가 알바를 뛰는 일급은 따로 현금으로 주곤 했다.

뒷정리까지 꼼꼼히 마친 뒤, 그는 옷을 덥석 벗어 던졌다. 몸에서 땀내가 나는 것 같아 당장 씻고 싶었지만 한나나의 허기가 더 중요했다. 급한 대로 마트 화장실에서 소매를 걷어 올려 팔목과 목, 얼굴까지만 비누칠을 했다.

“오빠 그러다 감기 걸린다.”

앞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대충 털어대자 한나나가 타박했다.

“나나야. 오빠는 튼튼해서 그럴 일이 없단다.”
“튼튼하긴? 맨날 새 모이만큼 먹으면서.”

샐쭉하게 눈을 흘긴 한나나가 앞장섰다. 누구 하나 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집 가는 길 사거리, 가장 마지막 편의점 건너편 상가의 치킨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프랜차이즈가 아니라 동네 치킨을 팔아서 가성비가 좋았다.

“오빠를 보면 알겠다니까. 마른 애들은 마른 이유가 다 있어.”
“안 말랐어. 근육도 있다니까.”
“나도 오빠처럼 마르고 싶다. 우씨… 다이어트해야 되는데 치킨 먹네.”

자신의 동생이라서가 아니라, 한나나는 딱 보기 좋은 체격에 말랑말랑한 중학생이었다. 그는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는데 대체 다이어트를 왜 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이 시간에 치킨은 먹겠다는 모양이 귀여웠다.
오물오물대는 입술을 바라보며 그는 환히 웃었다.

“한나나야. 무슨 다이어트야. 지금도 예뻐.”
“아니… 오빠 눈에 그렇지.”

그는 한나나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헝클어뜨렸다. 내친김에 어깨도 감싸 꼭 안아주었다.

“아냐. 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래.”
“나는 많이 먹지도 않는데 살은 왜 찌는 걸까.”
“안 쪘다니까. 지금 딱 보기 좋아.”

길 한가운데서 찹쌀떡 같은 두 볼을 늘렸다 줄였다 해대니 한나나가 눈을 굴렀다. 싫지는 않은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남매는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었다.

“후라이드 반 양념 반 콜?”
“콜.”
“콜라는 무조건 제로로 할 거야. 다이어트해야 돼.”
“그래그래. 닭똥집도 먹을래?”
“응! 완전!”

치킨집에 가까워질수록 한나나가 폴짝폴짝 뛰는 횟수가 늘었다. 폴짝. 폴짝. 치킨집은 봄이 다가와서인지 상가 1층에 야외 파라솔을 깔아놓았다. 
그는 한 잔 걸치고 있는 아저씨 무리에서 가장 먼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나나는 주문을 하러 쪼르륵 치킨집 안에 들어갔다. 

멍하니 앉아 기본으로 나오는 물과 컵, 기본 안주를 바라봤다. 무념무상, 고리 뻥튀기에 손이 갔을 때 앞자리에 누가 턱하고 가방을 올렸다.

“벌써 주문했어? 계산은 이따가 오빠가…”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너무 낯선 얼굴이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그는 익숙한 풍경 속 이질적인 존재가 부조화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평소와 달리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던진 낯선 이는 테이블에 두 손을 짚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치킨집 간판의 희미한 불빛에도 얼굴 한쪽 면이 뚜렷이 살아났다. 

“네가 왜 여기…”

명료한 눈매가 그를 샅샅이 훑었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낯선 이가 입술을 부드럽게 뗐다.

"찾았네.”

도무결. 그가 웃으며 기어코 불렀다.

"이한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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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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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이 미친듯이 떨렸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아니 그보다 여기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삐하는 이명만이 고막에 울렸다. 도무결은 큰 손을 들어 한재음의 반쯤 마른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렸다.

“들켰네. 어쩔 거야?”
“…….”

입술이 옴짝달싹 하며 말을 찾았으나 길을 잃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테이블 아래로 맞잡았다. 도무결의 뚜렷한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이어진 정적을 깬 건 한나나의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였다.

“오빠! 닭똥집 먼저 주셨어. 근데 여긴…”

한재음은 할 수만 있다면 한나나와 함께 푹 하고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당장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누구세요?”

