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씨앗 밤 열한 시의 을지로 골목은 간판 불빛조차 겁을 먹은 것처럼 깜박이고 있었다. 윤산은 건물 모퉁이에 등을 붙인 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야 전체를 흐르는 정보들 사이에서 그가 집중하는 건 오직 하나, 골목 안쪽에서 타닥타닥 뒤엉키는 파동의 형태였다. 총 세명. 능력자를 사냥하는 정부 직속 기구 D.A.B(데이터 감사국) 요원들이 삼각 대형을 유지하며 골목을 조여들어 왔다. 중간에 몰린 여자는 등을 벽에 붙인 채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손바닥 위에서 뭔가가 흔들렸다. 빛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고, 불꽃이라고 하기엔 형태가 없는 것. 그것은 이 시대의 잔혹한 축복이자 저주인 '능력의 씨앗'이었다. 그 능력의 씨앗이 여자의 공포와 맞물려 제멋대로 진동하고 있었다. 미숙한 능력자였다. 자기가 뭘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오라클의 감지망에 걸린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던 윤산은 코트 단추를 하나 잠그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요원 중 하나가 돌아봤다. 불빛이 희미한 골목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건 큰 키였다. 그리고 코트 깃 사이로 드러난 창백한 목선, 흑발 아래로 내려앉은 서늘한 눈매. 남자치고 속눈썹이 길었다. 요원의 눈이 잠시 그에게 머무른 건 위협을 감지해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인상이 뚜렷한 사람을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윤산은 가슴 주머니에서 AD테크 사원증을 꺼내 들었다. "데이터 감사국 협력 기업 AD테크 소속입니다. 이 구역 서버 점검 중에 위치 오류가 생겨서요.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는 평온했다. 아주 당연한 상황에 아주 당연하게 말을 거는 사람의 톤이었다. 요원들의 시선이 사원증과 윤산 사이를 오갔다. 그 찰나, 윤산의 손끝에 서리가 끼며 눈이 아주 잠깐 여자 쪽을 향했다. [로그 오버라이트] 동시에 골목 안쪽 서버 박스 외벽에 달린 낡은 광고 패널 위로 데이터 층 하나가 조용히 덧입혀졌다. 여자의 손바닥 위에서 흔들리던 파동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일반인의 손. 요원 중 선임으로 보이는 사내가 윤산을 거칠게 밀치듯 지나쳐 여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여자의 관자놀이에 차가운 금속제 스캐너를 들이밀었다. 여자는 숨도 쉬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삑. 짧은 기계음과 함께 스캐너 화면 위로 초록색 [NORMAL] 문구가 깜박였다. 요원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스캐너를 한두 번 흔들더니 골목 구석구석으로 렌즈를 다시 들이밀었다. 방금까지 오라클 감지망을 찢을 듯 울려대던 신호가 허망할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쳇, 기계가 맛이 갔나." 그는 거칠게 스캐너 전원을 눌러 끄며 뒤에 서 있던 윤산을 향해 턱짓했다. "이동하십시오. 협력 업체 직원이 보안 구역에서 기웃거리는 거, 딱 질색이니까." 윤산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여자가 벽에서 등을 뗐다. 다리가 풀렸는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윤산은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아 조용히 말했다. "능력이 발현됐을 때 혼자 다니면 안 됩니다. 연락처 드릴게요." 골목을 나오는 윤산의 발걸음은 조용했다. 그러나 능력을 쓴 대가는 자비가 없었다.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혈관을 따라 심장까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산은 하얗게 질린 손등을 감추려 외투 깊숙이 손을 찔러 넣었다. 지하철역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주머니 속의 손끝은 이미 감각이 없었다. * AD테크 본사 건물은 아침마다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로비를 지나치며 윤산은 뉴럴 스캐너 부스에 한 줄로 늘어선 직원들을 보았다. 보안 요원들이 직원을 한 명씩 통과시키며 기기를 관자놀이에 가져다 댔다. 렌즈 속 푸른 빛이 망막과 뇌파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겨진 '씨앗'을 찾아내려는 오라클의 감시망이 낮게 웅웅거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직원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당연한 듯 줄을 섰다. 불만인 사람도 없었다. 아침마다 사원증을 찍듯 그냥 하는 일이었다. "다음." 윤산이 부스를 통과했다. 차가운 금속이 관자놀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신호음 하나. "이상 없음. 통과하세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뒤를 봤다. 뒤에 선 직원이 스캐너에 관자놀이를 들이밀며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고 무미건조한 얼굴. 저게 뭘 읽는 기계인지 아는 사람은 이 건물 안에 몇 명이나 될까. 스캐너의 판정 한 번에 사원증 대신 실험체 번호를 부여받고, 이 도시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윤산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이미 눈을 열고 있었다. 능력은 쓰는 게 아니라 켜는 것에 가까웠다. 시야 위에 얇은 막이 하나 더 올라오는 감각. 그 막을 통해 사람들의 흉골 아래쪽 어딘가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들이 보였다. 씨앗이라고 부르는 건 딱히 공식 용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제일 가까운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모양도 색도 달랐다. 개화하지 않은 것들은 작고 희미했고, 이미 발현된 능력자들의 것은 윤곽이 뚜렷했다. 오늘 출근길엔 두 명의 씨앗을 스쳐 지나쳤다. 하나는 거의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었고, 하나는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같은 층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한 번 더 훑었다. 습관처럼. 거기서 멈췄다. 사무실 안쪽, 창가에서 두 번째 자리. 문서를 펼쳐놓고 모니터를 보고 있는 남자. 두 달 전부터 이 자리에 앉아있는 원시인이라는 이름의 사원이었다. 씨앗이 있었다. 아주 작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작았고 지금도 작았다. 손톱 크기만 한 게 흉골 아래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움직임도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 정도면 평생 개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윤산은 시선을 거두고 자리로 향했다. 오후에 신입이 들어온다는 공지는 아침 조회에서 이미 나왔었다. 딱 거기까지만 나왔다. 신입사원. 이름 하나. 강한결. 오후 두 시에 그가 들어왔다. 사무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몇몇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쏠렸다. 들어온 남자는 키가 아주 컸다. 형광등 아래서도 애쉬빛이 도는 머리카락, 윤곽이 또렷한 미인형의 얼굴, 어딘가 아이돌 화보에서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인상을 줬다.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 처음 보는 사람도 기분 좋게 만드는 종류의 웃음이었다. 하지만 윤산은 그 웃음 뒤로 흐르는 눈빛이 그것과는 전혀 다른 온도라는 걸 한 번에 알아챘다. 윤산은 자연스레 시야 막을 올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씨앗이 없는 게 아니었다. 씨앗이 보이지 않는 것. 미묘한 차이였다. 지금 이 남자는 뭔가가 있는데 읽히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방화벽처럼. 공백이 아니라 가림막이었다. 윤산은 한 번 더 눈을 좁혔다.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피하지 않았다. 당황하거나 시선을 내리깔지도 않았다. 그냥 봤다. 그리고 웃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이었다. 윤산은 모니터로 시선을 내렸다. 불쾌했다. 읽으려는 걸 저쪽이 이미 알고 있는것 같은 느낌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 웃음 뒤에 가려진 열기가 아주 잠깐, 자신의 차가운 피부에 닿은 것 같았다. 서버실 쪽에서 이상이 감지된 건 퇴근 삼십 분 전이었다. 시야 막을 펼치고 있던 윤산의 망막 위로 뭔가가 터지는 감각이 먼저 왔다. 손톱 크기로 납작하게 가라앉아 있던 그것이 갑자기 반경을 넓히며 불규칙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위치는 지하 서버실 방향. 원시인. 윤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두 칸씩 밟으면서 이미 로그 오버라이트를 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버실 문을 열었을 때 안에서 나온 것은 열기도, 연기도 아니었다. 공간이 뒤틀리는 감각. 마치 영상이 잘린것 처럼, 선반 위 서류 더미가 제자리에 있는데 없는 것처럼 보였다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돌아왔다. 공간이 끊기는 느낌. 원시인은 바닥에 한쪽 무릎을 짚고 있었다. 손이 바닥을 잡고 있었는데 그 아래 타일이 계속 깜박였다. "원시인 씨." 대답이 없었다. 눈은 떠있는데 초점이 맞지 않았다. 윤산은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시선을 맞췄다.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쌍꺼풀 없는 눈이 생각보다 아주 컸다. 동공이 초점을 잃은 채로도 맑은 편이었는데, 지금은 공포로만 가득 차 있었다. 시인의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식은땀이 흘렀다. "저를 보세요." 낮고 또렷하게 말했다. "지금 능력이 발현됐습니다. 제어가 안 되는 상태에서 쓰면 죽습니다." 원시인이 눈을 깜박였다. 초점이 조금 돌아왔다. "죽어요?" "네." "...퇴근은요?" 윤산은 잠깐 말을 잃었다. "아, 아니요. 죄송합니다. 그냥 자동으로." 원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허둥지둥 손을 바닥에 짚었다. "일단 여기선 이동해야 합니다." 지하에서 올라온 직후였다. ​[경고: 중앙 데이터 감사국(D.A.B)의 강제 검역 권한이 승인되었습니다.] ​천장의 백색 조명이 일제히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사원들의 모니터에 붉은색 [경고] 태그를 박아 넣었다. 사무실의 육중한 강화유리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남자, 이 도시의 능력자들에겐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인물. D.A.B 수사팀장 고진혁의 존재감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압박이었다. 윤산은 원시인을 자리에 앉혔다. 주변 사원들이 술렁이는 사이 윤산은 이미 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서버실에서 터진 능력의 흔적을, 원시인의 신경망 주변에 쌓인 잔상을 지저분한 일반 데이터로 덮는 작업이었다. 능력의 정교함이 올라갈수록, 대가는 더욱 가혹하게 찾아왔다. 윤산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끝에 하얀 서리가 맺혔고, 입가에서는 겨울 산 정상에서나 볼 법한 차가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고진혁이 사무실 전체를 훑으면서 천천히 들어왔다. 그의 파동이 공간을 눌렀다. 사원들의 단말기가 일제히 오프라인 신호로 전환됐다. 요원들이 뉴럴 스캐너를 들고 다가왔다. 씌워야 할 잔상이 너무 넓었다. 폭발한 씨앗의 범위가 예상보다 훨씬 컸다. 체온이 더 빠르게 떨어졌다. 손끝을 넘어 손목까지 감각이 무뎌지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그 시각, 강한결은 구석에 웅크린 채 겁에 질린 신입사원을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떨리는 어깨, 창백한 얼굴. 근데 눈이 달랐다. 사무실 전체를 훑는 시선이 너무 차분했다. ​동공 안쪽에서 보라색 불꽃이 잠시 일렁이더니 한결의 손끝이 아주 잠깐 뜨거워졌다. '윤산, 대단하네. 자기 몸을 얼려가면서까지 지키는 건가?' ​윤산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분명 능력을 과하게 끌어올리고 있는데, 심장이 얼어붙는 통증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얼음물 속에 있다가 갑자기 따뜻한 온탕에 발을 담근 듯한 기묘한 감각이 밀려왔다. 누군가 등 뒤에서 뜨거운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체온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었다. 윤산은 창백해진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한결 쪽을 힐끗 보았지만, 이내 쏟아지는 스캔 압박에 다시 고개를 돌려야 했다. 한결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번졌다. 고진혁이 원시인의 앞에 서서 스캐너를 직접 집어 들었다. 삑. 관자놀이에 금속이 닿는 소리가 나고, 초록색 [NORMAL] 문구가 출력됐다. 뇌파를 스캔한 화면에 뜨는 건 단지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과 점심 메뉴에 대한 단상, 보험 광고를 보며 느끼는 짜증뿐이었다. 고진혁의 미간이 좁아졌다. "번지수가 틀렸나." 스캐너를 떼어내고 철수하는 데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무실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윤산은 손끝의 서리가 녹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상했다. 이 정도 능력을 썼으면 지금쯤 외투 안에서 손이 파래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체온이 생각보다 유지되어 있었다. 방금 전 느꼈던 그 낯선 온기는 무엇이었을까. 창가 쪽으로 시선이 갔다. 강한결은 겁에 질린 신입사원의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흔들리는 표정. 윤산은 그 앞으로 걸어갔다. "아까, 고마웠습니다." 한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뭐가요? 저 아까 구석에서 쪼그려 있었는데요." 천연덕스러운 대꾸였다.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윤산은 더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업무 복귀하시죠." 자리로 돌아오면서 자기 손등을 내려다봤다. 서리가 다 녹아 있었다. 씨앗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뭘 했는지도 몰랐다. 뭔가를 한 건 분명한데 아무것도 확인이 되지 않는다는 게, 불쾌함과는 조금 다른 감각으로 남았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면서도 그 감각이 잘 가시지 않았다. "원시인씨 퇴근 후 발산역으로 오십시오." 발산역에서 다시 두 정거장 거리의 지하철역을 지나, 오래된 상가 건물 지하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지하 2층짜리 건물 안쪽 끝, 낡은 철문 앞에서 윤산이 멈췄다. 노크 세 번. "누구야." "나야." 안쪽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가 쿵,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렸다. "야, 오늘 왜 이렇게 늦—" 주민혁이 문을 열다가 원시인을 보고 말을 멈췄다. 원시인이 문에서 나온 사람을 봤다. 짧게 다듬은 흑발, 부리부리한 눈매. 눈빛이 먼저 왔다. 체격도 컸다. 운동을 오래한 탄탄함이 느껴지는 체형에 전체적인 인상은 생각보다 밝고 따뜻한 쪽이었다. 무섭기보다 믿음직스러운 쪽. 민혁은 윤산 뒤에 서 있는 낯선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다시 윤산을 봤다. "이 사람은." "들어가면서 얘기해." 민혁이 문을 좀 더 열었다. 원시인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멈칫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지하 아지트가 아니었다. 아니, 분명히 지하 아지트인데, 홀로그램 레이어가 공간 전체를 통째로 뒤덮고 있었다. 천장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뻥 뚫린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별이었다. 은하수라고 부를 만한 밀도의 별무리가 머리 위로 느릿느릿 흘러가고 있었다. 바닥에는 희미한 우주 먼지 같은 빛 입자들이 발걸음을 따라 흩어졌다. 원시인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바닥을 내려다봤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아지트예요?" "응. 우린 다크섹터라고 불러. 마음에 들지?" 민혁이 팔짱을 끼고 흡족한 표정으로 공간을 둘러봤다. "이번 컨셉은 국제 우주 정거장이야. 저쪽 창문 봐봐, 지구가 보이지?" 가리키는 방향으로 원시인이 고개를 돌렸다. 벽 한쪽이 통창처럼 바뀌어 있었고, 그 너머로 둥글게 휘어진 지구 표면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구름 층이 실제처럼 두께가 있었다. "어때, 리얼하지? 대기권 재진입 각도까지 계산해서 넣었어." "아.....네, 정말 예쁘네요." "지난주엔 신라시대였습니다." 윤산이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신라시대요?" 원시인이 민혁을 봤다. 민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 이거 취미거든. 여기 모이는 사람들 긴장 풀라고 만들어두는 거야." "직접 만들었어요?" "당연하지. 내가 좀 해." 민혁이 뿌듯하게 가슴을 피며 말했다. 그러고는 원시인을 다시 한번 훑으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산아, 이 사람 어디서 데려온 거야. 정신이 반쯤 나가있는데." "서버실에서." "서버실?" "오늘 서버실에서 능력이 터졌어. 고진혁이 바로 왔고." 민혁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고진혁이? 직접?" "직접." "그래서 지금 상태는." "잡은 거 없어. 오늘 처음 발현된 거야." 민혁이 원시인을 다시 봤다. "이름이 뭐야." "원시인입니다." ".....원시인." "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당황스런 이름에 민혁이 잠깐 표정을 관리했다. "앉아, 일단. 커피 줄게." 원시인이 자리를 찾아 앉았다. 우주 먼지가 발밑에서 흩어지는 홀로그램 바닥을 한 번 더 내려다보더니, 그냥 앉았다. 윤산은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민혁이 커피를 들고 돌아오면서 물었다. "씨앗은." "크게 터졌어. 아직 제어가 안돼." "어느 정도야." "내가 본 것 중에 최상위권." 민혁이 커피를 내려놓으면서 원시인을 봤다. "야, 능력 터졌을 때 어떤 느낌이었어. 뭔가 보이거나 들리거나 했어?" 원시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냥 삭제된 것 같았어요. 뭔가가." "삭제?" "바닥 타일이요. 밟았는데 닿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발이 타일에 닿는 과정이 삭제되고 그냥 다음 순간이 되는 것처럼." 민혁과 윤산이 짧게 눈을 마주쳤다. "삭제." 민혁이 낮게 말했다. 윤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그게 뭔데요." "알아 가봐야지. 이제." 민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천장의 별을 올려다봤다. 지구가 창밖에서 여전히 천천히 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능력이 개화한 사람이 오늘 처음으로 이 공간에 앉아 있었다. "우선 오늘은 쉬어.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원시인이 입을 달싹이다가 닫았다.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여러 개 있는 것 같았는데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결국 나온 건 이거였다. "저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요." 민혁이 윤산을 봤다. 윤산이 원시인을 봤다. "출근은 합니다." 윤산이 말했다. "대신 혼자 다니지 마세요. 고진혁은 놓친 걸 잊지 않습니다." 원시인이 잠깐 조용해졌다. 천장의 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원시인이 별을 올려다보다가 민혁한테 물었다. "근데 이거 진짜 계속 돌아가요? 배경이." "응, 타이머 맞춰뒀어. 새벽 두 시에 자동으로 꺼져." "......대단하네요, 진짜로." 민혁이 피식 웃었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은 자리에서 들은 탓인지 어깨가 약간 올라갔다. 윤산은 그 둘을 잠깐 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지구가 돌고 있었다. 내일도 원시인은 AD테크로 출근할 것이다. 고진혁은 오늘 놓친 신호를 기억할 것이다. 씨앗이 보이지 않는 신입사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다. 그 셋 중에 제일 신경 쓰이는 게 어느 쪽인지 정리하지 못한채, 산은 제 주머니 속 여전히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있는 손끝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같은 시각,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은 강한결은 윤산의 빈 자리를 보며 낮게 웃었다. 큭.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온 소리였다. '생각보다 재밌네.' 한결은 차가운 서리가 맺혔던 자신의 손끝을 매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그 남자가, 자신의 온기에 반응하던 그 찰나의 떨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 2화. 노이즈 # 출근 버스에서부터 이상했다. 원시인은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보다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어젯밤 아지트에서 나온 후에도 계속 이상한 감각으로 남아 있었다. 손끝이 비어버린 듯한 느낌. 가장자리부터 툭, 하고 세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기묘한 공백이었다. 타일이 깜박이던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죽는다고 했다. 제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쓰면. 원시인은 손을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제어하는 건지 감이 없었다. 어젯밤 윤산이 내일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혼자 터지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버스가 덜컹이며 정류장에 멈춰 서고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에 치여 몸을 좁히던 원시인이 문득 어디선가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강한결이었다. 통로 건너편 자리에 앉아서 원시인을 보고 있었다. 언제 탔는지도 몰랐다. 눈이 마주치자 한결이 눈꼬리를 접으며 손을 들었다. "형, 안녕하세요." 어제 처음 입사한 신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스스럼없는 호칭이었다. 거리감 따위는 애초에 가진 적 없는 사람처럼 해맑았다. 원시인은 당황스러움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창밖을 봤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윤산은 시야 막을 올렸다. 아침마다 하는 습관적인 스캔. 오늘 원시인의 씨앗은 어제와 달랐다. 폭발했다가 가라앉은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아직 불안정했다.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강한결. 오늘도 아무것도 없었다. 공백, 혹은 가림막. 윤산은 서류를 펼치면서 시야 막을 거뒀다. "대리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강한결이 윤산의 책상 모서리에 느릿하게 기대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기척 하나 없었다. "용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요." 윤산은 서류로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하지 않았다. 한결이 팔짱을 끼며 윤산의 손을 내려다봤다. "대리님 추위 많이 타시나봐요? 한여름인데 수트에 긴팔 입고 계시잖아요." "업무 중입니다." "혈액순환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좀 봐드릴까요." 한결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윤산이 서류를 들어 올리며 자연스럽게 손을 시야에서 뺐다. "괜찮습니다." "에이, 대리님은 너무 딱딱하게 구세요." 한결이 물러나지 않고 이번엔 어깨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은은한 체온이 윤산의 영역 안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어깨도 많이 굳어 있는 것 같은데. 어젯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강한결 씨." "네." "자리로 돌아가세요." 한결이 잠 윤산을 빤히 봤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몸을 뺐다. "알겠어요. 근데 대리님, 혹시 추우시면 말씀하세요." 돌아가는 뒷모습이 너무 태연했다. 윤산은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항상 얼음처럼 차가웠던 손등에 방금 닿았던 온기만 이질적으로 남아 있었다. 공지가 뜬 건 오후 두 시였다. 고요하던 사무실의 정적을 깨고 전체 홀로그램 창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듯 활성화되면서 붉은 테두리의 메시지가 박혔다. [보안 강화 공지: 전 직원 대상 정밀 심리 검사 실시 예정. 기술지원팀 1순위 대상. 일정 내일 오전 9시.] 사무실 곳곳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원시인은 화면을 보다가 떨리는 두손을 꽉 잡았다. 고진혁은 놓친 걸 잊지 않는다고 했다. 윤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췄다. 창가 쪽, 강한결은 공지 화면을 보면서 표정의 변화조차 읽히지 않을 만큼 지독하게 무미건조한 낯이었다. 저게 놀란 건지 예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윤산은 시선을 거뒀다. [퇴근 후 다크섹터로 오십시오.] 원시인 손목 단말기에 짧은 메시지가 떴다. 원시인이 다크섹터의 문을 연 순간, 고막을 때리는 비트음이 먼저 쏟아졌다. 눈이 멀 것 같은 핀조명. 천장에 매달린 미러볼이 빛을 사방으로 튀기고 있었다. 무대가 있었다. 진짜 공연장 무대처럼 높이가 있고 조명이 달린 무대였다. "자, 다들 카메라 보시고! 셋, 둘, 하나!" 무대 위에서 주민혁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었다. 어깨에 화려한 견장이 달린 제복 스타일의 화이트 자켓을 입고. 어제의 그 민혁이 맞나 싶은 비주얼이었다. 홀로그램 보정이 들어간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이목구비 라인이 선명하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조명 아래서 두 배는 강렬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데이터를 훔칠 심스틸러! 다크보이즈입니다!" 민혁이 과한 윙크와 함께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원시인은 문턱에서 그대로 멈췄다. "...이게 뭐에요?" "어! 왔어? 너도 코디 해줄게." 민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원시인의 몸 위로 순식간에 벨벳 크롭 자켓과 타이트한 슬랙스의 홀로그램이 입혀졌다. "이번 주 컨셉은 아이돌 무대야. 어때, 잘 어울리지?" 원시인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고는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어...저 안하고...싶어요..." 그때였다. "오빠! 왔어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원시인의 팔이 덥석 잡혔다. 로즈골드 빛 웨이브 머리, 화려한 고양이 눈매, 반짝이는 미니 드레스. 무대 조명 아래서 눈동자가 오로라처럼 빛나고 있었다. "우와, 실물이 더 예뻐! 완전 내 스타일이잖아!" “어, 저기...이거 좀 놓아주세요...” "난 루나야! 이쪽 사람들 중에 제일 중요한 사람! 나 없으면 이 팀 분위기 다 죽어." 루나가 원시인의 팔을 놓지 않은 채 옆으로 바짝 붙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예뻐? 어디 좀 봐봐." "아, 저기... 좀 떨어져 주시면..." "루나 씨. 원시인 씨 놔주세요." 소음 사이를 낮게 가르는 조용한 목소리였다. 루나가 팔을 놓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꺄아! 산이 오빠! 하네스 진짜 대박! 데뷔해요 우리!" 원시인은 목소리가 난 쪽을 봤다. 회사에서 보던 칼 같은 수트가 아니었다. 목선이 드러나는 검은 셔츠, 날이 서 있는 어깨선, 그리고 그 위로 가죽 하네스가 몸의 굴곡을 따라 엄격하게 조여져 있었다. 차가운 금속 버클이 조명 아래 번뜩일 때마다 평소의 단정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묘하게 색정적인 텐션이 흘렀다. 그러나 윤산은 루나의 비명에도, 미러볼이 돌아가는 무대 위에서도 표정 하나 없이 태블릿 화면만 넘기고 있었다. 저게 같은 사람인가. 원시인은 저도 모르게 루나의 팔을 잡아당겼다. "저기...루나 씨." "응?" "윤산 대리님...원래 저러세요?" 루나가 원시인을 봤다가 윤산을 봤다가 다시 원시인을 봤다. 그러고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원래 저래. 저 오빠는 머리만 좋은 바보거든." "회사랑 너무 달라서... 그럼 이쪽이 원래 모습인 거에요?" "둘 다 원래 모습이야. 산이 오빤 민혁 오빠가 처음 저런 이상한 홀로그램을 걸었을 때도 당황하거나 싫다는 기색은커녕, 민혁이 해준 거니까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 난 그 대책 없는 순진함에 진짜 기가 찼어." "... 순진함이요?" "지금 저게 남들 눈에 얼마나 자극적으로 보일지 아예 계산이 안 서는 거야.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야. 처음엔 나도 뭐지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인 거야. 무슨 상황이 닥치든, 딱 봤을 때 차가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 말도 안 되는 무구함이 엄청 매력적이지. 사람을 애타게 만든달까." "그게... 매력이에요?" "응.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아방해서 누구라도 대신 세상 풍파 다 막아주고 싶게 만드는 매력." 루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원시인은 다시 윤산을 봤다.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가죽 하네스가 살결을 조이는 자극적인 차림새로도, 윤산은 그저 현재 상황을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주 단정한 수트를 입고 결재 서류를 검토할 때와 똑같아서, 원시인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 사람한테 이상한 거랑 이상하지 않은 거의 기준이 뭔지, 원시인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공지 봤지." 윤산이 민혁을 보며 말했다. "응, 내일 아침에 검사 한다고. 시간이 없어." 그 순간 민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이크를 툭 내려놓으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어떤 새끼야.” 윤산의 시야 막이 반응했다. 민혁이 이중 삼중으로 걸어둔 보안망이 힘없이 헤쳐지며 입구 쪽에서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씨앗도 공백도 아닌 가림막. "와, 여기 대박!” 강한결이었다. 배경 사이를 통과하면서 주변을 한 바퀴 훑더니 눈을 반짝였다. "형들, 나 빼놓고 데뷔 준비 중이었어?" 민혁이 자신의 영역이 허무하게 뚫린 것에 경악하며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어디서 형 형 거려. 너 여기 어떻게 뚫고 들어왔어." "음, 코디가 좀 아쉬운데." 한결이 딴청을 피우며 손가락을 튕겼다. 보랏빛 파동이 몸을 훑고 지나가면서 홀로그램이 씌워졌다. 짙은 와인색 셔츠에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고, 목에는 얇은 체인이 걸렸다. 앞머리가 조명 아래 내려앉고 눈매가 반쯤 가려졌다. 한결은 마치 처음부터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컨셉을 소화했다. “어때요? 나 좀 아이돌 센터 상 아니야?” ​한결이 여유롭게 웃으며 윙크를 날리자 루나는 “대박! 완전 입덕 각!”이라며 비명을 질렀고, 원시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한결 쪽에 멈췄다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잘생긴 건 잘생긴 거고,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오면 못쓰지!” 루나에게서 오로라가 피어올랐다. "루나씨. 멈추세요." 루나가 능력을 거두자 윤산이 한결 앞으로 걸어갔다. "강한결 씨. 여기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왔더니 열려 있던데요." "이곳은 외부에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한결이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저한테는 가능하던데요." 윤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한결은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 스피커 위로 훌쩍 올라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한결의 시선이 윤산의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가죽 하네스를 느릿하게 훑어 내리며 말했다. "대리님. 내일 검사 말이에요." "....." "내가 도와줄게요." "...뭘 알고 계십니까." "트리플 락이에요. 고진혁이 준비한 거." 한결이 조명 아래서 입꼬리를 올렸다. '트리플 락'. 처음 듣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 단어를 뱉는 강한결의 태도와, 그 뒤에 붙은 '고진혁'이라는 이름이 품은 무게가 달랐다. 윤산이 한 걸음 다가섰다. "강한결 씨." "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겁니까." 목소리에 서늘한 서리가 맺혔다. 조명이 윤산의 얼굴 옆에서 스쳐 지나갔다. 하네스 버클이 빛을 튀겼다. 한결은 윤산의 경계하는 시선을 즐기듯 나른하게 미소 지었다. # 3화. 언리드 # "트리플 락이에요." 한결이 스피커 위에서 다리를 꼬며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웃는 표정과 달리 눈빛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1단계는 오라클 강제 스캔이에요. AD칩을 통해서 뇌 데이터를 직접 읽어내는 거죠. 능력자는 오라클이 읽을 수 없는 노이즈가 뇌파에 섞여 나와요. 그걸 잡아내는 거고." 민혁이 팔짱을 꼈다. "2단계는." "생체 스캔. 능력을 쓰면 몸에 흔적이 남거든요. 그걸 읽어내는 거죠." "3단계." "대면 검사. 기계가 놓친 걸 사람 눈으로 직접 잡는 거예요." 원시인이 손을 들었다. "저는요? 저도 걸려요?" 한결이 원시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서버실에서 한 번 터진 건 알고 있었다. 무슨 능력인지, 리스크가 뭔지는 아직 몰랐다. "서버실에서 딱 한 번 썼잖아요. 흔적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럼 걸릴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지금 얘기하는 거죠." 한결이 스피커에서 내려오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도움을 받아야 해서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제 리스크는 발열이에요. 능력을 쓸 때마다 온몸을 태워버릴 듯 체온이 올라가거든요. 생체 스캔에 잡히면 끝이죠." "그래서요." "지난번 D.A.B가 왔던날 알았어요. 대리님은 반대잖아요.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지는 쪽이니까. 우리 둘은 서로 상쇄돼요. 스캐너 렌즈엔 그냥 평균 체온을 가진 건강한 성인 둘로 보이겠죠." "그게 당신이 여기 온 이유입니까." "이유 중 하나죠." 한결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1단계 오라클 스캔, 윤산 대리님이랑 원시인 형 둘 다 제가 동기화로 커버할 수 있어요." 민혁이 끼어들었다. "동기화가 뭐야." "싱크, 제 능력이에요. 자세히는 말해드릴순 없고, 대리님 냉기 가져갔던 것도 같은 거예요." 윤산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날 이상하게 체온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올라갔다. "거리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까." "가까울수록 좋아요." "사무실에서는 떨어져서도 됐잖습니까." "됐죠." 한결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근데 가까울수록 더 정밀해요. 검사실 오라클 스캔 강도가 사무실이랑은 다르거든요. 대리님이랑 아주 찰싹, 붙어 있어야해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한결은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찰싹.....붙어서요?" "찰싹 붙어서요." 윤산의 미간이 좁아졌다. 한결은 그 표정을 보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윤산의 반응을 살폈다. 윤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한결은 그걸 승낙으로 읽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원시인이 민혁한테 작게 물었다. "저 사람 믿어도 돼요?" "글쎄." 민혁이 솔직하게 말했다. "근데 방법은 맞아. 그리고 지금 우리한테 다른 선택지가 없어." 루나가 팔짱을 끼며 끼어들었다. "내일 면담 안에서 소통은? 소리 내면 바로 잡히잖아." 한결이 루나를 봤다. "어느정도 서로 능력 공유는 하도록 하죠. 전 싱크로 머릿속에 생각을 흘려보낼수 있어요." "산이는 망막에 메세지 띄울수 있어. 그럼 둘은 대화가 가능한데, 시인이는 보거나 듣기만 해야겠네." 민혁이 말했다. "좋네요. 어차피 시인 형은 가만히 있으면 되니까."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굳었다. "근데 대면검사는 뭘 하는 거에요?" "능력을 감별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이에요." 한결이 말을 이었다. "한 명은 거짓말 탐지. 대답할 때 거짓이면 반응이 나와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다른 한 명은 그림자 무게를 읽어요. 능력자는 인과율을 건드린 흔적이 그림자에 남거든요." "그걸 어떻게 막아요." "거짓말 탐지는 제가 막을게요. 면담실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이랑 동기화하면 반응 자체가 안 나와요. 제가 일반인이랑 동기화한 상태로 옮기는 거라 기계도 사람도 못 잡아요." 윤산이 말했다. "그림자는 제가 덮겠습니다. 잔상을 씌우는 거라 면담실 밖에서도 가능합니다." "면담실 안에 같이 들어가요?" 원시인이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 "아뇨. 밖에서도 돼요. 가까운 거리면." 원시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결을 봤다. "아까 거리 얘기는 대리님한테만 해당되는 거예요?" "네. 그건 체온을 좀 깊게 섞어야하는거라." 한결이 윤산을 슬쩍 돌아보며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잠깐, 시인아." 민혁이 원시인을 불러 세웠다. "능력이 뭔지 알아?" "아니요...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일단 이 세계부터 정확히 알아야 해." 민혁이 자리를 잡고 앉아 공중에 홀로그램 창을 띄웠다. "전세계 사람들 머릿속엔 AD칩이 박혀 있어. 알고 있지? "네...그건 당연한거잖아요." "당연하지 않아. 1990년대부터 보급된 거야. 이전엔 없었던게 당연한거 였고." 민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처음엔 자발적이었지. 뇌 발달을 돕고 학습 효율 높인다는 명분이었거든. 근데 10년 지나니까 사실상 의무가 됐고, 지금은 그냥 태어나면 있는 거야. 니가 당연하다고 느끼는것처럼. 마치 숨 쉬는 것처럼." "근데, 그 칩이 왜요?" "그 칩이 연결된 시스템이 오라클이야." 원시인이 손목 단말기를 내려다봤다. "2004년쯤에 이상한 일이 생겼어. 갑자기 전 세계에서 능력자가 나타나기 시작했거든. 나이도 성별도 상관없이. 어떤 사람들 몸 안에 능력의 씨앗이 생긴 거야." "씨앗이요?" "아직 발현 안 된 건 우리가 씨앗이라고 불러. 발현되면 능력자가 되는 거고. 아예 씨앗이 존재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 민혁이 원시인을 봤다. "능력을 쓰면 리스크. 즉 대가를 치러. 세상의 인과율을 건드리는 대신 몸이 값을 치르는 거야. 누구는 체온이 떨어지고, 누구는 몸이 타오르고. 나는 능력 쓸 때마다 지방이랑 근육이 소모돼." 민혁이 초콜릿 바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래서 난 항상 고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해야해. 안그럼 뼈만 남을수도 있으니까." "그럼 저는요. 제 대가는 뭐예요?" "그건...아직 몰라. 한 번밖에 안 썼잖아." 원시인이 잠깐 조용해졌다. "전 세상에 능력자 라는게 존재하는지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일반인들은 알수가 없어. 정부랑 오라클을 만들어낸 AD테크에서 철저하게 숨기거든. 아침마다 니가 통과하던 뉴럴스캐너도 일반 사람들 눈엔 그냥 보안 검사 장비야. 회사들이 보안 강화한다더니 이런 거 설치하나보다 수준이지. 근데 사실은 능력자를 찾아내는 거야." 원시인은 매일 아침 로비 풍경을 떠올렸다. 직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줄을 서서 통과하는 모습. "그러면 저도 내일 그냥 모르는 척 통과하면 돼요?" "그게 제일 어려운 거야." 민혁이 초콜릿을 씹으며 말했다. "긴장하면 티 나거든." * 다음 날 아침 로비는 어제와 달랐다. 출입구 양쪽에 검사 부스가 설치돼 있었다. 보안 요원들이 줄을 통제하면서 한 명씩 통과시켰다. 직원들은 대부분 무표정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기기를 관자놀이에 댔다가 신호음 하나 듣고 지나쳤다. 보안 강화 세션이라는 공지가 붉은 홀로그램으로 로비 천장을 채우고 있었다. "기술지원팀 전원 제3 검사실로 이동하세요." 보안 요원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원시인은 윤산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앞에서 걷는 윤산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꼿꼿했다. 어깨를 툭 치는 감각이 왔다. "형, 어깨 좀 펴요. 그러다 거북목 돼요." 강한결이었다.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요..." "원래 그래요." 한결이 앞줄의 윤산 뒷모습을 잠깐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형은 제일 안전한 포지션이에요. 걱정 붙들어 매요." 뭔가 이유가 있어서 안전하다는 건지, 그냥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원시인은 일단 어깨만 폈다. 검사실은 원형 돔 형태였다. 중앙에 고진혁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 뒤로 모니터들이 줄지어 빛나고 있었다. "착석 하십시오." 직원들이 전부 자리에 앉았다. 원시인은 윤산 옆자리에 앉으며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오라클 스캔 시작합니다." 천장에서 파란 빛이 내려왔다. 얇고 넓게 퍼지는 빛. 관자놀이 쪽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이 왔다. AD칩이 반응하는 거였다. 원시인이 미간을 찌푸리려는 순간, 뭔가 다른 감각이 먼저 왔다. 싱크. 아주 얕고 조용하게, 뇌파 위에 부드러운 막이 한 겹 씌워지는 느낌. 한결이었다. 원시인 두 줄 뒤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앞을 보고 있었다. 윤산도 느꼈는지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무릎 위에 내려앉았다. 모니터에 숫자들이 흘렀다. "이상 없음. 다음." 2단계가 시작되고 생체 스캔 패널이 내려왔다. 옆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강한결이 윤산 옆으로 의자를 바짝 붙여 앉으며 윤산의 머릿속으로 생각을 흘려보냈다. {대리님, 분위기 너무 삭막하지 않아요?} {저 몸이 좀 달아오르는데요. 대리님이 식혀줘야 할 것 같아서.} {손 한 번만 잡으면 안 돼요?} 윤산이 정면을 보는 채로 한결의 망막에 메세지를 띄웠다. [싱크 시작하세요.] {이거 거절이에요, 수락이에요?} 한결이 낮게 웃으며 윤산에게 손을 뻗었다. 윤산의 차가운 손등 위로 뜨거운 손바닥이 겹쳐졌다. 닿은 면적을 타고 델 것 같은 열기가 밀려왔다. 붉은 레이저가 두 사람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윤산의 손끝에 온기가 번졌다. 손끝. 항상 이 자리가 제일 먼저 얼어붙곤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따뜻했다. 스캐너 화면에 지극히 정상적인 숫자가 떴다. 고진혁이 모니터를 뚫어지게 노려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원시인 순서. 레이저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마모율 이상 없음." 3단계. 개별 면담. 복도에 기술지원팀 직원들이 줄을 섰다. 면담실 문이 열리고 닫히며 사람들이 하나씩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사람들 표정이 하나같이 평범했다. 보안 강화 면담이라니까 그냥 으레 하는 거려니, 하는 분위기. "원시인 사원 들어오세요." 면담실은 내부는 매우 좁았다. 책상 하나 의자 둘, 그게 전부인 공간에 고진혁이 태블릿을 들고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코트를 걸친 남자가 위스키 병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는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그냥 서 있는 것치고는 눈빛이 이상하게 날카로웠다. 문 가까운 구석에는 키가 큰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 한마디 없이. "앉으세요." 고진혁이 태블릿을 툭툭 두드리며 시작했다. "최근 업무 스트레스 수치가 어느 정도예요?" 원시인이 입을 열려는 찰나 망막에 메시지가 떴다. [준비중입니다. 자유롭게 말하세요.] "보통이에요." "수면 패턴에 변화 있었나요?" "조금 뒤숭숭하긴 했는데요." "최근에 이유 없이 몸에 이상을 느낀 적 있어요? 체온 변화라든가, 신체 감각이 평소랑 달라진다든가." "없었습니다." 코트를 입은 남자의 눈이 원시인의 얼굴을 아주 천천히 훑었다. 마치 모공 하나하나를 뜯어보는 듯한 시선에 소름이 이마 쪽까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원시인은 그냥 앞을 봤다.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아무 생각 하지 말자. 