한나나는 태연히 한재음 옆자리에 앉으며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닭똥집을 손으로 주워 먹었다. 그리고는 맑은 눈을 반짝여 도무결을 바라봤다.

“나나야. 이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지. 

친구는 절대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뭐한 사이였다. 학교라는 단어를 꺼낼 수도 없었다. 그저 도무결은 도무결인데.
곤란에 처한 그를 도무결의 짧은 대답이 구해줬다.

“나 이한재음 친구.”
“이번에 오빠 일 나가는 데서 만났어요?”

일 나가는 데. 

한재음은 그 말에 도무결을 흘깃했다. 도무결은 건수 하나 잡은 듯한 시선으로 끈적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재음은 최대한 그 집요한 눈빛을 피했고, 도무결은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띄웠다.

“응. 그렇지.”
“아니… 우리 오빠 친구 별로 없는데 웬일이지!”
“그래?”

예상 외로 시종일관 동생에게 웃는 낯을 보이는 도무결이, 한재음은 낯설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여유와 다정이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서 더 돋보였다.
익숙한 풍경 속에 낯선 사람. 시선을 둘 자리를 찾지 못한 한재음은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온 감각이 도무결 쪽을 향했다.

“오빠가 새로 친구도 데리고 오고 너무 좋다!”

한나나가 기름기가 묻은 손을 휴지에 버벅 닦더니 살짝 박수를 쳤다.

“끼리끼리라더니. 오빠도 인기 많겠어요!”
“난 별로 없고 너희 오빠만 인기 많아.”
“그래요? 우리 오빠랑은 그림체가 좀 달라서 그런가.”

한나나의 해맑음을 자연스럽게 넘기며 도무결이 웃었다. 제 눈에 어여쁜 동생이 도무결의 눈에도 어여뻐 보이는가 보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행이어서 어쩔건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데.’ 혼란스러웠다.

“좀 다르지. 한재음 동생이면 너도 이름이 네 글자야?”
“네. 이한나나예요. 오빠는 이름이 뭐예요?”

도무결. 
간결히 대답한 그는 어느새 치킨집 아저씨에게 말해 병맥주도 받아 한 잔씩 따랐다. 
콸콸콸 딱 보기 좋을 만큼 쌓인 거품을 들이켰다. 도무결은 한나나와 사이 좋게 말을 주고 받았다. 곧 치킨이 나왔을 때는 너무 뜨거워서 손 못 대는 한나나를 위해 찢어주려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멍하니 도무결을 보던 한재음은 황급히 옆자리의 한나나에게 몸을 돌렸다.

“내가 해줄 거야.”

한재음은 치킨을 나눠주려는 도무결의 손을 밀어냈다. 탁하고 쳐낸 건 저인데, 닿고 나서 일순간 움찔했다. 그래도 한나나에게 잘해주려던 건데 너무 박정했나 싶어, 입안이 메말랐다.

도무결은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당황 그 자체로 굳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주제에 날을 세우는 한재음이 기가 찼다.

“그래도 오빠라고 우리 나나를 엄청 챙기네.”
“우리 나나? 누가 우리 나나야.”

한재음은 비뚜름히 웃는 도무결을 쳐다도 보지 않고 한나나를 살피는 데 집중했다.
이름까지 들켰는데 이러다 새카만 제 밑바닥까지 모조리 들키면 어쩌지.
사방 경계를 펼쳤다. 한나나 앞에 양념 소스와 소금을 놓아주거나 얼음잔을 져다가 제로 콜라를 따라주거나 하면서도, 벼린 날은 접지 않았다.

“왜! 난 무결 오빠가 우리 나나라고 해주니까 좋은데.”
“나나야. 도무결은 그냥 잠깐 온 거고…”
“아니… 별 뜻은 없고. 오빠가 둘인 느낌?!”
“오빠 하나면 됐지. 얼른 먹기나 해.”

입안 한가득 우물우물 치킨을 밀어넣던 한나나가 씨익 웃었다. 