잠시 후 그 남자가 흥미를 잃은 듯 시선을 거뒀다. 구석에 서 있던 키 큰 남자가 그때서야 움직였다. 특별히 걷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선만 천천히 아래로 내렸는데, 원시인의 발밑 그림자 쪽을 한참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원시인은 다리를 움직이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힘을 주게 됐다. 그림자가 혹시 떨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남자가 짧게 고개를 젓고, 고진혁이 태블릿에 뭔가를 마저 입력하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나가도 됩니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등 뒤로 힘이 쭉 빠졌다. 복도 벽에 기대고 서서, 숨을 한 번 크게 내쉬는데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망막에 메시지가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옆을 보니 윤산이 복도 한쪽에 서 있었다. 원시인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윤산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강한결이 면담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런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안에서 고진혁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한결 씨. 잠깐." 한결이 멈췄다. 복도에 남아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움직임이 멎었다. 고진혁이 문 앞에 나와 서면서 한결을 봤다. 다른 직원들 볼 때랑 결이 다른 눈빛. 전체를 훑는 게 아니라 어딘가 한 곳을 정확히 짚어보는 눈이었다. "1단계 스캔 결과가 좀 특이해서. 과하게 깨끗하네." "원래 좀 덤덤한 편이에요." "덤덤한 것과 노이즈가 없는 건 다른 얘기죠." 고진혁이 한 발 나오면서 말을 이었다. "읽어야 할 신호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어. 일반인도 미세하게는 나오거든. 근데 당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깨끗했어." 한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검사가 별로 무섭지 않았나봐요." "그래서 기억해두려고." 고진혁이 한결을 한 번 더 훑고 나서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가 잠깐 조용해졌다. 돌아서는 한결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장난기가 서린 여유로운 얼굴. 고진혁이 방금 한 말이 전혀 박히지 않은 사람 같았다. 윤산은 그 얼굴을 봤다. 읽을 수 없는 뇌파. 처음부터 노이즈가 없었다는 건, 스캔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호를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뜻이다. 동기화 능력으로 그게 가능한 건지, 아니면 애초에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지. 씨앗이 보이지 않는 사람, 다크섹터에 허가 없이 들어온 사람, 트리플 락 구조를 꿰고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과는 상반되는 리스크를 가진 사람. 쌓이는 의문이 너무 많았다. "강한결 씨." 한결이 돌아봤다. "수고하셨습니다." 그게 전부였다. 윤산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한결이 잠깐 윤산의 옆얼굴을 봤다가, 작게 웃었다. 뭔가를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한 웃음이었다. 검사가 끝나고 건물을 나서면서 원시인은 처음으로 제대로 숨을 내쉬었다. 바깥 공기가 폐 끝까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건물 측면 골목에 루나랑 민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나는 원시인을 보자마자 달려와 팔을 잡았다. "어때? 살아있어?" "네, 겨우요." "나도 겨우. 혹시나 해서 밖에서 능력 펼치고 있었더니." 민혁은 이미 초콜릿 바를 두 개째 뜯고 있었다. "고생했어. 다들." 짧게 말하고 세 번째 초콜릿을 꺼냈다. 그날 밤 다크섹터의 모습은 어제와 달랐다. 아이돌 무대는 사라지고, 발밑에는 거칠고 차가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고, 짙은 안개 너머로 낡은 등대 하나가 쓸쓸한 빛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원시인이 멈칫했다. "...이번엔 또 뭐예요?" "바다야." 등대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민혁이 돌아보지도 않은 채 힘없이 대답했다. 그는 어깨가 축 처진 채 뭔가를 홀짝이고 있었다. "형? 검사 통과했잖아요. 왜 이렇게 분위기가..." "통과하면 뭐 하냐....내 사랑은 침몰했는데...." 루나가 원시인 귀에 속삭였다. "아침에 너희 살리겠다고 회사 앞에서 대기하느라 여친이랑 약속을 잊어버렸대. 연락도 없이 바람 맞혔으니까 뭐, 광속 이별이지." "아." "강한결이 알려줬어. 아주 신나서." 돗자리 옆에 한결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느새 모래사장 분위기에 완벽하게 녹아든 채로, 민혁이 홀짝이는 걸 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곳의 사람이었던 것처럼 이질감이 전혀 없었다. "강한결, 너 다 소문내고 다녔냐! 시인아, 내가 너희 살리겠다고 내 연애를 제물로 바쳤다. 알아? 그러니까 오늘은 다들 내 슬픔에 동참해!" 민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에이, 형. 우리 이제 검사도 같이 통과한 운명 공동체잖아요. 기념으로 제가 형들 연애 스타일이나 좀 맞춰볼까요? 저 이런 거 진짜 잘 맞추거든요." ​한결이 눈동자를 보랏빛으로 빛내며 사람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민혁 형은, 여친은 자주 사귀는데 항상 유통기한이 한 달도 안 가죠? 금방 사랑에 빠졌다가 금방 차이는 스타일. 사실 뭐, 다른 곳에 마음이 있을 수도 있고." "이 자식이 진짜....!" "그리고 대리님." ​한결의 시선이 무덤덤하게 파도를 바라보던 윤산에게 향했다. ​"대리님은 그냥 모태 솔로죠? 일 말고는 뇌에 다른 데이터가 들어갈 자리가 아예 없어요. 맞죠?" ​윤산은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돌려 한결을 바라봤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그 건조한 시선이 오히려 확신을 주는 듯했다. 루나가 낄낄거리면서 원시인 옆에 앉았다. 한결이 이번엔 루나를 가리켰다. "루나 누나는 연애에 관심은 많은데, 막상 누가 진지하게 대시하면 질색하면서 도망치는 스타일." "어? 맞긴 한데 왜 알아?" "딱 보면 알아요." 한결이 눈을 반짝이며 원시인을 봤다. "우리 원시인 형은, 음. 중고등학교 때 딱 두 번 사귀어봤겠네요. 그 이후론 전멸이고." 원시인이 입을 벙긋거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딱 보면 알아요, 이것도." 민혁 형이 억울하다는 듯 한결의 멱살을 잡는 흉내를 냈다. "야! 넌 얼굴이 그 모양이니 이런 고통을 모르겠지? 넌 연애가 쉽냐?" "뭐, 절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들 보면 일단 입덕부터 하던데." 한결이 턱을 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 뻔뻔한 비주얼에 다들 잠깐 말을 잃었다. 얄밉긴 한데 반박이 안 됐다. 파도 소리가 느릿느릿 흘렀다. 그때 줄곧 모래사장을 바라보고 있던 윤산이 한결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가 아주 낮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한결 씨." "네, 대리님. 제 미모에 이제야 좀 빠지셨어요?" ​윤산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등대의 빛줄기가 그의 옆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당신, 언리드입니까?" 파도 소리가 멎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한결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아주 천천히 굳어갔다. 눈동자에 감돌던 보랏빛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민혁이 멱살을 잡으려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되물었다. ".....언리드?" 등대가 한 바퀴 돌면서 빛줄기가 한결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한결이 모래를 발끝으로 툭툭 찼다. 한 번, 두 번. 그러다 피식, 웃었다. 굳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형들은 기억하는 자들이죠?" 이번엔 반대편이 굳었다. 민혁의 손이 멈췄다. 루나가 원시인 팔을 잡았다가 놓았다. 윤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눈빛이 달라졌다. 한결이 그 반응들을 하나씩 훑으면서 모래사장에 풀썩 앉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다음에 천천히 얘기해요. 오늘은 다들 고생했으니까." 파도 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등대가 또 한 바퀴 돌았다. 모래사장 위로 낯선 경계심이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 4화. 씨앗의 이름 # 한결의 말이 파도 소리 사이에 떠 있었다. 루나가 제일 먼저 움직였다. 눈동자에 오로라가 선명하게 피어오르더니 한결 쪽으로 한 발 나섰다. 공기를 타고 루나의 서늘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윤산이 팔을 뻗어 막았다. "루나 씨." "저 사람 언리드예요." "알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침입했어요. 그냥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괜찮습니다." 낮고 조용한 말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루나가 멈췄다. 입술을 삐죽이면서 능력을 거두자 눈동자의 오로라가 서서히 꺼졌다. 한결은 그 소란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루나가 능력을 꺼내 드는 순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그저 모래를 손으로 한 줌 집었다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면서 등대 쪽을 바라봤다. 민혁이 한결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어디서 알았어." "여기저기요." "여기저기가 어딘데." "형, 저한테 정보 출처 물어보는 게 무의미하지 않아요? 제가 언리드라는 거 방금 확인했잖아요." 민혁이 잠깐 말을 잃었다. 반박하려다가 반박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윤산이 한결을 봤다. 한결이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웃었다. 아까 굳었던 얼굴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 "일단 앉아, 다들." 민혁이 돗자리에 주저앉으면서 말했다. 다섯 번째 초콜릿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자 포장지가 날카롭게 구겨졌다. 루나가 투덜거리면서 옆에 앉았고, 원시인은 그 옆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윤산이 한결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한결은 그 간격을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대가 한 바퀴 돌았다. 원시인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민혁이 잠깐 원시인을 봤다가, 한결을 봤다가, 다시 원시인을 봤다. "맞다. 너 아직 아무것도 모르지." "네." "서버실에서 능력 터지고 나서 사흘밖에 안 됐네." "네." "근데 언리드랑 같은 공간에 앉아 있어." "......" "우선 우리, '기억하는 자들'이 뭔지부터." 민혁이 먼저 꺼냈다. "정부가 능력자를 찾아내고 제거한다는 건 이미 알지. 우리는 그 전에 능력자들을 먼저 찾아내서 숨겨주고, 오라클 시스템에 맞서는 사람들이야. 그게 기억하는 자들이야."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리드는요?" 한결이 등대 쪽을 보던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언리드의 목적은 기억하는 자들이랑 같아요. 시스템 해체." 민혁이 한결의 말을 이어서 답했다. "하지만 우리와는 방식이 전혀 달라. 기억하는 자들은 최대한 인명 피해를 줄이려고 해. 그런데 언리드는.....단 한가지 정보뿐이어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능력자도 정부측 사람도 그리고 민간인까지도, 희생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야." 민혁의 목소리가 한 층 낮게 가라앉았다. "과격하지. 그래서 7년 전 능력자 사냥 때 정부가 제일 먼저 뿌리를 뽑으려 한 게 언리드였어." 한결이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채 답했다. "뿌리를 못 뽑았죠. 읽히지 않는(Unread) 페이지는 원래 어디에나 숨어 있는 법이거든요." 루나가 거칠게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다. 모래알이 그녀의 바지 끝단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목적이 같다고해서 언리드의 방식을 인정해 줄 수는 없어. 너희는 그저 테러리스트일 뿐야." "누나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덜해요." 한결이 또 픽 웃으며 받아치자, 루나의 눈동자 속 오로라가 다시금 푸르게 일렁였다. "너희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희생을 입에 담을 때마다 소름이 돋아. 7년 전 그 사냥터에서, 우리 전 리더이자......" 루나가 말을 뱉다 말고 멈칫하며 곁에 앉은 윤산을 바라보았다. 윤산은 멀리 등을 돌린 등대의 불빛만 시선으로 좇고 있었다. 루나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목소리를 뚝 떨어뜨렸다.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물기 어린 목소리. "......산이 오빠의 쌍둥이 형인 윤강 오빠가 동료들을 살리려다......폭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우린 그 강하고 따뜻하던 우리 리더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그런데 너희가 희생을 당연하게 말해?" 공기가 기묘하리만치 고요해졌다.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소리조차 밤공기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폭발'이라는 단어가 허공에 흩어지는 순간, 윤산의 손목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비정상적으로 돋아났다. 한여름의 바닷가임에도 불구하고, 윤산이 짚고 있는 돗자리 주변의 모래알 위로 하얀 서리가 거칠게 엉겨 붙기 시작했다. 형의 마지막 순간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이 그의 체온을 사정없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한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윤산의 하얗게 질려가는 손끝과 그 주변에 맺히는 서리로 향했다. 능글맞게 휘어져 있던 한결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어졌다. 항상 유희하듯 세상을 보던 보랏빛 동공에 깊은 균열이 이는 순간이었다. 한결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던 모래를 털어내고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차갑게 굳어버린 윤산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사 때 왜 도왔습니까." 윤산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물었다. 형에 대한 대화를 더는 듣기 힘들다는 듯, 지독히도 덤덤하고 벽이 느껴지는 말투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한결이 잠깐 윤산을 보았다. 눈동자 밑바닥에서 일렁이던 복잡한 파동을 지워내며, 이내 평소처럼 피식 웃어 보였다. "저도 AD테크에 잠입 중이에요. 거기서 걸리면 저도 끝이고요. 이해관계가 맞으니까 도운 거죠." 맞는 말이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었다. 한결이 모래를 손끝으로 훑으면서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처음 싱크를 걸었을 때, 윤산에게서 느꼈던 지독한 냉기가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2단계 검사조차도 한결 본인의 능력이면 혼자서 충분히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윤산의 체온이 발열을 상쇄하는 그 생소한 감각을 또 한번 겪고 싶었다. 자신에게 없는 걸 가진 사람. 자기 몸이 얼어붙는 와중에도 원시인을 덮으려 했던 윤산의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겉은 차갑고 속은 전혀 다른 사람. 처음엔 그냥 흥미로웠다. 윤산처럼 자기희생적인 타입을 한결은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게 좀 달랐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이유는 없었다. "일단은 그거예요." 윤산이 한결의 마지막 말이 끝난 뒤 잠깐 시선을 거뒀다. '일단은'. 그 두 글자가 조용히 남았다. ​“근데 대리님, 시인 형 이제 또 터질 때 됐죠? 더 이상 버티기 힘들 텐데.” 강한결의 보랏빛 눈동자가 원시인의 흉골아래, 정확히는 윤산이 말했던 씨앗의 위치를 훑었다. 윤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이 한결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 어차피 잠입한 목적도 같고, 서로 도와요. 시인 형 살리려면 한명이라도 더 있는게 낫지 않겠어요? 심지어 난 꽤 유능한데." 아무도 반박할수 없었다. 파도 소리만이 철썩이며 발끝을 적셨다. 어쩔 수 없는, 지독하게 찝찝하고 위태로운 공조의 시작이었다. * "서버실에서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어?" 원시인이 다크섹터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민혁이 물었다. 능력 훈련 전에 먼저 확인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원시인이 그날을 떠올렸다. 서버 교체 작업 중이었다. 이전 데이터를 백업하고 기존 서버에서 삭제하는 과정이었는데, 갑자기 뭔가가 역류하는 감각이 왔다. 손가락 끝을 타고 뇌 쪽으로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너무 많은 게 한꺼번에 들어와서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시야 한가운데 파란 버튼 같은 게 나타났다. 눌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버튼을 누르자 바닥 타일이 단순히 부서지는 게 아니라, 타일이 존재했다는 역사 자체가 지워지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뭔가를 삭제하는 것 같았어요. 과정째로." 원시인이 말했다. 민혁이 윤산을 봤다.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삭제야. 존재 자체를 없애는 거야. 과정도, 흔적도 같이. 서버실에서 데이터 삭제 작업 중에 발현된 게 우연이 아니야. 네 능력이랑 그 상황이 맞아떨어진 거지." 원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그날 멍하게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생각났다. 민혁이 피식 웃었다. "능력은 감 잡았고, 이제 리스크가 뭔지를 알아야겠네." "그걸 어떻게 알수 있어요?"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써봐야 알아. 그래서 지금 훈련 하는 거야." 민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낡은 TV 한 대가 다크섹터 한쪽에 나타났다. 화면에서는 보험 광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중년 남자가 탭댄스를 추면서 보험 상품을 설명하는 광고였다. 원시인이 TV 앞에 서서 화면을 봤다. "왜 보험 광고에서 탭댄스를 춰요." "나도 모르겠어." "보험이면 안심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원시인 씨." 윤산이 나직히 말했다. "저 광고만 삭제해보세요." 원시인이 입을 다물고 TV를 봤다. 민혁이 설명했다. "주변은 하나도 건드리지 말고. TV는 그대로 두고 광고만. 서버실에서 느낀 것처럼, 존재 자체를 없앤다는 감각으로." "어떻게요?" "파란 버튼 보였다고 했지? 그걸 통해서. 과하면 TV 폭발하고 부족하면 아무것도 안 돼." "폭발이요?" "집중하세요." 윤산이 다시 말했다. 원시인은 눈을 좁혔다. 광고만. 강하게 눌러서 없애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서버실에서 타일이 사라지던 감각을 손끝으로 불러왔다. 시야 한쪽에 파란 빛이 희미하게 점멸했다. "삭제." 파악-! TV 화면이 지직거렸다. 광고속 남자의 얼굴이 기괴하게 뭉개지더니 다시 원래 광고로 돌아왔다. 대신 TV 옆에 놓여 있던 민혁의 의자가 소리도 없이 증발했다. 민혁이 허공에 엉덩이를 댄 채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앉으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광고는 멀쩡하고 의자만 사라졌어. 파리 잡겠다고 대포 쏜 거야." "어떻게 해야 해요." "힘 빼. 더 가볍게. 광고가 사라지는 게 당연한 일 것처럼." 원시인이 다시 TV를 봤다. 탭댄스 남자가 여전히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의자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다시 하십시오." 윤산이 말했다. "삭제." 이번엔 민혁의 손에 들려 있던 초콜릿 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 "죄송해요. 정말로!" 루나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한결도 벽에 기댄 채 큭큭거리며 구경 중이었다. "다시 하십시오." 몇 번을 반복했는지 알 수 없었다. 윤산은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고, 원시인은 매번 엉뚱한 물건을 지워버렸다. 민혁의 초콜릿만 벌써 세 번째 희생됐다. 원시인이 땀을 닦으며 윤산을 봤다. "대리님, 안 힘드세요?" "그만하시겠습니까?" "아니요." "그럼 하세요." 원시인은 다시 TV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번엔 방법을 바꿨다. 없애려 애쓰지 말고, 처음부터 저 화면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로 했다. 강제로 누르지 않고 의지를 가볍게 흘려보냈다. "삭제." TV 화면이 아주 잠깐 정지하는가 싶더니, 매끄럽게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어갔다. 탭댄스 남자는 사라졌고, 주변의 그 어떤 물건도 다치지 않았다. 민혁의 움직임이 멈췄다. 루나도 입을 막은 채 화면을 봤다. “됐습니다.” 윤산이 짧게 말했다. 원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성공했다는 감각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율처럼 전해졌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기이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조각 하나가 쑥 빠져나간 듯한 느낌. 방금 전까지 분명히 생각하고 있던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다시 떠올리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처럼 잡히지 않았다. "어때요?" 루나가 물었다. "됐는데....." "됐는데?" “뭔가 빠진 것 같아요. 분명 방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던 게 있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요.” 민혁과 윤산이 시선을 교차했다. 한결이 벽에서 몸을 떼며 원시인에게 다가왔다. 재밌다는 듯 구경하던 표정은 간데없고, 뭔가를 확인하려는 듯 진지하게 계산하는 눈이었다. "형, 그거." 한결이 낮게 읊조렸다. "그게 대가예요. 삭제 능력인데 대가도 삭제네요. 자기 기억으로." 원시인이 손을 내려다봤다. 방금 사라진 것이 자신의 기억이었다는 사실이 말로 뱉어지자 이상하게 실감이 됐다.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는 채 사라져 버린 것. 오직 텅 빈 공백만이 남았다. 민혁은 조용히 남은 초콜릿을 씹었고, 루나는 안타까운 듯 원시인의 팔을 짧게 잡았다가 놓았다. 윤산은 원시인을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의 무심한 표정 위에 아주 옅은 파동이 일었지만,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시인은 다시 TV를 봤다. 광고는 이미 끝나 있었고, 다음 프로그램이 아무 일 없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방금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괜찮아. 별거 아니었을 거야.” 민혁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다독였지만, 그의 눈은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원시인은 그 손길에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가 채 번지기도 전, 한결이 산의 귓가에 닿을 듯 낮게 속삭였다. “대리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윤산이 고개를 돌려 한결을 보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안개 낀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저 형이 다음번에 지워버리는 건, 탭댄스 추는 아저씨나 초콜릿 따위가 아닐지도 모르니까.” 한결의 시선이 원시인의 손끝에서 윤산의 심장 쪽으로 천천히 옮겨갔다. 방금 삭제된 것이, 정말 하찮은 기억뿐이었을까. 윤산의 미간이 돌처럼 굳어졌다. # 5화. 가림막 # 강한결이 출근한 건 윤산보다 딱 오 분 늦었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윤산이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은 채로 동공 위 투명한 시야 막을 열었다. 가림막. 오늘도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한결의 존재는 마치 소음 하나 없는 진공 상태처럼 과하게 매끄러운 공백으로만 보였다. 닫으려는데 한결이 벌써 윤산 책상 옆에 서 있었다. "대리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오늘 날씨 진짜 춥죠?" "여름입니다." "대리님한테는 여름이 없잖아요." 한결이 윤산 책상 모서리에 자연스럽게 기대면서 말했다. 윤산은 서류를 넘겼다. 한결이 그 옆에 그냥 서 있었다. 특별히 뭘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거기 있었다. 서류를 넘기던 윤산의 손끝에 닿는 공기가 달라졌다. 이 계절에도 서리가 맺힐 듯 차가웠던 손끝에, 한결이 서 있는 쪽부터 미미한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윤산은 그 생경한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볼일 있습니까." "없어요." "그럼 자리로 가시죠." "잠깐만요. 대리님 손 좀 봐도 돼요?" "안 됩니다." "혈액순환 때문에." "괜찮다고 했습니다." "제가 봤을 때 안 괜찮아 보여서요." 한결이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윤산의 뺨 근처까지 다가온 한결의 숨결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윤산이 반사적으로 팔을 뺐는데 평소보다 동작이 한 박자 느렸다. 늘 차가웠던 몸이 한결의 열기에 속수무책으로 풀어져 반응이 늦어졌다. 한결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 예리하게 반짝였다가 이내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로 돌아왔다. "대리님, 혹시 지금 좀 따뜻해요?"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요. 내 기분 탓인가 싶어서." 윤산이 고개를 들어 한결을 보았다. 한결은 그저 웃고 있었으나, 그 속내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는 한결의 뒷모습을 보며 윤산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한결이 멀어지자 온기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손끝엔 다시 천천히 냉기가 차올랐다. 윤산은 한결의 온기가 머물렀던 손가락 마디를 다른 손으로 느리게 움켜쥐었다. 한결은 제 자리에 앉으며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윤산이 자신을 뿌리치는 속도가 어제보다 분명히 느려져 있었다. 차가운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 재밌는 반응이었다. * 그날 밤 다크섹터는 숲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변해 있었다. 통나무로 지어진 공간 안에는 난로의 장작 타는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가상의 유리창 위로는 빗방울이 맺혔다 흘러내렸다. 빗물이 유리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고요한 지하 공간을 메웠다. 바닥에 두꺼운 러그가 깔려 있었고 천장에 전구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원시인이 들어오다가 멈췄다. "오늘은 오두막이에요? 한여름에 난로까지요?" "어. 아늑하지?" 민혁이 러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도시락통을 열고 있었다. 옆에 견과류 봉지, 단백질 바 여러 개, 고구마, 컵라면이 쌓여 있었다. 루나가 난로 쪽에서 손을 쬐다가 민혁 옆에 털썩 앉았다. 단백질 바 하나를 집었다. "이거 먹어도 돼?" "먹어." 루나가 뜯으면서 민혁이 보고 있는 방향을 따라 봤다. 오두막 입구 쪽. 윤산이 들어오면서 난로 쪽을 한 번 봤다가 자리를 잡았다. 난로와 가까운 자리. 민혁이 뭘 걸어놔도 항상 무덤덤한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오두막 공기가 좀 마음에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윤산의 창백한 뺨에 난로의 주황빛 불씨가 내려앉아 모처럼 온기가 감돌았다. 그 뒤로 한결이 들어왔다. 주변을 한 바퀴 훑더니 눈을 반짝였다. 천장 전구를 보다가 난로를 보다가 민혁에게 뭔가를 말했다. 민혁이 손사레를 쳤다. 한결이 개의치 않고 윤산 옆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어깨가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 뭔가를 말하는지 윤산이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을 봤다. 한결이 그 반응에 만족한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나가 단백질 바를 씹으면서 민혁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지금 봤어?" "뭘." "산이 오빠 손. 강한결 옆에 있을 때 덜 파랬잖아. 저렇게까지 붙어 있는데 밀어내지도 않고." 민혁이 컵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잘못 봤겠지." "나 눈 좋거든." "날씨 때문에." "여름인데." 민혁이 무심하게 넘기려 했지만, 고구마를 씹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난로 쪽을 향해 있었다. 한결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윤산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한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루나는 민혁의 굳은 얼굴을 살피다 조용히 시선을 거두고 견과류 봉지를 뜯었다. 같은 시각, D.A.B 수사본부. 고진혁이 태블릿을 내려놓으면서 파일 하나를 펼쳤다. 강한결. 사진과 기본 정보 아래로 1단계 스캔 결과가 붙어 있었다. 오라클 스캔. 노이즈 완전 부재.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 앉아 있던 수사관이 물었다. "다시 검토하시는 겁니까?" "응." "검사 결과는 이상 없음으로 나왔는데요. 일반인 범주 중에서도 가장 깨끗한 수치입니다." "그래서 보는 거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감정적 파동이나 생체 노이즈 조차 없다는 건, 완벽하게 지워졌거나 아니면..." 고진혁이 사진을 봤다.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카메라 렌즈를 꿰뚫어 보는 듯한 너무나 여유로운 표정. 오라클이 읽어야 할 신호가 처음부터 없었다. 일반인은 미세하게라도 나온다. 어떤 능력자도 저렇게 깨끗하게 나오지 않는다. 저 남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혹은 오라클 자체를 기만하고 있거나. "헌터 투입할게. 두 명. 조용히 꼬리만 밟아." 수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진혁이 파일을 덮으면서 창밖을 봤다. 도심의 불빛들이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 시각, 수사본부 안쪽 방. 서류 더미 위에서 막대사탕을 핥고 있던 백설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코끝이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창문도 없는 방이었다. 환기도 안 되는 공간이었다. 근데 뭔가가 왔다. 바람이 아니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냄새. 공기 중에 흩뿌려진 달콤하고도 진득한 능력의 향취였다. 백설이 막대사탕을 바닥에 던졌다. 기지개를 켜듯 팔을 머리 위로 뻗자 뼈마디가 우두둑 소리를 냈다. 어린 얼굴에 기괴할 정도로 광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시선이 허공을 뚫고 아주 먼 곳을 향했다. 아직 좌표는 특정되지 않았다. 근데 방향은 알았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그리고 아주 강했다. 지금까지 맡아본 것 중에 제일. 늘 허기졌던 백설의 배를 채워줄 만한 맛있는 멋잇감이었다. 문이 열리면서 고진혁이 고개를 들었다. "백설, 어디 가." "나갔다 올게." "지금 헌터 투입 중이야. 넌 대기해." "팀장님이 찾는 거랑 내가 찾는 거 달라." 백설이 코트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고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뭘 찾은 거야." "맛있는 거."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백설이 복도로 나갔다. 발걸음이 소풍 가는 아이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백설이 지나간 자리마다 바닥 타일이 미세하게 바스러지면서 검게 변하고 있었다. 고진혁이 그 자리를 내려다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 강한결이 그 이질적인 파동을 감지한 건 오후 세 시 무렵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훑는 척하던 그는, 아주 얕게 열어둔 동기화 채널을 통해 건물 외부의 데이터 흐름을 스캔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따라붙던 헌터 두 명의 기척이 선명해졌다. 그들의 거친 호흡과 금속성 장비의 진동이 신경을 긁었으나, 그에게 헌터의 접근 따위는 긴장감보다는 귀찮음을 불러일으키는 사소한 소음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잡힌 또 다른 파동은 결이 전혀 달랐다. 헌터들보다 훨씬 작고 조용했지만, 주변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는 듯한 기묘한 밀도였다. 마치 공간 자체가 진공으로 변하는 것 같은, 모든 것을 포식하기 위해 수렴하는 파동. 그 서늘한 굶주림이 강한결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한결은 보고서 위로 시선을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거 백설이네.’ 백설의 방향은 서울 도심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아직 거리는 멀었지만, 그 섬뜩한 궤적은 분명히 이 건물을 종착지로 삼고 있었다. 한결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가 다시 무심한 얼굴로 서류에 시선을 내렸다. {대리님.} 윤산의 머릿속에 한결 목소리가 물결처럼 잔잔하게 흘러들어왔다. 윤산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망막 메세지로 답했다. [무슨 일입니까.] {백설이 움직였어요.} 정적이 짧게 흘렀다. 윤산의 타이핑 소리가 아주 잠시 멈췄다. [누굽니까.] {DAB가 숨겨놓은 병기 같은거예요. 코드네임 이터. 능력자 냄새 맡는 데 특화된 애인데, 지금 이쪽 방향이에요.} [원시인 씨 파동 때문입니까.] {거의 확실해요. 어제 훈련에서 파동이 꽤 컸으니까요.} 정적이 짧게 감돌았다. 윤산이 창밖으로 시선을 옮기자 보고서를 보고 있던 한결이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두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이 대화를 하는 사람이 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얼마나 위험합니까.] 한결이 잠깐 생각했다. 그의 시선이 윤산의 얼굴을 훑었다. {원시인 형이 제어가 안 된 상태에서 또 터지면, 백설이 그 냄새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어요. 그럼 여기까지 올 거예요.} [막을 방법이 있습니까.] 한결은 보고서 너머로 창밖을 보는 윤산의 차가운 옆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짙은 소유욕이 스쳤다가 가라앉았다. {방법이야 있죠. 대신, 대리님이 저를 믿어야 해요.} 윤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거절이 아니라는 걸 한결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한결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 6화. 타깃 # 헌터 두 명이 로비를 통과한 건 오후 네 시였다. 강한결이 이질적인 파동을 느낀 건 그보다 조금 먼저였다. 보고서를 넘기던 손끝이 멈췄다. 건물 아래쪽에서 탁하고 무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복 차림에 파견 사원증까지 갖췄지만, 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살의는 직장인의 것이 아니었다. 목적이 너무 선명했고 방향이 이 층, 한결이 있는 곳 이었다. 한결이 보고서를 덮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에 걸리는 신호는 두 개였다. 감각 계열 하나, 추적 계열 하나. 그리고 둘 다 타깃이 강한결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한결이 자연스럽게 윤산의 책상 옆에 멈춰 섰다. 윤산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볼일 있습니까." "있죠." 한결이 책상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며 창밖을 봤다. 입가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한 미소를 띄운 채였다. {헌터 두 명이 올라오고 있어요. 타깃이 저에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윤산의 손가락이 서류 위에서 멈췄다. 그의 시야 막 너머로 한결의 여유로운 옆얼굴이 들어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어떻게 할 겁니까.] {대리님은 모르는게 좋아요.} 잠깐 정적이 흘렀다. 윤산이 고개를 들어 한결을 봤다. 한결은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동자 속 보랏빛 인광이 아주 찰나에 스쳤다 사라졌다. 이미 어떻게 할지 전부 정해놓은 얼굴이었다. {근데 대리님, 나가기 전에 한 가지만요.} [뭡니까.] {제가 없으면 또 추우실 것 같아서요.} 윤산이 입을 열기 전에 한결이 몸을 기울였다. 책상 모서리에 기댄 채로 윤산 쪽으로,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윤산의 볼에 한결의 체온이 섞인 숨결이 닿았다. 아주 얕은 동기화였다. 숨을 내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결의 뜨거운 열기가 윤산의 차가운 피부 위로 번지기 시작했다. 목 뒤 부터였다. 차갑게 굳어 있던 감각이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윤산이 그 온기에 움찔하는 순간, 한결이 이미 몸을 펴고 있었다. "다녀올게요."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서두르지 않았고 긴장한 기색도 없었다. 그냥 잠깐 커피라도 타러 자리를 비우는 사람 같았다. 사무실 문이 닫히는 걸 보면서 윤산이 서류를 쥔 손등을 내려다봤다. 따뜻했다. 한결이 없는 자리에서 그의 열기만이 남아 있었다. 복도 끝 비상구로 꺾어지는 지점은 인적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두 사람을 한결이 먼저 맞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손을 내미는 그의 눈빛은 한없이 선량하고 무해해 보였다. "혹시 파견 오신 분들이에요? 저는 신입이에요. 어느 팀 가세요?" 두 사람이 나오는 순간 자신에게 이미 스캔을 걸어왔다. 한결이 그걸 느끼면서 자신의 신호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주변 일반 직원들 사이에 완전히 섞이도록. 찢어진 눈을 가진 남자가 미간을 잠깐 좁혔다가 폈다. 공백. 읽혀야 할 게 없었다. "기술지원팀이요." "저도 거기예요. 같이 가시죠." 한결이 앞장서면서 자연스럽게 비상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인적 없는 복도로 들어서는 동안 한결은 두 사람의 신경계를 천천히 짚었다. 마치 악보를 훑는 지휘자처럼. 체온 조절 중추. 시각 처리 영역. 판단 회로. 걸음.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멈췄다. 찢어진 눈의 남자가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갔다. 다른 남자가 벽에 손을 짚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건 느끼는 것 같은데, 자신들의 뇌가 이미 침식당했다는 사실은 특정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한결이 뒤를 돌아봤다.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결의 싱크가 한 단계 더 깊어졌다. 뇌 전체가 끓는 점을 넘어버리는 감각이었다. 실제 체온이 오른 게 아니었다. 뇌가 스스로를 태우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강제 동기화였다. 시야가 뒤틀리면서 두 사람의 눈에 서로의 얼굴이 죽여야 할 타깃으로 겹쳐졌다. 서로를 봤다. 서로의 얼굴에서 비웃고 있는 강한결의 환각이 보였다. 한결이 비상구 문을 닫기 직전, 등 뒤에서 둔탁한 타격음과 짧은 비명이 들렸다. 살점이 터지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메아리쳤지만, 한결은 그 비명이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 헌터들은 탕비실의 커피믹스보다 못한 의미없는 물건에 불과했으니까. 손바닥 안쪽이 뜨거웠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한결은, 윤산에게 생각을 흘려보냈다. {대리님.} [어디 있습니까.] {계단이요. 금방 가요. 저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으세요.} [헌터는.] {처리됐어요. 서로 사이가 너무 좋아서 탈이더라구요.} 한참 뒤에야 답이 왔다. [어떻게 했습니까.] {대리님껜 비밀이에요.} 더 이상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한결이 손잡이를 짚으면서 창밖을 잠깐 봤다. 햇빛이 강했다. 한여름 오후였다. 저 위 어딘가에서 고진혁이 미쳐 날뛰며 보고를 기다리고 있겠지. 원인 불명. 증거 없음. 의심은 하겠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한결이 셔츠 소매를 한 번 고쳐 잡았다. 복도가 평온했다. 직원들이 오가고 있었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자리로 걸어가면서 윤산 책상 옆을 지나쳤다. 윤산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한결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대리님, 저 좀 뜨거운데요." 윤산이 고개를 들었다. "대리님으로 식혀야겠어요." 윤산이 반사적으로 거절하려 입술을 뗐지만 한결은 이미 자기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고서를 펼치는 손이 너무나 평온했다. 방금 헌터를 처리하고 온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윤산은 시야 막을 올려 한결을 훑었다. 하지만 돌아온 남자는 여전히 깨끗한 공백이었다. 능력의 흔적도, 죄책감도, '가림막' 너머로는 읽히지 않았다. 윤산이 그 옆 얼굴을 잠깐 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한결이 남기고 간 열기 때문인지, 손끝이 점점 따뜻해졌다. 백설의 위치가 달라진 걸 한결이 느낀 건 보고서를 절반쯤 넘겼을 때였다. 아까까지 도심 외곽이었다. 막연하게 이쪽 방향이라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달랐다. 포위망이 훨씬 좁혀졌고 훨씬 선명해졌다. 추적의 끝은 원시인이었다. 한결이 보고서를 덮으면서 창밖을 봤다. 한여름 오후 햇빛이 건물 유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하지만 백설이 일단 냄새를 특정하면 속도가 붙었다. 오늘 안에 이 건물 근처까지 올 가능성이 충분했다. 한결이 싱크를 펼쳤다. {대리님, 백설이 원시인 형 쪽으로 좁혀오고 있어요.} 윤산의 답이 바로 왔다. [얼마나요.] {지금 속도면 퇴근 전에 건물 반경 안까지 들어올 것 같아요. 백설 코가 한 번 방향 잡으면 잘 안 틀려요. 집요하거든요.}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멈췄다. 한결이 윤산 쪽을 슬쩍 봤다. 윤산이 모니터를 보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원시인 씨를 먼저 내보내야겠군요.] {그리고 능력 차단이 필요해요. 시인형은 아직 능력을 완전히 제어할수가 없어요. 조금씩 새어 나올꺼고 백설은 그 냄새를 놓치지 않을꺼에요. 다른 쪽에 연락해야 해요.} [언리드 쪽입니까.] {네.} 윤산이 잠깐 말이 없었다. 한결은 그 침묵이 거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뜩찮지만 선택지가 없다는 걸 계산하는 침묵이었다. [연락하세요.] 한결이 손목 단말기를 열었다. 암호화 채널로 메시지를 보냈다. — 지금 필요해. 답이 거의 즉각 왔다. — 위치. 원시인이 퇴근하라는 말을 들은 건 다섯 시가 채 되기 전이었다. 윤산이 책상 앞에 서서 시인에게만 들리도록 낮게 말했다. "지금 바로 퇴근하세요. 다크섹터로 가십시오.” 원시인이 모니터에서 눈을 들었다. "네? 아직 마감 보고서가 남아있는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갑자기요?" "가시면 압니다." 원시인이 윤산을 봤다가 한결을 봤다. 한결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빨리 가라는 뜻이었다. 원시인이 영문을 모른 채 가방을 집어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겠는데 두 사람 사이 공기가 설명을 요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원시인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옆에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후드 집업에 반바지. 