“오빠는 순정만화 그림체고 무결 오빠는 느와르만화 그림체야.”
“별 소리를 다 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는 요새 하고 있어?”
“아, 중간고사 좀 있으면…”

한재음이 도무결을 계속 입에 올리는 게 싫은 티를 내며 공부로 화제를 돌렸다. 한나나는 잠자코 쉬지도 않고 입을 움직였다. 먹으랴 말하랴 바쁜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한재음을 보며, 도무결은 신경질이 났다. 

그러니까, 저런 눈을 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는 늘 발끝을 세우고 삐죽삐죽 경계심을 찔렀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주고 고분고분하기도 하고 맑게 웃기도 하는.
한재음이 가장 좋아하는 건 한나나구나. 도무결은 입맛을 짧게 다셨다.

그가 ‘이한재음’을 처음 찾은 건, 마트 뒷문 쪽에서였다.

“30분 더 일찍 와줬네!”

택시를 잡아 마을 버스를 뒤쫓으며 도착한 곳은 어느 마트였다. 어디까지 쫓아가야 하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비로소 도착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목격했다. 

“한재음 학생. 오늘 그래도 많지는 않아.”

한재음.

아주 오랜만에, 도무결은 크게 미소지었다. 한재음. 한재음이라고. 재음이라고 이제 부르면 될까.
드디어 알게 된 그 이름을, 도무결은 입속으로 한 번 더 굴렸다. 그러자 천천히 기시감이 스며들었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머리는 곧 말끔해졌다. 한재음이 낡은 마트 조끼를 걸치고 나왔기 때문이다.

도무결은 어렵지 않게, 이한재음, 네 글자가 박힌 노란 명찰을 떠올렸다. 서랍 한 구석의 초콜릿과 함께. 그때는 눈이 왔었지. 아주 많이.

그 애.
도무결은 오래 전 어느 겨울에 보았던 그 애.

낡은 마트 알바 조끼, 붉었던 눈가, 유난히 큰 마스크에도 가려지지 않던 불행, 가로등 밑에 흩날리던 무거운 눈발.

‘…네가 나랑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서.’

아직도 먹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둔 싸구려 초콜릿까지.

그리고 비로소 확신했다.

저 애는 절대 이한결일 수가 없다.
저 애는 반드시 이한재음이다.

그래서 납득했다. 도서관에서 본 순간, 왜 눈을 뗄 수 없었는지. 왜 네 미소를, 네 눈물을 좇을 수 밖에 없었는지.

마트 후문 담벼락에 기대서 알바가 끝나길 꼬박 세 시간 반을 기다렸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드디어 알게 된 그 이름.
서랍 한 구석의 초콜릿처럼 머리 한 곳에 단정히 놓여있던 그 이름.
내가 그 이름을 부르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것만 생각했다. 골려주는 재미가 엄청나겠지. 

이름을 불렀을 때, 예상보다 한재음의 반응은 재밌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한재음은 금세 평정을 찾고 이전보다 더 날을 세웠다.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기로 한 걸, 잊지 않았나 보다.

한재음이 한나나의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줬다. 얇은 손가락이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오빠 그만해. 무결 오빠가 막 보잖아.”
“보면 어때.”
“그냥… 한심해 보일까봐. 무결 오빠, 제가 너무 묻히고 먹어서 그래요?”
“아니. 귀여워. 오빠 닮아서.”

한나나가 땡그란 눈을 들어 한재음을 바라보며 우리가 닮았어? 속닥였다. 곤란한 표정의 한재음이 치킨을 마저 그녀의 입에 넣어주었다.

제 오빠를 꼭 닮은 입술로 조잘대는 한나나처럼 한재음도 저렇게 말할 날이 올까, 도무결은 생각 끝에 다시 짜증이 솟구쳤다. 

한 대 쥐어박아 던져버리고 싶기도, 동시에 손 안에 쥐고 흔들고 싶기도 한 기분이었다. 어느 쪽에 서야할까.

도무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의 시선이 동생의 입가를 여전히 닦아주는, 한재음의 부드러운 손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 앞. 세 개의 긴 그림자가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기댔다.

“나나야. 먼저 올라가.”
“왜?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무결 오빠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

한나나의 돌직구에 도무결도, 한재음도 당황한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자고 가긴. 우리 집에서 어떻게 자고 가.”
“왜? 전에 그 한겨…”

한결, 이라는 말이 나올까봐 무서워 한재음은 황급히 동생의 입을 막았다.