후드를 눌러써서 얼굴 절반이 가려졌고 보이는 쪽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이어폰은 한쪽만 꽂은 채 껌을 씹고 있었는데 졸린 건지 원래 저런 눈인지 구분이 안 됐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딱히 원시인을 의식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기력해 보이는,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동시에 탔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 사람이 이어폰을 천천히 뺐다. "원시인 씨." 목소리에 감정 기복이 없었다. 낮고 건조해서 문장 끝이 어디인지 알아채는 데 한 박자 걸렸다. "저 아세요?" "한결이 보냈어요. 제로라고 하면 돼요." 원시인이 제로를 봤다. 말투도 표정도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언리드라는 건 느낌으로 왔다. 제로가 껌을 한 번 씹으면서 원시인의 흉골 아래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씨앗이 있는 자리. "귀찮으니까 한번에 막을게요." "네? 뭘 막는다구요?" "능력이요. 임시에요. 오늘 밤 정도. 그 이상은 장담 못 해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제로가 손을 들었다. 특별히 뭔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냥 손끝으로 공기를 가볍게 튕겼을 뿐인데, 원시인의 흉골 아래 어딘가에서 뭔가가 조용히 꺼지는 감각이 왔다. 심장 옆에 붙어 있던 작은 전구가 소등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몸이 이상하게 가벼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허전한 것 같기도 했다. 며칠 됐다고 벌써 익숙해진 건지, 없어지니까 오히려 낯설었다. "방금 뭘 한 거예요." "막은 거요." "어떻게요." "그냥이요." 원시인이 더 물으려는데 제로가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대화 끝이라는 뜻 같았다. 창밖을 보면서 껌을 씹는 옆얼굴이 마치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 같았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추면서 문이 열렸다. 제로가 먼저 내리면서 원시인 쪽을 보지 않고 말했다. "따라오세요. 빨리요. 퇴근하고 싶으니까." 원시인이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저 사람,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 다크섹터 문을 여는 순간 모기향 냄새가 먼저 훅 풍겨왔다. 발밑에 흙길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논둑 위로 하늘이 넓게 열려 있었다. 1980년대 즈음의 시골 여름 저녁이었다. 귀뚜라미 소리 사이로 멀리서 개구리 울음이 섞여 들어왔고 평상 위에는 잘 익어 반으로 쪼개진 수박이 놓여 있었다. 플라스틱 날개가 달각달각 소리를 내는 선풍기 하나가 평상 쪽으로 미지근한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원시인이 멈칫했다. "이번엔 농촌이에요." "여름이잖아, 당연히 농촌이지." 평상에 퍼질러 앉은 민혁이 수박을 쪼개면서 말했다. 흰 러닝에 면 반바지,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였다. 루나는 평상 한쪽에 걸터앉아 선풍기 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원시인이 안으로 들어서다가 뒤를 돌아봤다. 제로가 들어오면서 주변을 한 바퀴 무심하게 훑더니 평상 아래 그늘에 그냥 주저앉았다. 벽에 등을 기대고 이어폰을 다시 꽂은 채 눈을 반쯤 감았다. 민혁이 수박 한 조각을 내밀자 쳐다보지도 않고 손을 뻗어 받았다. 한 입 베어 물면서 씹었는데 달다는 반응도 맛없다는 반응도 없었다. 그냥 씹었다. 한결이 논둑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있었는데, 농촌 한여름 저녁이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비주얼이면서도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윤산이 평상을 보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결이 평상 한쪽에 앉으면서 윤산 옆으로 자연스럽게 붙었다. 거리가 가까워서 둘의 어깨가 겹쳐질것 같았다. 윤산이 한결을 봤다가 앞을 봤다. 한결의 열기가 다시 스며들자, 윤산의 손끝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민혁이 윤산과 한결을 보곤 수박을 씹다 내려놨다. 루나가 그 옆 얼굴을 슬쩍 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수박 한 조각을 집어 민혁 앞에 내밀었다. 민혁이 받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귀뚜라미가 울었다. 루나가 평상 아래 그늘에 주저앉아 있는 제로를 내려다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후드를 눌러쓰고 이어폰 꽂은 채 눈이 반쯤 감겨 있는 게 자다가 끌려온 사람 같았다. "저 사람 누구야." 루나가 한결한테 물었다. "제로요. 언리드." 한결이 평범하게 말했다. 루나의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민혁도 제로를 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언리드라는 말이 나오자 표정이 조금 굳었다. 제로가 이어폰을 한쪽 뺐다. 루나를 봤다가 민혁을 봤다가 다시 이어폰을 꽂으려는데 민혁이 먼저 말했다. "뭘 할 수 있어." "차단이요." "백설 상대로." "오늘 밤은요." "그 다음은." "그건 형들이 알아서 해야죠." 민혁이 미간을 좁혔다. 제로가 그 표정을 보면서 이어폰을 다시 꽂으려는데 루나가 손을 뻗어 막았다. "잠깐, 대가가 뭐야. 능력 쓰면 뭘 치러." 제로가 루나를 봤다. 잠깐 뭔가를 재는 것 같더니 짧게 말했다. "감각이요." "감각?" "쓸수록 무뎌져요. 맛이든 온도든 통증이든." 아까 수박을 씹던 장면이 떠올랐다. 달다는 반응이 아예 없었던 게 그거였구나 싶었다. 루나가 더 뭔가 물으려는데 제로가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이번엔 막지 않았다. 민혁이 수박씨를 뱉으면서 한결을 봤다. "작전이 뭐야." "현재 두 단계예요." 한결이 무릎에 팔을 걸치면서 말했다. "일단 오늘 밤은 제로가 원시인 형 능력 흔적을 차단해요. 백설이 냄새를 잃어버리게 하는 거죠. 근데 이건 임시예요. 내일부터는 제 동기화로 형 흔적을 여러 군데로 분산시켜요. 백설이 진짜 위치를 특정 못 하게 노이즈를 만드는 거예요." "그것도 임시잖아." "맞아요." "근본적인 방법은." "아직 없어요." 민혁이 수박을 내려놓으면서 뒤통수를 긁었다. 루나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백설이 한 번 방향 잡으면 안 놔. 나 걔 알아. 노이즈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어. 걔 코가 얼마나 예민한지 알면 그런 소리 못 해." "알아요. 누나." 한결이 루나를 봤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어느정도까지는 능력을 공유해야 해요. 숨기지 말고. 백설이 원시인 형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기 전에 판을 새로 짜야 해요." 평상 위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풍기가 달각달각 돌아갔다. 저 멀리 논둑 위로 어스름이 내려오고 있었다. 원시인이 손을 들었다. "저 그냥 회사 그만두면 안 돼요? 그러면 백설이 못 찾지 않을까요." 민혁이 원시인을 봤다. "백설은 회사 주소 보고 오는 게 아니야." "아." "네 냄새 맡고 오는 거야." "...아." "그러니까 네가 어디 있든 상관없어." 제로가 평상 아래에서 눈을 반쯤 떴다. 원시인을 잠깐 봤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움직임이 너무 조용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윤산이 말했다. "방법을 찾는 동안 원시인 씨는 능력을 쓰면 안 됩니다. 흔적이 생기면 제로가 막는 속도보다 백설이 쫓는 속도가 빠를 수 있어요." "그럼 훈련은요." "잠시 중단입니다."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민혁이 수박 한 조각을 더 건넸다. "네 잘못 아니야." 민혁이 먼저 말했다. 원시인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다 써있어. '나 때문에 다들 고생하네' 라고. 먹어, 수박." 수박 한 조각이 날아왔다. 원시인이 받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았다. 이상하게 그 단맛에 긴장이 좀 풀렸다. 귀뚜라미가 울고, 선풍기가 달각달각 돌아갔다. 한결이 윤산 옆에 붙은 채, 논둑 쪽 어스름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대리님." 윤산이 한결을 봤다. "방법 찾을게요." 윤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이 앞을 보는 사이, 윤산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레 한결의 어깨 쪽으로 아주 조금 몸이 기울었다. 어깨가 여전히 닿을 듯 말 듯 가까웠다. 윤산은 그 거리를 좁히지도 않았고 멀어지지도 않았지만, 한결에게서 전해지는 열기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손끝이 따뜻한 채로 한참이 지났다. 한결의 암호화 채널에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언리드 본부. — 백설 외곽 훑고 시내 진입. 한결이 단말기를 덮으면서 윤산 쪽을 봤다.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어스름이 논둑 위로 완전히 내려앉았다. # 7화. 상쇄 # 작전 브리핑이라고 부르기엔 분위기가 너무 엉망이었다. 다크섹터 평상 위에 민혁이 손으로 그린 약도가 펼쳐져 있었다. 어젯밤 능력 공유 후 급하게 그린 티가 역력했다. 볼펜 자국이 번진 종이 위로 회사 건물과 원시인 집, 다크섹터 입구가 구불구불한 선으로 연결돼 있었고 중간중간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이쪽에 통로 깔아둘 거야." 민혁이 다크서클이 눈 밑에 짙게 내려온 채,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짚으면서 말했다. "통로가 뭔데요." "은닉 공간이야. 내가 만든 통로 안으로 들어오면 외부에서 감지가 안 돼. 백설이 냄새를 쫓아와도 통로 안에서는 읽히는 게 없어. 차원을 잠시 접어 놓은거라고 생각하면 돼." 원시인이 약도를 내려다봤다. "선이 좀 구불구불한데요." "직선 통로가 도심에 갑자기 생기면 이상하다고. 공간의 왜곡을 감추려면, 자연스럽게 골목이나 건물 사이를 따라 만드는 거야. 내 미적 감각 문제가 아니라고." "아, 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라 '형 진짜 천재예요'라고 해야지." "대단해요, 천재형." "됐어. 영혼 좀 담아라." 루나가 손을 들었다. "난 페로몬 범위가 반경 오십 미터야. 백설이 그 안으로 들어오면 냄새 감각 자체를 교란시킬 수 있어. 다른 냄새들이 전부 뒤섞여서 시인 오빠 냄새를 특정 못 하게 되는 거지. 꽃 향기랑 음식물 쓰레기 냄새를 강제로 버무려버릴 거거든." "오십 미터면 충분해?" "충분해. 나 범위 꽤 넓거든? 제대로 쓰면 이 구역 사람들 전부 취해서 헤롱거리게 만들 수도 있어." 루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민혁이 약도에 뭔가를 추가로 적으면서 한결을 봤다. "너는." "저는 지나가는 일반인들한테 시인 형 파동을 분산시킬 거예요. 백설이 따라갈 수 있는 흔적을 여기저기 흩어놓는 거죠. 진짜를 찾으려면 한 명 한 명 다 확인해야 하니까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수천 개의 가짜 미끼를 던지는 셈이죠." "인원이 많아질수록 발열이 심해지잖아." "그래서 대리님이 제 옆에 있어야 해요." 한결이 약도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윤산이 한결을 봤다. 그의 시선이 한결의 눈에 머물다 떨어졌다. "저는 원시인 씨 위에 이미지를 덮겠습니다. 백설 눈에 다른 사람으로 보이도록. CCTV 데이터도 실시간으로 덧씌울 겁니다. 제로 씨는 능력 차단 유지해주시면 됩니다." 제로가 이어폰 한쪽을 빼면서 말했다. "알아서 해요." 그러고는 이어폰을 다시 꽂았다. 껌을 씹으면서 눈을 반쯤 감았다. 민혁이 그 모습을 봤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리드 애들은 다 저래?" "저만 이래요." 제로가 이어폰을 빼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들었는지 몰랐다. 그의 무심한 대답에 민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작전은 출근 시간인 아침 여덟 시, 강남역 11번 출구 인근에서 시작됐다. 윤산은 본사에 "외부 현장 점검" 보고를 올린 뒤, 인파 속에 섞인 원시인이 지하철 개찰구를 빠져나오는 찰나, 윤산이 이미지 레이어를 덮어씌웠다. 평범한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이었던 원시인의 외형이 조용히 바뀌었다. 하얀 셔츠에 슬랙스, 얼굴선이 조금 다르고 머리 색이 약간 밝아진, 같은 회사 다른 직원처럼 보이는 수준이었다. 원시인이 어색한 듯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저 지금 어떻게 보여요?" "평범한 직장인이요." "원래도 평범한 직장인인데요." "더 평범하게요." 원시인이 한결의 농담 섞인 지시를 받으며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윤산은 주변 CCTV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덧 씌우며 원시인의 바뀐 외형을 유지했다. 출근 시간대의 막대한 유동 인구를 전부 필터링하며 고정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평소보다 두 배 가까운 소모였다. 칠월의 아침 햇살이 뜨거웠지만, 윤산의 손등 위엔 이미 하얀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한결이 통화하는 척 걷는 사람, 편의점에서 나오는 사람,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원시인의 흔적을 아주 얕게 분산시키고 있었다. 한 명이 아니라 동시에 여러 명. 한결이 내뱉는 숨이 델 듯이 뜨거웠다. 눈동자 속 보랏빛 인광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일렁였다. 발열이 올라오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루나는 회사 건물 맞은편 카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면서 반경 오십 미터에 페로몬을 깔고 있었다. 꽃집 냄새, 사람들의 땀냄새, 빵집 냄새, 쓰레기 냄새에 여름 아스팔트 냄새까지 전부 뒤섞이며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해 군중 소음을 더 크게 만들었다. 이유 없는 짜증과 고취된 기분 사이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하며 거리를 메웠다. 민혁은 도심 골목 곳곳에 통로를 깔면서 동시에 여러 지점을 유지하고 있었다. 통로 하나를 만들 때마다, 그의 팔 근육이 눈에 띄게 수축하며 뼈마디가 드러났다. 주머니에서 단백질 바를 꺼내 한 입 베어 물며 다음 지점으로 이동했다. 오후가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결이 분산시켜야 할 인원이 점심 이후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도심 유동 인구가 많아지면서 흩어놓아야 할 범위가 넓어진 거였다. 발열이 통제선을 넘기 시작했다. {대리님, 저 좀 위험해요.} 윤산의 답이 바로 왔다. [얼마나요.] {지금 당장 문제는 아닌데 이 상태로 저녁까지 버티기는 힘들 것 같아요. 대리님이랑 붙어있어야 해요.} [어디서요.] {민혁 형 통로 안에서요. 지금 바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알겠습니다.] 민혁이 깔아둔 통로 중 하나는 강남 중심가 건물 외벽 사이에 있었다. 밖에서 보면 그냥 쓰레기봉투 몇 개가 굴러다니는 좁은 골목이었다. 근데 안으로 들어오면 달랐다. 소음이 칼로 자른 듯 잘렸다. 도심 한복판인데 조용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공간. 윤산이 먼저 들어오고 한결이 뒤따라 들어왔다. 평균 보다도 훨씬 큰 성인 남성 둘이 서 있기엔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았다. 한결이 벽에 등을 기대면서 말했다. "대리님, 앉으세요." "왜요." "앉으시면 알아요. 저 지금 진짜 급하거든요." 윤산이 말없이 벽을 등지고 앉았다. 한결이 그 뒤로 자리를 잡으면서 말했다. "대리님, 어쩔 수 없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결이 윤산 뒤에서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윤산의 등이 한결의 단단하고 뜨거운 가슴에 닿았다. 한결의 허벅지 사이에 윤산이 가두어지듯 앉은 구도였다. 한결의 열기가 등 전체를 타고 맥박처럼 번지는 감각이 왔다. 윤산의 몸이 전기라도 오른 듯 뻣뻣하게 굳었다. "강한결 씨." "우리 둘 다 살려면요. 조금만 참아요. 저 진짜 뜨거우니까." 한결이 싱크를 아주 조심스럽게 걸었다. 윤산의 얼어붙은 혈관과 자신의 끓어오르는 신경이 서로를 상쇄하는 방식으로. 윤산의 차갑던 손끝이 천천히 온기를 찾아왔다. 한결의 귀 뒤쪽 붉은 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골목 밖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통로 안은 오직 서로의 심장 소리만 들릴 만큼 조용했다. 윤산은 정면의 벽만을 응시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한결의 고른 숨소리가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온기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게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냥 머릿속이, 그리고 가슴께가 이상했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는데 능력을 과하게 써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 너머로 한결의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그를 통해 전해지는 규칙적인 고동과 좁은 틈새를 메우는 남자의 짙은 체향이 물씬 느껴졌다. 윤산의 귀 끝이 한결의 열기보다 더 붉게 달아올랐다. 한결이 그걸 느꼈다. 윤산의 귀 끝이 붉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발열이 전이된 건 아니었다. 산의 수줍은 반응에 웃음이 나오려는 걸 입술을 깨물면서 참았다. "대리님." "네." "불편하세요?"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저는 아주 좋은데." 윤산이 더 말하지 않았다. 한결도 말을 잇지 않았다. 통로 안은 밀폐된 서로의 체온만이 가득했다. 같은 시각, 을지로 반대편 골목. 민혁이 다음 통로 지점을 설치하다가 멈췄다. 자기 통로 안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특별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능력 잔열이 두 개 겹쳐있는 감각이었다. 차가운 것 하나, 뜨거운 것 하나. 서로가 서로를 상쇄하고 있었다. 민혁이 단백질 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좋은 일이었다. 발열이 잡히면 한결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저체온이 잡히면 윤산이 더 많이 쓸 수 있었다. 작전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혁이 다음 지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좋은 일이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단백질 바가 가루처럼 으스러지며 목구멍을 텁텁하게 긁고 내려가는지 알 수 없었다. 단맛은 커녕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다. 민혁은 씹던 단백질바를 뱉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헤집었다. 해가 기울며 한결의 단말기에 언리드 본부 메시지가 떴다. — 백설 도심 외곽으로 이동 중. 방향 전환한 것으로 보임. "대리님, 백설이 외곽으로 빠지고 있어요.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아직 좀 더 식혀야 해요." 한결이 더 깊게 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게 웃었다. 루나와 민혁에게 한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 나도 느껴. 페로몬 범위 조금씩 줄일게. 메세지를 확인한 민혁이 통로 유지 강도를 조금 낮추면서 단백질 바를 또 꺼냈다. 하루 종일 통로를 여러 개 유지하면서 소모가 극심했다. 피부 위로 드러난 핏줄이 비정상적으로 도드라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한결이 마지막 확인을 했다. — 백설 외곽 벗어남. 오늘은 끝. "대리님, 이제 능력 거둬도 돼요." 윤산이 시각화를 내리고 한결이 동기화를 풀었다. 민혁이 통로를 거두고 루나가 페로몬을 걷었다. 도심 한복판이 다시 평범한 골목으로 돌아왔다. 한결이 팔을 풀면서 윤산 옆으로 빠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단말기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언리드 본부. — 백설 방향 급변. 속도 붙음. 좌표 이동 중. 타깃 재설정. 한결의 눈동자 속 보랏빛 인광이 잘게 부서지며 차갑게 가라앉았다.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도심 한복판, 작전이 해제되어 무방비 상태인 원시인의 집이었다. "낚였어." 한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포식자가 이빨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8화. 무너지지 않는 온도 # 좌표가 바뀐 건 한 박자였다. 능력을 전부 거두고 한결이 팔을 풀려던 그 찰나, 손목 단말기가 찢어질 듯한 경고음과 함께 울렸다. 언리드 본부. 백설 방향 급변. 속도 붙음. 좌표는 원시인의 집. 처음부터 노렸던 거였다. 한결이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눈동자 안쪽 보랏빛 인광이 잘게 부서졌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외곽으로 빠지는 척, 우리가 능력을 풀 때를 기다린 거였다. 페로몬도 없고 통로도 없고 이미지 차단도 없는, 완전한 무방비의 순간을. 미친 포식자는 하루 종일 굶주린 채 이 순간만을 기다렸던 거다. 한결이 창백해진 윤산을 봤다. "원시인 형 집이에요. 지금 바로." 골목은 조용했다. 퇴근 인파가 쏟아지는 큰길에서 두 블록만 꺾으면 나오는 좁은 길이었다. 차 한 대 지나가기도 빡빡한 너비였고, 가로등은 오래전부터 절반이 나가 있었다. 원시인이 이 골목을 매일 쓰는 건 자취방까지 가는 가장 빠른 루트이기 때문이었다. 골목 끝에서 좌회전, 그다음 건물 사이 통로 하나만 지나면 집이었다. 원시인의 손목 단말기가 진동한 건 골목을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지금 집에 들어가지 마세요. 골목 끝에 멈추십시오.] 윤산의 메시지였다. 원시인이 숨을 들이키며 발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를 느꼈다. 느낀다는 표현이 맞는지도 몰랐다. 흉골 아래쪽에서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에 걸린 듯 반응하는 감각, 안쪽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이질적인 끌림. 골목이 기분 나쁘게 조용했다. 여름 밤 열기가 아스팔트에서 악취처럼 올라오고 있었고 가로등 하나가 지직거리며 깜박이고 있었다. 그리고 골목 끝, 어둠의 경계에 누군가 서 있었다. 사탕 씹는 소리가 먼저였다. 오드득, 오드득. 골목 정적을 깨는 리듬이 너무 태연해서 처음엔 인식하지 못할 뻔했다. 원시인이 걸음을 늦추는 순간, 벽에 기댄 작은 형체가 보였다. 분홍색 코트 자락이, 뜨거운 여름밤 골목에서 터무니없이 선명했다. 고스로리 스타일에 백은발 트윈테일, 진홍색 눈동자. 막대사탕을 입에 문 채 원시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먹잇감을 앞에 둔 뱀처럼 서늘했다. 원시인이 숨을 죽였다. 그 순간 흉골 안쪽이 크게 요동쳤다. 제로가 막았던 곳 아래쪽에서, 훨씬 깊은 곳에서, 뭔가가 화산이 터지듯 맹렬하게 올라왔다. 뱃속이 뒤집히는 느낌도 아니고 아픈 것도 아니었다. 그저 거대한 운명이 안에서 공명하는 것만 같았다. 백설의 진홍색 눈동자가 골목 쪽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찾았다." 목소리가 너무 나른해서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배가 고픈 사람이 눈앞의 만찬을 찾은 것처럼 당연한 말투였다. 백설이 막대사탕을 한 번 오드득 씹으면서 걸어왔다. 원시인이 등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면서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면 안 된다는 걸 본능이 먼저 알았다. 백설이 그 거리만큼 좁혀왔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음 보는 느낌이 아니었다. 흉골 안에서 요동치는 것이 저쪽에서 오는 것과 자석처럼 맞닿는 것 같았다. "아...맛있는 냄새." 백설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반쯤 감았다. 황홀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완전히 사냥하는 눈이었다. "멀리서 맡을 때보다 훨씬 더 진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냄새야, 오빠." 손이 뻗어왔다. 작은 손끝이 원시인의 가슴팍 쪽으로 향하는 찰나였다. 원시인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터졌다. 컨트롤이 아니었다. 이성이 반응한 게 아니었다. 흉골 훨씬 아래쪽에서 올라온, 살고자 하는 처절한 본능이었다. [삭제] 과정이 없어졌다. 손이 닿아야 할 찰나가 통째로 지워지면서, 다음 순간 백설은 골목 벽에 등을 붙이고 있었다. 비명도, 파열음도 없었다. 그저 존재해야 할 물리적 경로가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지워졌을 뿐이었다. 골목 바닥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올랐다. 빛을 삼킨 것 같은 균열이 하얗게,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공기가 뒤틀리면서 벽에 붙은 낡은 광고 스티커 한 장이 흔적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백설이 벽에서 등을 뗐다. "아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겁을 먹은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진짜 기쁜 것처럼 들렸다. 백설이 손등을 내려다봤다. 그곳에 묻은 능력의 잔재를 혀로 가볍게 핥으면서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뺨이 흥분으로 발그레했다. "이거 뭐야. 방금 그거 진짜야? 오빠꺼 끝이 없잖아,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게 있었어? 방금 내 블랙홀이랑 공명했어. 나 엄청 두근두근했다고." 비틀거리면서 다시 걸어오는 눈빛이 광기에 젖어 번뜩였다. "오빠 안에는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있어. 마치 무한한 진공 같은 거. 나 그거 전부 먹고 싶어." 원시인이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이었다. 가로등 하나가 지직거리며 파란색으로 부서졌다. 단순히 켜졌다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빛 입자 자체가 분해되면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골목 어둠 속에서 무거운 형체가 걸어왔다. 실루엣이 선명해질수록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소멸했다. 윤산이었다. 아니, 윤산이 아니었다. 얼굴은 윤산과 판박이였다. 날카롭고 서늘한 눈매, 높은 콧대, 창백한 피부. 그런데 압도적으로 컸다. 윤산보다 어깨가 한 뼘은 더 넓고 체형 자체가 달랐다. 단단하다는 말이 정확했다. 홍채 안쪽에서 형광 연청색 빛이 전자기적 글리치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걸음마다 주변 보도블록이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공중에 떠올랐다. 몸 전체에서 미세한 빛 입자가 새어 나왔다. 그 눈이 원시인을 향했다. "찾았다. Original Seed: Individual No.1."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것처럼 들렸다. 원시인을 보는 눈에 '생명체'에 대한 온기는 없었다.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완전 각성 이전에 분해한다." 손이 들렸다. 공중에 떠 있던 픽셀 파편들이 일제히 탄환처럼 방향을 잡았다. 분홍색 코트가 먼저 움직였다. "안 돼, 이건 내 야식이거든." 백설이 두 팔을 벌리며 원시인 앞에 섰다. 손에서 피어난 블랙홀의 압력이 픽셀 파편들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골목이 뒤틀리는 충격이 왔다. 두 개의 힘이 맞붙으면서 공간의 축이 비틀리는 감각이 골목 벽을 타고 울렸다. "저리 비켜, 고철 덩어리." 백설의 목소리는 여전히 나른했다. 그런데 눈빛은 달랐다. 포식자가 자신의 먹이에 다른 포식자가 달려드는 것을 경계하는, 살기 어린 눈이었다. "시인아!" 소리가 바로 옆에서 났다. 발밑 공간이 열렸다. 민혁 통로 특유의 감각, 소음이 잘리고 공기가 달라지는 것. 민혁이 원시인의 팔을 잡아채는 속도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골목 충돌음이 한 번 더 울리는 사이, 통로가 두 사람을 삼켰다. * 다크섹터의 문이 거칠게 닫혔다. 윤산과 한결이 이미 와 있었다. 민혁이 숨을 몰아쉬면서 원시인을 봤다. "시인아, 아까 그...산이를 닮았다는 녀석이 널 뭐라고 불렀다고?" "...Original Seed: Individual No.1. 이라고 했어요. 저를 분해해야 한다고..." 민혁의 미간이 칼로 벤 듯 깊게 패였다. 한결이 손목 단말기를 열었다. 암호화 채널. — 와줘. — 위치. 루나가 들어온 건 그로부터 오 분 뒤였다. 로즈골드 웨이브가 조명 아래서 흩어졌다. 루나는 문을 닫으면서 곧장 원시인 쪽으로 시선을 줬다. 훑고, 민혁을 보고, 윤산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 쪽에 자리를 잡았다. 한결이 단말기를 두 번 두드렸다. 그 다음 들어온 사람은 이질적일 정도로 느긋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조차도 여유로웠다. 나이는 30대 정도. 느슨하게 푼 셔츠에 뒤로 묶은 머리. 입꼬리에 걸린 미스테리한 웃음. 한결을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원시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안이에요." 원시인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조용히 물었다. "손목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여유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원시인이 홀린 듯 손을 내밀었다. 이안의 손이 원시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검지 끝이 맥박 뛰는 자리에 닿았다. 처음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소리가 먼저 왔다. 잡음이었다. 오래된 LP판이 돌아가는 것 같은, 바늘이 홈을 긁는 것 같은 소리가 공간 전체에 낮게 깔렸다. 형광등이 한 번 깜박였다. 그리고 원시인의 손목 위 허공에서, 아주 천천히, 수만 개의 빛 입자가 결을 이루며 떠올랐다. 손목 위로 떠오른 화면은 끝이 보이지 않는 하얀 방이었다. 그 중심, 거대한 원통형 수조 속에 네 살 남짓한 아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의 작고 가냘픈 몸에는 수천 개의 AD 칩이 신경계의 흐름을 따라 벌레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고, 투명한 전선들이 아이의 뇌세포 하나하나에 연결되어 있었다. "저게... 나라고?" 당대 기술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오버 테크놀로지의 산물. 연구원들은 수조 속 아이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모니터를 보며 무미건조하게 소리쳤다. "Original Seed: Individual No.1. 생체 신호 안정적. 연산 가동률 98%. 인류 최초의 인간 데이터 세트, '원.시.인'의 코어 동기화를 시작한다." 으뜸 원(元), 처음 시(始), 사람 인(人). 그것은 부모가 지어준 축복이 아니라, 오라클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첫 번째 부품이자 '뿌리'임을 증명하는 일련번호였다.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유독 이질적인 장면이 비쳤다. 다른 연구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명의 남녀 연구원이 수조 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AD 테크 소속 연구원이었으나, 수조 속에 갇힌 아이를 보며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들의 어린 아들을 떠올렸다. 기술자로서의 명분보다 인간으로서의 양심이 앞선 순간이었다. 영상을 보던 한결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한결은 그들의 얼굴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뇌에 각인되어 있었다. 기억엔 없는, 사진으로만 보았던 자신의 '부모'였다. 슬픔이나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살해당했다던 부모에 대한 힌트를 찾은 기분이었다. 한결의 눈동자 속 보랏빛 불꽃이 일렁이며 입꼬리가 작게 올라갔다. 그들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생체 신호를 조작했다. 시스템에 의도적인 '취약점'을 심어, 오라클이 완성되기 직전, 아이가 시스템 밖으로 튕겨 나갈 수 있도록 설계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조금만 버티렴. 곧 끝날 거야." 여성 연구원이 입술을 깨물며 소리 죽여 울었다. 그녀의 눈물이 수조의 유리창에 얼룩을 남겼다. 아이는 기억했다. 차가운 유리 너머로 느껴지던 그들의 애처로운 시선과, 유일하게 자신을 '생명'으로 대해주던 그 온기를. 그때,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수조 속 아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디스플레이가 붉게 물들며 연구원들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코어의 자아 데이터가 시스템 로직을 거부합니다! 루트 권한(Root Access)이 유출되고 있어! 독립된 시스템으로 튕겨 나간다! 시드 데이터의 물리적 이탈을 막아!!" 아이가 고통에 겨워 입을 벌렸지만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아이의 몸을 통과하는 연산 로그가 현실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오라클 시스템이 완성되려는 임계점. 아이의 심장 박동이 멈춘 그 찰나의 순간, 아이가 가진 [관리자 권한]이 전 세계의 네트워크를 타고 송출되었다. AD 칩을 이식받은 전 세계 사람들 사이 소수의 잠재적 능력자들의 뇌 회로가 동시에 타올랐다. 누군가는 불을 뿜었고, 누군가는 공간을 비틀었다. 2026년 현재, 능력자들의 뿌리는 바로 22년 전 수조 속에서 죽어갔던 네 살배기 아이의 데이터였다. 이안의 손가락이 맥박 위에서 아주 살짝 움직였다. 영상의 배경이 바뀌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한복판. 공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더니 하얀 빛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심에 발가벗겨진 채 온몸에 상처가 가득한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기겁하며 아이를 흔들었다. "얘야! 꼬마야! 정신 차려봐! 이름이 뭐니?" 초점이 없는 아이의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아이는 쩍쩍 갈라진 입술을 간신히 뗐다. "...원...시...인..." 이안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현재에 가까운 시퀀스로 끌어왔다. 그리고 골목이 나왔다. 오늘 밤의 골목이었다. 가로등 하나가 파란빛으로 부서지면서, 어둠 속에서 형체가 걸어왔다. 원시인보다 어깨 한 뼘이 넓은 체격, 걸음마다 픽셀이 분해되어 떠오르는 것, 홍채 안쪽 형광 연청색 글리치. 그 얼굴이 빛 속에서 선명해졌다. 안전가옥 안으로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안이 손가락을 멈췄다. 영상이 그 얼굴에서 일시정지됐다. 정지된 영상 속 남자의 눈동자 위로 푸른색 노이즈가 가로질러 지나갔다. 살아있는 인간의 생기 대신,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살의만이 픽셀 입자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거대한 홀로그램이 허공에 그대로 매달렸다. LP판 잡음이 낮게 깔린 채였다. 윤산이 굳었다. 소리가 없었다. 평소에 어떤 상황에서도 유지하던 표정이 마치 부서진 가면처럼 날아갔다. 남은 게 없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 올라간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하얗게 굳어가고 있었다. 능력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밑바닥부터 긁어내는 듯한 충격이 능력 회로를 강제로 역류시키고 있었다. "강이 형...? 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형이 왜 저기에... 왜 저런 모습으로..." 떨리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손등 위로 하얀 서리가 피어오르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 의자를 밀고 일어서려던 윤산의 무릎이 꺾였다. 그가 바닥으로 추락하기 전, 강한결이 움직였다. 한결이 움직이는 데는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한결은 하얗게 얼어붙어 가는 윤산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강하게 겹쳐 올렸다. 22년만에 찾게 된 영상 속 부모의 얼굴 보다도, 지금 그에게 더 중요한건 손바닥 아래에서 바스러져 가는 윤산이었다. 한결은 자신의 지독한 열기가, 윤산의 냉기를 심장부터 천천히 녹여내기를 기다렸다. 윤산이 눈을 감았다. 숨이 가빴다. 통제가 안 됐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 죽은 것보다 훨씬 망가진 방식으로 살아 있다는 것, 그 얼굴이 오늘 밤 저 골목에서 원시인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전부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한결이 아주 조용히 싱크를 걸었다. 심장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만. 손끝이 하얗게 변하는 속도를 늦추는 정도로만. 한결은 윤산의 손 위에 얹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강한결의 인생에서 '당연한 것'은 언제나 계산된 행동과 그 결과로 인한 즐거움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무너지는 남자를 붙들고 있는 이 행위에는 그 어떤 논리적 계산도 끼어들지 못했다. '잃을 수 없다.' 무논리적인 본능이 그의 세계를 점령했다. 그 생각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이 사람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있었다. 강한결이 뭔가를 계산하지 않았던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결의 눈동자 안쪽 보랏빛 인광이 아주 잠깐 꺼지듯 가라앉았다가, 다시 천천히 살아났다. 윤산이 눈을 떴다. 숨이 조금 안정 됐다. 손이 아직 차가웠지만, 하얀 게 더 짙어지지는 않았다. 한결이 그걸 느끼면서 싱크를 유지했다. 방 안이 조용했다. 민혁 역시 충격에 휩싸여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절친한 동료이자 친구이자 형제가,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 원시인은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나가 벽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이 손을 내렸다. 허공의 영상이 천천히 꺼졌다. LP판 잡음이 멈췄다. 한결이 손을 치우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대리님." 윤산이 고개를 들자, 계산적인 온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형 찾을 거예요. 내가 반드시." 윤산이 시선을 내렸다. "방법은 제가 찾을게요. 그러니까 지금은." 한결이 잠깐 멈췄다. "무너지지 마요." 형광등이 조용히 빛났다. 골목 바람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윤산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한결의 손을 밀어내지도 않았다. 한결의 손이 위에 올려진 채로, 그냥 뒀다. 한결이 그걸 느끼면서, 같이 정면을 봤다. 눈동자 안쪽 보랏빛 불꽃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 방 안에 남은 건 다섯이었다. 민혁이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지내야 해. 백설이 골목 주변 깔고 있을 거야." "백설이 저를 왜 먹으려는 거예요." 시인이 고개를 들며 답했다. "백설은 능력을 먹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한결의 말에 시인이 당황하며 반문했다. "백설은 능력을 먹고 그 에너지를 자기 수명으로 바꿔버리거든요. 능력을 빨아먹히면 그 능력자는 껍데기만 남아요. 자아를 잃은 인형처럼." 한결이 덤덤하게 말했다. 민혁이 원시인을 봤다. "아까 영상에서 처럼 시인이 니가 오라클의 코어 였다면, 백설이 영원히 먹어도 넌 사라지지 않는 다는 거니까. 그 여자에게 넌 영생을 주는 영원한 식량인 셈이지." 오늘 밤 이안의 영상에서 본 것들. 수조. 코드. 두 연구원의 떨리는 손. 그리고 아이. 형광등이 깜박였다. 원시인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흔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거대한 진실 앞에 오히려 감각이 마비된 것 같았다. 같은 시각, 한결의 단말기가 조용히 진동했다. — 픽셀 개체 현재 이동 중. 한결은 화면을 덮어 시야에서 치워버렸다. 옆자리에서 서서히 온도를 되찾아가는 윤산의 옆 얼굴을 보았다. 이 사람의 숨이 조금이라도 더 안정될 때까지, 이 정적이 아주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질 수 있도록. 말해줘야 할 시간은 곧 닥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결의 눈동자 안쪽 보랏빛 불꽃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타고 있었다 # 9화. 프로젝트 이레이저 # 민혁이 키보드에서 손을 뗀 건  새벽이 깊어진 이후였다. 홀로그램 무대도, 화려한 조명도 꺼진 다크섹터는 평소와 달리 지독하게 고요했다. 모니터 빛이 그 빈자리를 채우면서  공간을 납빛으로 물들였다.  루나는 접이식 의자에 무릎을 당겨 앉아  캔 음료를 손 안에서 굴리고 있었고,  원시인은 테이블 모서리에 팔꿈치를 올린 채  화면을 응시했다.  이안은 구석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반쯤 내리고 있었다. 윤산은 내내 서 있었다. 앉으라는 민혁의 말을 두 번이나 들었지만 두 번 다 듣지 않았다. 한결은 그런 윤산의 바로 옆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단말기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시선만큼은 온전히 윤산에게 묶어두고 있었다. "찾았어." 민혁의 낮은 목소리가 가라앉은 공기를 갈랐다. 키보드 소리가 완전히 멈추자 다크섹터 전체가 무겁게 침묵했다. 모니터 위로 붉은 활자들이 쏟아졌다. [AD TECH — CLASSIFIED / PROJECT: ERASER] "7년 전 기록이야. 능력자 사냥 때." 민혁이 스크롤을 바로 내리지 않고  말을 먼저 꺼냈다.  그게 더 나쁜 신호라는 걸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짐작했던 거, 정부랑 AD 테크가 손잡고 있었다는 수준이 아니야. AD테크는 정부와 손잡는 척하면서 뒤로는 놈들을 철저히 이용했어. 능력자 사냥은, 처음부터 AD테크가 설계한 학살극이었어." 화면 위로 빼곡한 항목들이 펼쳐졌다. 수거 기록, 포획 필드 설계도, 재조립 공정표. 단어들이 사무적이고 건조할수록 그 뒤에 숨은 잔혹함이 더 선명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AD테크의 목표는 하나였어.  정부의 헌터들이 날뛰며 능력자들을 도륙할 때, 놈들은 그 뒤에서 마치 사냥터의 시체 청소부처럼 목표물을 선별하고 있었어. 고등급 능력자들 파편 확보해서,  오라클 집행 코드 이식하고,  완전히 통제되는  AD테크 소유의 생체 병기로 만들기 위해, 사체를 회수하고 있었던 거야.  분해해서 재조립한 거고." 루나가 쥐고 있던 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민혁이 스크롤을 한 번 더 내렸다. [최우선 타겟(Top Priority) — 윤강 / 기억하는 자들 통합 리더 / 픽셀화 공정 적용 대상 제1순위] 화면을 응시하는 윤산의 눈동자엔 아무런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기조차 얼어붙을 듯한 정적 속에서, 테이블을 짚은 그의 손만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보이지 않는 파동에 휩쓸린 것처럼 멈추지 않는 그 떨림을, 윤산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7년 전에 동료들 인질로 잡고  강이를 사지로 유인한 건  정부 헌터가 아니었어.  AD테크 특수팀이 위장한 거야.  강이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거지.  동료를 위해서라면 스스로 뛰어들 거라는 걸." 한결은 아무 말 없이 윤산의 하얗게 질린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호흡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리며 민혁을 응시했다.  민혁은 마른세수를 거칠게 한 번 하고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보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흩어진 강이의 살점 하나, 피 한 방울,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능력 입자 하나까지  전부 포획 필드로 긁어모았어.  산 채로 해체해서 담는 것보다,  폭발시켜서 입자 단위로 회수하는 게  놈들 공정에는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윤산의 손등 위로 다시 서리가 피어올랐다.  한결은 말없이 제 손에 힘을 주어 그 냉기를 눌러 내렸다. 민혁이 설계도 항목을 열었다.  기계 도면이 화면 가득 펼쳐졌다. "그다음엔 수거한 조각들을  나노 단위로 더 잘게 쪼갰어.  그리고는 오라클 명령에만 반응하는  인공 골격 위에 그걸 다시 발랐지.  원래 강이었던 인격, 기억,  동생을 아꼈던 마음 같은 건  전부 '데이터 노이즈'로 분류해서  영구 격리해 버리고." 민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루나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원시인이 자기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결국 강이는 7년 전 그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야.  놈들 시스템 안에 박제된 채  무기로 쓰이고 있는 거야." 방 안이 지독하게 조용했다. 윤산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도,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박제된 듯 굳어 있었다. "차라리 그때 정말 죽었더라면."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조용했으나,  오히려 그 평온함이 기괴했다. "형을 이런 식으로..... 모욕당하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옆에 서 있던 민혁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차마 윤산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침묵을 삼켰다. 한결이 그런 윤산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얗게 죽어가는 손등,  초점 없이 화면 위 글자들을 훑고 있는 눈.  