“나나야. 먼저 올라가.”
“그럼 아쉽지만 이만. 무결 오빠 담에 또 봐요!”

꾸벅 인사한 한나나는 못내 아쉬운 듯 몇 번 뒤를 돌아봤다. 다정히 손을 흔들던 한재음은 그 어떤 말도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되어서야 태도를 뒤집었다.

또다. 도무결에게만 유독 벼려진 칼날이 새파랗다.

“미행했어?”

담벼락에 저보다 더 큰 도무결을 밀며 한재음이 쏘아붙였다.

“했다면?”
“차성그룹 도무결 도련님.”
“…아하…”
“시간이 남아 도시나 봅니다?”

도무결은 물끄러미 한재음을 바라봤다. 가로등 불빛이 얼굴 곳곳에 내려앉아 긴 속눈썹에 그림자가 생겼다. 눈을 몇 번 깜빡이지도 않고 자신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차성그룹 사람인 거 어떻게 알았어?”
“그게 중요할까?”
“하긴 중요하지 않지. 그러는 이한재음은…”
“…….”

본명을 부르자 한재음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남아 도나봐? 다른 집 도련님 행세를 다 하고?”
“네가 알 바 아니야.”
“이한결이 내 사촌인 거 몰라?”
“…….”
“내 알 바 같은데.”

담벼락에 붙었던 등을 떼자 한재음이 코앞까지 가까워졌다. 한재음의 이마가 시야 아래에 온전히 들어오고, 입가 끝에 그의 미간이 슬쩍 닿았다. 
화들짝.
닿자마자 한재음이 한 발 물러섰다. 누가 역병이라도 옮기는 줄 아는지, 도무결은 혀로 입 안쪽을 한 번 굴렸다.

“그래서 어쩌자고?”
“뭐 어쩌…”

그의 뒷말을 한재음이 잘라먹었다.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게? 내 봐. 떠들어 봐.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네가 차성그룹 도무결이라고 나도 떠들 거야.”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반항이었다.

“난 적어도 가짜 행세하는 게 아니라서 상관없는데. 손해볼 것도 없고.”
“가짜 행세는 아니더라도 다 가리고 다닐 정도로 숨기고 싶어한다는 건 알겠던데.”

도무결의 눈썹 한쪽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한재음이 손가락 하나를 뻗어 자신의 가슴께를 찌르고 있었다. 한나나의 입가를 닦아주던 그 손가락이 다시 한 번 더, 가차없이 도무결을 쿡 찔렀다.

“내가 누군지 알았다고 해서 함부로 휘두르려고 하지 마.”
“이한재음. 가짜 주제에 너 지금…”
“그래. 나 가짜야. 그래서 어쩌라고. 폭로하던가.”
“…….”

쿡. 한 번 더 손가락으로 찌르니 도무결의 눈빛에도 열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한재음의 이 정도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오늘 본 건 잊어.”

한 발자국, 크게 도무결이 다가가자 씨근덕대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한재음을?”
“…….”
“안 돼. 내가 어떻게 알아낸 이름인데.”

한재음은 지지 않고 눈을 더 부릅떴다. 밭은 숨결이 그의 눈썹에 부딪혔다.

“그건 잊든 말든 네가 알아서 하고.”
“…….”

한재음의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께를 떠났다. 맹렬한 눈빛으로 도무결을 잘라먹듯 한재음이 내뱉었다.

“내 동생은 절대 끌어들이지 마.”

막다른 골목에 든 쥐는 고양이도 문다고 했다던가. 도무결의 눈에 뒤늦은 이해감이 스쳤다.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한재음은 쌩하니 계단으로 갔다. 그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꾹꾹 계단을 올랐다. 그 뒷모습이 마지막 계단을 딛을 때까지 도무결은 턱을 치들고 있었다.
마침내 한재음이 아주 좁은 골목 코너를 돌자, 도무결의 주먹이 순간적으로 뻗어나갔다.

퍼억.

딱딱한 시멘트 벽에 손등이 까지고 얇은 피가 맺혔다. 입술도 너무 세게 깨물었는지 쓰린 감각이 묻어났다.

원하는 걸 알았는데 왜 이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