한결은 이번만큼은 싱크를 깊게 걸어  강제로 온도를 높이지 않았다.  지금 이 사람에게 필요한 건  일시적인 온기가 아니라,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확신'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리님." 한결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윤산이 녹슨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한결을 보았다. "되찾을 수 있어요." 윤산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결이 정면으로 받아냈다.  "빈말 안해요.  방법은 제가 만들 테니까,  대리님은 여기서 숨부터 골라요." 한결이 민혁을 향해 말했다. "민혁 형,  정부망에 있는 교전 영상 전부 다 긁어모아 줘요." "분석하게?" "네. 아무리 완벽한 시스템이어도 분명 빈틈이 있을 겁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돼요.  제가 찾아낼게요." * 영상은 네 개였다. 첫 번째, 도심 교차로.  정부 차량 세 대가 뒤집혀 있었고  아스팔트 위에 픽셀 입자들이  부식된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영상 속 형체가 손을 뻗자 차량 한 대가  픽셀 단위로 해체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원형이 사라지는 데 채 삼 초가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건물 외벽.  손이 닿은 면에서부터  구조물이 데이터처럼 분해되어 사라졌다.  물리 충격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를 해체하는 방식이었다. 세 번째.  헌터 다섯이 포위한 상태에서도 픽셀의 형체는 가만히 서 있었다.  공격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픽셀이 움직이지 않았다.  들어온 능력들이 닿기 직전  픽셀 입자로 분해되며 사라졌다.  탄환도 마찬가지였다. 루나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사거리 안에 들어가면  버틸 방법이 전혀 없다는 뜻이잖아." ".....한 번 봤어요." 원시인이 고개를 들었다. "골목에서요.  백설 블랙홀이 잠깐 막았잖아요." "거기서 방법이 나와요." 한결이 화면을 끄고 돌아섰다.  그러면서 윤산을 봤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뭔가를 정리하고 있는 것 같은  잠깐의 침묵이었다. "제 동기화,  지금까지 대리님께 보여드린 건  체온이랑 신경계 조절 쪽이었는데요." "....."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한결이 단말기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특별히 무거운 말투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꺼내는 것처럼. "뇌파를 완전히 동기화하면  상대 의식 안에 직접 들어갈 수 있어요.  들어가면 뭐든 할 수 있고요.  기억을 바꾸는 것도,  판단을 심는 것도,  아예 꺼버리는 것도.  신체 제어도 가능하고요.  의식이 눌려있거나 격리된 상태여도  찾아낼 수 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민혁이 먼저 한결을 봤다.  루나가 캔을 내려놓았다.  윤산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능력을 실제로 쓴 적 있습니까." 윤산이 물었다. "네."  한결이 짧게 답했다.  "처리해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썼어요." 공기가 달라졌다.  민혁이 시선을 내렸다.  루나가 한결을 봤다가 다른 곳을 봤다. 처리해야 하는 사람.  한결의 어조는 오늘 점심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무심했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한결이 그걸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설명할 필요를 느끼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한결이 원시인을 봤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형." 원시인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형이 필요해요.  제가 안에서 강이 형님 자아를 끌어올렸을 때,  시스템과 자아 사이 연결을 삭제해야해요.  오라클 실행 로직만 도려내는 거.  형 능력으로 할 수 있어요." 원시인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잠깐 말이 없었다. ".....저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자신은 없는데.  시스템 로직만 끊는 거,  형님 자체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  연결만 삭제하는 거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 시간을 벌어줄 사람이 필요해요.  형님이 움직이면 안 되니까." 원시인이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잠깐 있다가 말했다. ".....백설이 아직 저 쫓고 있지 않아요?"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원시인을 봤다. "제 능력은 백설이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나눠줄게요.  조금. 도와달라고 하면서." 말하면서 스스로 확신이 붙는 것 같았다.  그러다 원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말을 들을까요?" 루나가 잠깐 말을 잃었다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혁이 단백질 바를 씹다가 멈췄다. 한결이 원시인을 보면서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들어요, 아마." "아마요?" "형이 부르면 달려올 거예요.  거기서부터 설득하면 돼요." 원시인이 그다지 안심이 된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인의 머릿속에 골목이 스쳤다.  어둠 속에서 걸어오던 형체,  픽셀 입자가 부서지며 얼굴이 드러나던 순간.  연청색으로 일렁이던 그 눈.  무서웠다. 분명 무서웠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뭔지 모를 것이 같이 올라왔었다.  무서운 감정 아래 깔려 있던,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 원시인은 그게 뭔지 몰랐다.  지금도 몰랐다.  그냥 그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만 알았다. "백설을 만나서  시인형이 능력 쓰는 순간,  바로 강이 형님이 나타날 거예요." 한결이 말했다. "형을 제거하러.  그 타이밍에 동시에 시작해야 해요.  제가 들어가는 것,  형이 연결 끊는 것,  백설이 버텨주는 것.  전부 그 찰나에 맞물려야 하고요." 방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윤산이 말했다. "제가 직접 들어가겠습니다.  형의 눈을 마주해야  아카이브 아이로  형 능력을 읽어낼 수 있고," "대리님." 한결이 한 걸음 걸어오면서 윤산 앞에 섰다. "픽셀 사거리 안에서  형님 눈 보는 순간,  능력보다 그게 형님이라는 게 먼저 와요.  집중이 깨지면 그다음이 없어요." "그 판단은 제가," "제가 형님 자아를 끌어올렸을 때,  형님이 처음 눈 뜨는 순간  옆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알아볼 수 있는 얼굴.  그게 대리님이에요.  제 옆에 있어요.  뛰어들지 말고." 윤산이 한결을 봤다. 평소라면 혼자 짊어지고 들어갔을 거였다.  그게 이 사람의 방식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걸  선택지로 두지 않는 방식.  근데 지금은 그게 안 됐다.  형의 눈을 봤을 때  자신이 무너질 거라는 걸,  한결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한결이 민혁을 봤다. "백도어 계속 열어둬요.  신호 실시간으로 잡아줘요." "그래."  "루나 씨는 진입 전에  페로몬으로 주변 차단해줘요.  헌터들 접근 막아야 해요." "얼씬도 못하게 할께." 루나가 짧게 말했다. 이안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는요." "나중에 필요할 수 있어요. 대기해줘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흩어지고  서버실에 혼자 남은 한결은  꺼진 모니터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원시인의 영상 속 수조 앞 두 연구원의 실루엣,  지금 이걸 꺼낼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강을 먼저 데려와야 했다.  윤산이 버틸 수 있는 상태가 된 다음에. 그때도 충분했다. 문이 열리고, 윤산이 서 있었다. "대리님?" "잠깐...시간 있습니까." 윤산이 들어와 한결의 맞은편에 섰다.  말을 바로 꺼내지 않았다.  잠깐 한결을 봤다가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봤다. "강한결 씨." "네." "아까 한 말.  제가 형 눈 뜰 때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거."  윤산이 말했다.  "그게 전략적 판단입니까." "반은요." "나머지 반은." 한결이 천장을 잠깐 올려다봤다가 내렸다. "대리님 들어가는 거 보기 싫었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윤산이 한결을 봤다.  이해가 안 됐다.  강한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처음엔 경계했고,  지금도 전부를 파악했다고 할 수 없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자꾸 자신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계산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방금 그 말은 계산처럼 들리지 않았다. "왜입니까." 윤산이 물었다.  따지는 게 아니었다.  진짜로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한결이 윤산을 봤다. "모르겠어요." 짧게 답했다.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딱히 없어요.  그냥 보기 싫었어요." 윤산이 그 말을 받아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됐다거나 안됐다거나  어느 쪽도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강한결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사람은 자신이 예측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불편했던 게 아니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윤산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이 문손잡이에 닿는 순간 멈췄다. "강한결 씨." "네." "고마워요." 문이 닫혔다. 한결이 그 자리에 서서 닫힌 문을 봤다.  가슴 안쪽이 뜨거웠다.  능력을 쓰지 않았는데.  그냥 뜨거웠다.  눈동자 안쪽 보랏빛 인광이  아무도 없는 서버실에서  혼자 조용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 단말기가 진동했다. 주민혁. — 백설 좌표 잡혔어. 도심 외곽 폐쇄 구역. 움직이지 않고 있어. 한결이 화면을 봤다. 잠깐 그대로 있다가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내일이었다. # 10화. 되찾은 무게 # 폐쇄된 지하 공간이었다. 도심 외곽 재개발 구역, 오래전에 운영이 중단된 지하철역 안이었다. 조명은 전부 나가 있었고 오직 비상등 하나만이 붉게 깜박이며 사방을 핏빛으로 서늘하게 물들였다. 타일 벽마다 깊은 균열이 가 있었고, 선로 위에는 거뭇한 녹이 슬어 있었다. 눅눅하고 무거운 공기가 피부에 축축하게 감겼다. 민혁이 통로를 열자 다섯 사람이 차례로 선로 위에 발을 디뎠다. 루나가 먼저 주변에 페로몬 향을 흘리며 기민하게 훑었고, 한결은 침착하게 단말기를 확인했다. 윤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원시인이 가장 먼저 그것을 포착했다. 선로 옆, 낮은 벽 아래 구석진 곳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분홍색 코트가 조그맣게 웅크린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녔지만, 백설은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지독한 공복에 시달리는 듯한 거친 헛구역질 소리가 조용한 지하 공간에 위태롭게 울렸다. "...더러워. 안 먹어. 배고파." 원시인이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백설." 그 한마디에 백설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원시인을 향했다. 이성을 잃고 핏빛으로 번뜩이는 진홍색 눈동자. 그리고 찰나,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백설이 순식간에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오빠아! 왔어! 드디어 왔어!" 원시인이 반사적으로 손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그의 손끝에서 능력이 왈칵 새어 나왔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저 밀려드는 공포에 몸을 막으려 했을 뿐인데, 손끝에서 빛조차 집어삼킬 듯한 백색의 공백 조각이 흘러나와 공기 중에 둥실 떠올랐다. 백설이 코앞에서 뚝 멈춰 섰다. 마치 지독한 중독자처럼 코를 들이밀고 공기를 흡입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동자를 채우고 있던 핏빛 광기가 순식간에 황홀한 희열로 바뀌었다. "......이거야. 이거." 원시인이 가쁘게 몰아쉬던 숨을 고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저기......거래가 있어요." 백설이 고개를 기울였다. "오빠가, 나한테? 거래?" "그......기계 아저씨 있잖아요. 전에 골목에서 봤던." 원시인이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목소리 끝이 약간 떨리는 것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그 아저씨가 나타날 때 잠깐만 막아주면, 방금 그 공백 조각을 계속 줄게요. 내 능력은 백설이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백설이 붉은 눈으로 원시인을 빤히 봤다. 원시인은 달아나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그 시선을 꿋꿋이 버텨냈다. 하지만 이내 긴장이 풀린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덧붙였다. ".....근데 막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사실은. 그냥 혹시나 해서." 뒤에서 루나가 기가 찬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는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 단백질 바를 씹던 입을 딱 멈췄다. 백설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렸다. "그 아저씨, 냄새는 별로인데." 어디선가 꺼낸 막대사탕을 입에 물면서 말했다. "음, 오빠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어." 원시인이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결이 그 모습을 옆에서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가 내렸다. "그럼 시작하죠." 한결의 말과 함께,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바닥을 폈다. 능력이 열리는 순간은 소리가 없었다. 그저 대기의 밀도가 기묘하게 변했을 뿐이었다 원시인의 몸 주변에서 미세한 파동이 번져 나가며 지하철 역의 공간이 아주 조금 일렁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백설이 먼저 반응했다. 진홍색 눈동자가 활짝 열리면서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처럼 팽팽해졌다. 그녀의 손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컴컴한 선로 저편의 공간이 지직거리며 뒤틀렸다. 픽셀 입자들이 공기를 긁어내리는 날카로운 기계음과, 파란 노이즈가 사방을 침식하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걸어 나왔다. 윤산보다 어깨가 한 뼘은 더 넓은 압도적인 체구.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하철 선로의 콘크리트 바닥이 푸른 픽셀 단위로 분해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홍채 안쪽에서 번뜩이는 형광 연청색 인광이 어둠 속에서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러 감지. 원시 데이터 활성화 확인. 제거를 시작한다." 무감정한 목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렸다. 백설이 비명처럼 웃음을 터뜨리면서 앞으로 뛰었다. "기다렸어, 기계 아저씨!" 손에서 폭발하듯 블랙홀이 열렸다. [싱귤래리티 하트]. 모든 존재를 삼켜버릴 듯한 무거운 중력이 윤강이 뿜어내는 푸른 픽셀 파편들을 정면으로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두 능력이 충돌하는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지하 공간 전체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낡은 타일 벽의 균열이 순식간에 밑바닥까지 더 깊게 금이 갔다. 윤강의 무자비한 픽셀 입자들이 블랙홀의 중력권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해체 속도가 간신히 늦춰졌다. "아악! 내 구멍이 갉아 먹히잖아!" 블랙홀의 가장자리가 푸른 픽셀에 침식당하듯 투두둑 뜯겨 나가자, 백설이 제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었다. 능력이 상쇄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백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눈동자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며 중력의 출력을 악착같이 더 끌어올렸다 윤산은 그 자리에 완전히 굳어 있었다. 형이었다. 눈앞에서 사방을 해체하고 있는 저 존재가, 생기 없이 일렁이는 연청색 눈동자가, 끊임없이 부서져 내리는 픽셀 입자가, 그런데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그의 형, 윤강이었다. 기계처럼 완벽하게 감정이 제거된 저 얼굴이 7년전 그 따뜻했던 형이었다. 한결이 윤산의 차가운 손목을 한 번 잡았다가 놓았다. "대리님은 옆에만 계세요." 낮고 단단한 목소리. 윤산이 한결을 돌아봤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끌어올릴게요. 형님이 처음 눈 뜨는 순간 가장 먼저 마주해야 하는 사람은 대리님이에요. 동기화 하는 동안 발열은 제가 감당할께요. 싱크 나눠쓰면 오히려 제 집중이 흔들려요." 윤산이 잠깐 한결의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뭔가를 반박하려다가 하지 않았다. 이내 입술을 물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결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사방의 소음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백설과 윤강이 충돌하는 굉음도, 루나가 짙은 안개같은 페로몬 차단막을 넓게 펼쳐 올리는 소리도, 민혁이 거칠게 단말기를 두드리는 소리도. 전부 막혔다. 한결의 의식이 다른 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싱크] 뇌파를 길게 뻗어 도달해야 할 표적을 찾는 감각. 평소라면 찰나에 끝났을 터였다. 주파수가 맞물리는 순간 연결망이 열리는 감각이 손끝에 선명히 전해지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지독할 정도로 무거웠다. 윤강의 의식 가장 깊은 곳은 거대한 철벽처럼 여러 겹으로 단단히 가로막혀 있었다. 차가운 오라클 시스템 코드가 거미줄 같은 신경망 형태로 온통 뒤덮인 채, 층마다 서슬 퍼런 시스템 명령어를 빼곡하게 내뱉고 있었다. 한결이 의식을 더 깊이 끌고 내려갔다. 이윽고 기묘한 장면들이 시야를 메웠다. 공간이었다. 실제 공간이 아니었다. 윤강의 의식의 내부가 이미지로 변환된 것. 황폐한 장소였다. 한때 거대한 요새였을 건물의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들이 사방에 파편으로 흩어져 있었다. 벽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고, 창문은 모조리 깨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수많은 조각들이 허공에 부유하고 있었다. 유리 파편처럼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들이 여기저기 부유하고 있었다. 마치 깨진 유리 파편처럼 기묘한 빛을 반사하는 조각들이 여기저기 떠돌았다. 그 파편을 가까이 들여다보자, 안쪽에 무언가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어떤 조각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동료들이 있었고, 다른 조각에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던 다정한 손길이 보였으며, 또 다른 조각에서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들은 한 가닥 시간도 흐르지 못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7년 전의 소중한 기억들이 오라클에 의해 이 차가운 공간에 강제로 박제되어 격리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 찬란한 기억의 조각들을 옥죄고 있는 흉물이 있었다. 거무스름한 시스템 코드들이 검은 실핏줄처럼, 혹은 기생수의 뿌리처럼 파편 하나하나를 거칠게 파고들어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추억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본래의 인격이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슬이었다. 한결이 한층 더 깊이 내려갔다. 수많은 파편들의 밑바닥 기억의 조각들 아래, 폐허의 가장 깊은 바닥에 무언가가 있었다. 뚜렷한 형체가 없었다. 빛이라고 해야 할지 파동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것. 그런데 그것은 살아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그렇지만 분명히 단단한 박동을 내며 뛰고 있었다. 한결은 주저 없이 그 빛을 향해 동기화의 끈을 강하게 내리뻗었다. "형님." 의식의 공간 속에서 목소리가 어떻게 전달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온 의지를 담아 소리쳤다. "들리세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결은 제 정신을 억지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뇌 신경을 가르는 듯한 폭발적인 열기가 솟구쳤다. 의식 저편에 두고 온 신체의 체온이 위험 수위까지 치솟고 있다는 사실이 감각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머릿속이 시뻘겋게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극심한 통증. 지금까지 써왔던 그 어떤 순간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리스크가 뇌를 가열했지만, 한결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형님. 정신 차려요. 끌어올릴 테니까!" 그때였다. 잠든 것 같던 희미한 빛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아주 작게, 떨리는 것처럼. 한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파동을 양손으로 움켜잡듯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뇌벽을 뒤덮은 시스템 코드들이 격렬하게 발악하며 저항해 왔다. 자아를 억누르려는 오라클의 힘과, 그것을 뜯어내려는 한결의 능이 의식의 내부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한결은 핏줄이 터질 듯 정신의 끈을 당겼다. 현실의 지하철역에서, 한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의 하얀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나가 그 위태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이 짓씹었다. 단말기를 조작하며 한결의 생체 활력 수치를 확인하던 민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굳어졌다. 한결의 체온 비정상적인 속도로 폭발하듯 오르고 있었다. 윤산의 시선이 한결의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에 닿았다. 반사적으로 제 냉기를 흘려 그를 붙잡으려던 손길이 허공에서 뚝 멈췄다. ‘대리님은 제 옆에만 계세요. 싱크 나눠 쓰면 오히려 제 집중이 흔들려요.’ 한결의 단호했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윤산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동요하는 내면을 증명하듯, 그의 손끝에서부터 하얀 서리가 거칠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설과 윤강의 충돌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블랙홀의 가장자리가 픽셀 입자들에게 무참히 갉히면서 백설의 몸 여기저기가 노이즈로 번지기 시작했다. 백설이 이를 악물면서 더 버텼다. 바로 그 순간, 윤강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아주 찰나였다. 연청색 글리치 노이즈가 흐릿하게 일렁이던 동공 안쪽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감정의 파동이 솟구쳤다. 감정이 제거된 자리에 뭔가가 스민 것처럼 보이는 것. 윤산은 그것을 단번에 포착했다. 오직 피를 나눈 쌍둥이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세한 변화였다. 저 껍데기 같은 시스템의 밑바닥에, 분명 제 형인 윤강이 비명을 지르며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기쁨도 잠시, 지하역 내부에 귀를 찌르는 시스템의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자아 복구 프로세스 감지. 강제 진압 실행.] 윤강의 목뒤에 박혀있 칩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푸른 픽셀 입자들이 순식간에 재집결하며, 더욱 거대한 파동을 형성하기 위해 요동쳤다. "지금이에요." 한결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져 터져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고,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시인 형, 지금 무조건 끊어!" 원시인이 떨리는 손을 뻗었다. 강렬한 감각이 느껴졌다. 시스템 코드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 윤강이라는 사람과 오라클 실행 로직 사이의 연결이 어디서 이어지는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었다. 본능이 그 자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삭제] 거대한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파동과 함께 윤강의 육체가 순식간에 앞으로 푹 꺾였다. 사방을 집어삼킬 듯 날뛰던 푸른 픽셀 입자들이 한꺼번에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백설의 블랙홀 역시 일순간 기괴한 중력을 한 번 내뿜고는 그대로 투둑 꺼져 버렸고, 그 반동으로 백설이 바닥으로 굴러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지하역 전체에 지독한 정적이 찾아왔다. 중력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지던 윤강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작고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산아." 윤산이 용수철처럼 튀어나가 그 거구의 몸을 받아 안았다. 제 품으로 무겁게 쏟아지는 형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인공 골격의 냉기가 사라진 그의 육체가 아주 조금씩, 사람의 온기를 되찾으며 따뜻해지고 있었다. 윤산은 형의 등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밀려드는 감정을 삼키며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원시인이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삭제를 한 건 맞는데 이것이 정말 완벽하게 성공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형님이 깨어날 수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됐기를 바랐다. 그리고 또, 머릿속 한구석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잘했어요." 한결이 거친 시멘트 벽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힘겹게 입을 뗐다. 원시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평소의 생기는 온데간데없이 보랏빛 인광이 탁하게 가라앉은 한결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이마와 뺨은 불에 덴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거친 숨을 내뱉을 때마다 눈에 보일 듯한 뜨거운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괜찮아....?" "네. 조금 뜨겁긴 한데..... 제법 수지타산이 맞는 장사였네요." 한결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겨 윤산에게 다가갔다. 평소 같은 능청스러운 농담조차 제대로 던지지 못할 만큼 내적 소모가 극심했지만, 형을 품에 안은 윤산의 눈빛을 보자 가슴 안쪽에서 다시 기묘한 파동이 일었다. "숨 쉬고 있어요, 대리님." 그 한마디에 윤산이 고개를 들어 한결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지만, 잘게 떨리는 검은 눈동자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안도와 깊은 고마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냈다. 제 몸을 태우는 능력의 열기보다, 저를 향한 윤산의 그 찰나의 눈빛이 훨씬 더 뜨겁게 가슴을 지지는 것 같았다. "아흑....약속. 약속 지켜야지." 백설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던 자리에서 바닥을 기어오며 칭얼거렸다. 팔다리 여기저기가 푸른 픽셀 노이즈로 흐릿하게 번져 있는 상태임에도, 기어코 사탕만큼은 용케 새로 꺼내 입에 물고 있었다. "나 진짜 배고파서 쓰러지기 직전이거든?" 원시인이 먼지투성이가 된 백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마워요, 백설." 징징거리던 백설이 뚝 멈추더니 원시인을 올려다보았다. 잠깐의 침이었다. 고마움을 받아본 게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가, 이내 막대사탕을 한 번 오드득 씹으면서 고개를 팩 돌렸다. "약속이나 지켜." 민혁이 서둘러 공간 통로를 열었다. 윤강의 육체를 양쪽에서 부축해 다크섹터로 돌아가는 길, 가장 마지막으로 대열을 따라가던 한결이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열기가 여전히 식지 않은 채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다크섹터의 침상에 윤강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고른 호흡이 이어졌고, 차갑던 체온도 완전히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아직 피부 표면에서 푸른 픽셀 입자들이 아주 미세하게 새어 나오고는 있었으나, 그마저도 서서히 빈도가 줄어들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윤산은 윤강의 침상 곁에 의자를 당겨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형의 곁을 지켰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그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원시인은 조용히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폭풍이 몰아친 듯 전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제 손으로 오라클의 로직을 삭제했고, 마침내 윤강이 무사히 돌아왔다. 하지만 아까 선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그 형광 연청색 눈동자가 자꾸만 눈앞에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분명 압도적인 두려움이 먼저였는데, 그 무서운 감정 밑바닥에 조용히 깔려 있던 무언가가 자꾸만 목을 옥죄듯 올라왔다. 여전히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단말기가 울렸다. 주민혁. [— 백설 관련 데이터 추가로 뽑혔어. 당장 봐야 할 것 같아.] # 11화. 배양 폐기 대상자 # 민혁에게 가려던 참이었다. 다크섹터 서버 쪽으로 걸어가던 원시인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스산하게 바닥을 긁는 소리, 그리고 그 주변으로 조용히 피어오르는 검은 아지랑이. 돌아보니 백설이 소파 옆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원시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마치 맹수처럼 기괴한 생기를 띠기 시작했다. 핏빛 진홍색 눈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였다. "오빠. 배고파." "잠깐만, 지금 민혁 형한테—" "배고프다고." 백설이 스르륵 일어서면서 원시인 쪽으로 걸어왔다. 걸음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원시인이 본능적으로 뒤로 한 발 물러섰지만, 백설이 그만큼 더 거리를 좁혀왔다. "....알겠어요. 잠깐만." 원시인이 마지못 손을 폈다. 어떻게 하는 건지 아직 확실히 몰랐기에, 그저 손끝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냥 능력을 조금 여는 것. 골목에서 반사적으로 터졌던 것보다 훨씬 작게. 손끝에서 백색의 공백이 아주 조금 피어올랐다. 주변의 모든 색을 집어삼킬 듯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졌다. "이러면 돼요?" 백설이 코를 들이밀듯 공기를 한 번 습 가쁘게 빨아들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눈동자를 가득 채웠던 핏빛 광기가 순식간에 짙은 황홀감으로 뒤바뀌었다. "더." "더요?" "더 줘." 원시인이 망설이다가 능력을 조금 더 열었다. 손 위의 공백이 조금 더 커졌다. 그와 동시에 백설이 손을 뻗으면서 중력을 당기기 시작했다. [싱귤래리티 하트]가 조용히 개화하면서 사정없이 빨아들이는 힘이 공백을 끌어당겼다. 그 순간, 원시인의 척추를 타고 소름 끼치는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원시인이 잠깐 몸을 굳혔다. 능력이 밀려 나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역류해 돌아오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백설의 중력이 공백을 흡수하는 순간, 그 통로를 타고 무언가 거대한 것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골목에서 잠깐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폭발적인 . "잠깐, 이게 뭔가 이상—" 원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설이 눈을 번뜩이면서 능력을 더 펼쳤다. 원시인이 당황해서 능력을 닫아보려고 했지만 알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의 능력이 강제로 쥐어짜이듯 흘러내리며 개화하고 있었다. 공백이 폭발하듯 커지면서 백설의 블랙홀이 그걸 전부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싱귤래리티 하트]가 한계치를 완전 넘어섰다. "아아아악! 뜨거워!" 백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그런데 손을 놓지 않았다. 중력을 놓지 않았다. 눈동자가 진홍빛으로 타오르면서 오히려 더 끌어당겼다. 그게 문제였다. 원시인이 지워낸 백색의 공백과 백설이 끌어당기는 검은 중력이 서로 맞물리는 순간, 기이한 공명이 일어났다.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하얀 무(無)가 비워낸 자리를 검은 중력이 정교하게 채우고, 그 중력이 다시 비워진 자리를 잡아끌며 두 능력의 경계가 완벽히 밀착되었다. 마치 애초부터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힘인 것처럼, 수십 년을 기다려온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리는 것 같았다. 아주 거대한 것이, 아주 조용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크섹터 전체가 울렸다. 조명이 한꺼번에 깜박였다. 테이블 위 단말기들이 오작동하며 화면이 하얗게 됐다가 꺼졌다. 두 사람 주변에서 무채색의 소용돌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백색과 흑색이 경계 없이 섞이면서 주변 공간의 왜곡이 심해졌다. 빛도 소리도, 공기 중의 산소조차 전부 두 사람이 만들어낸 무채색의 소용돌이 속으로 무섭게 흡수되어 들어갔다. 서버 쪽에서 민혁이 벌떡 일어났다. 모니터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수치들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일반적인 능력자의 파동 수치를 벗어난 지 한참이었다. 두 사람의 파동 그래프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면서 하나의 거대한 파형으로 합쳐지고 있었다. "저건 단순한 간섭이 아니야." 루나가 두 사람 주변을 맴도는 파동을 보며 신음하듯 말했다. 눈동자가 오로라빛으로 흐려지고 있었다. 상황의 위험성을 직감한 한결이 망설임 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그의 호흡마다 섞여 나왔다. "시인 형, 능력 닫아요." "닫으려고 하는데 안—" "닫아요. 지금!" 한결이 강하게 원시인의 어깨를 붙잡아 당겼고, 그 충격에 원시인이 이를 악물고 손을 오므렸다. 능력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공명이 줄어들면서 소용돌이가 가라앉았다. 다크섹터가 다시 조용해졌다. 소용돌이가 사라진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백설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고양이가 가르랑거리듯 낮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극도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원시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전신을 관통했던 거대한 이질감과 충격에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민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이것과 관련된 자료야. 다들 와봐." 모니터 앞에 사람들이 모였다. 백설은 바닥에서 일어나 원시인 옆에 섰다. 어디서 꺼냈는지 막대사탕을 다시 물고 있었다. 윤산이 침대에 누워 있는 윤강 곁을 잠깐 벗어나 모니터 앞으로 왔다. 민혁이 파일을 열었다. 정부 통합 데이터망 깊숙이 심어놓은 백도어가 열리면서, 그동안 철저히 은폐되어 있던 기록들이 스크린 위로 쏟아져 나왔다. 가장 먼저 뜬 건 코드네임이었다. [이터(Eater). 최우선 보안 등급. 정부 직속 관리 대상.] 그 아래 한 줄. 'Original Seed 배양 폐기 대상자. 작전명 [여명] 수행 중 기밀 자산으로 강제 확보 및 외부 격리.' 루나가 화면을 보다가 낮게 말했다. "알고 있었어. 이터. DAB가 관리한다는 건 들었는데 배경까지는 몰랐어." 한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도 DAB가 숨겨놓은 병기 수준으로만 알고 있었어요. 어디서 왔는지는...." 민혁이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정부 자료에서 AD테크 내부 파일로. 민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화면이 바뀌었다. [AD TECH — 최상위 기밀 / Project: Re-Genesis] [폐기 샘플 보고서] 화면 가득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초점이 풀린 채 수조 속에 잠겨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밑에는 붉은 낙인처럼 찍힌 문구들이 줄을 이었다. - 파편 주입 3시간 후 뇌사. - 데이터 과부하로 인한 신체 붕괴. - 연산 과부하 판정. 폐기. - 폐기. - 폐기. 수백 명의 아이들이 이름도 없이 숫자로 불리며 죽어 나간 기록이었다. 원시인의 입이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루나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막았다. 민혁이 말없이 스크롤을 내렸다. 그 지옥 같은 명단의 마지막 장에서 민혁의 손이 멈췄다. [Subject-02] - 연령: 3세. - 주입 데이터: Original Seed의 잔류 파편 및 배양 데이터 8.4%. - 특이사항: Protocol: OS 외 유일한 생존자. 생체 연산 지연에 따른 물리적 시간축의 고착화 현상 발현. - 판정: Protocol: OS의 안정적 배양을 위한 임시 보관 및 데이터 대조군. OS 가동 시 용도 폐기 및 분해 권장. 방 안이 싸늘하게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백설에게로 향다. 정작 백설은 막대사탕을 오도독 씹으면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자기 얘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표정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화면의 수치들을 훑던 그녀가 고개를 까딱였다. "배양 폐기 대상자." 담담하게 글자를 소리 내어 읽은 게 끝이었다. 슬픔도, 충격도 없었다. 마치 완벽히 타인의 얘기를 확인하는 것처럼. "그래서 오빠 냄새가 그렇게 당겼던 거구나." 백설이 원시인을 봤다. 진홍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내 안에 오빠 조각이 있으니까. 오빠 보자마자 배고프다고 소리 질렀던 거잖아." 원시인이 멍하니 백설을 봤다가 화면을 봤다. 3세. 주입. 유일한 생존자. "물리적 시간축의 고착화가....뭐예요?" 한결이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몸의 시간이 멈춘 거예요. Original Seed 파편을 처리하느라 뇌가 모든 에너지를 연산에만 쏟아붓고 있는 거예요. 성장할 에너지가 없는 거고요. 일반인보다 수십 배 느린 성장 지연이에요. 외형이 열두살쯤에 멈춰 있는 게 그 때문이에요." 원시인이 백설을 봤다. 분홍색 코트, 백은발 트윈테일, 진홍색 눈동자. 처음 봤을 때부터 꼬마라고 생각했다. 그냥 작은 사람인 줄 알았다. 자신이 수조 밖의 시간을 걷는 동안, 이 작은 아이는 자신의 조각을 품은 채 22년 전의 시간에 유폐되어 있었다. 백설의 실제 나이가 25살이라는 사실이, 그 잔인한 진실이 한 박자 늦게 시인의 가슴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미안해, 백설." 백설이 사탕을 오드득 씹던 걸 멈췄다. 고개를 들어 원시인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잠깐 눈을 깜박이다, 이내 코웃음을 쳤다. "약속이나 지켜." 막대사탕을 다시 입에 물면서 화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딱히 별일 아닌 것 같은 얼굴이었다. 본인의 비극적인 과거보다는 다음 먹을 것에 관심이 더 많은, 그 지독하리만치 무구하고 결여된 태도가 오히려 원시인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었다. 민혁이 스크롤을 더 내렸다. 화면이 또 바뀌었다. [Project: Re-Genesis — 최상위 기밀] [Protocol: OS / Individual No.0] 원시인이 수조 밖으로 튕겨 나간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작된 것. 수백 명의 실패.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단 하나 항목. 22년 동안 오직 수조 안에서만 살아온 존재. 민혁이 화면의 항목에서 마우스를 멈췄다.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화질이 낮고 수조 내부를 찍은 탓에 물기가 어린 듯 흐릿한 형태였다. 백발에, 눈을 뜨고 있지만 동공에는 아무런 초점도 없었다. 완벽히 비어 있는 회색 눈동자. 그리고 전신을 뒤덮은 수많은 실험 흉터들. - 나이: 26세. 원시인이 수조를 빠져나간 그 순간부터 이 사람이 그 안에 있었다는 것. 원시인이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4세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아동 복지시설에서 눈을 뜬 것이 제 삶의 첫 기억이었다. 자신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수백 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 그 과정에서 일그러진 채 살아남은 게 백설이었으며, 종국에는 저 사진 속 존재가 22년이라는 세월을 대신 지옥에서 버텨왔다. 그 거대한 무게가 전부 한꺼번에 시인의 어깨를 짓눌렀다. "오라클 시스템을 없애려면." 한결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국 저걸 상대해야 한다는 거." 방 안에는 그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민혁은 무겁게 굳은 얼굴로 화면을 끄지 못했고, 루나는 팔짱을 낀 채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윤산 역시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형, 윤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설은 화면을 한 번 더 응시했다. 수조 속 사진, 백발, 회색 눈동자. 잠깐 보던 그녀가 다시 사탕을 오도독 씹었다. 여전히 표정은 비어 있었다. 저 사진 속 존재가 자신과 어떤 기괴한 연결고리를 가졌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지금 당장의 허기를 채우는 게 더 중요해 보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적막한 방 안, 침대 쪽에서 미미한 부스럭거림이 들렸다. 거칠게 번지던 숨소리가 일순간 달라지는 아주 작은 변화.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윤강의 손가락끝이 파르르 떨리며,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 12화. 달라지지 않은 것 # 윤강이 처음으로 스스로 일어난 건 새벽이 다 지나서였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두 번 실패했다. 오랫동안 시스템의 명령에만 절대적으로 복종하던 몸이었다. 엔진이 빠져나간 자리에 자아라는 미약한 연료를 채우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손가락이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가 무력하게 미끄러졌다. 세 번째 시도 끝에야 겨우 상체를 세웠다. 옆에 있던 윤산이 급히 손을 뻗으려 했지만, 윤강이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혼자 할게." 갈라진 목소리. 7년간 완전히 굳어 있던 성대가 처음으로 제 주인을 위해 낮게 울렸다. 그는 천천히, 정말 천천히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렸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푸르스름 픽셀 입자들이 발바닥 쪽으로 미세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의 온도를 확인하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다크섹터의 차가운 금속 바닥을 처음으로 제 발로 딛는 감각이 생경하게 전신을 관통했다. 윤강이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그러나 곧바로 중심이 무너지며 비틀거렸다. 윤산이 반사적으로 형의 팔을 잡았다. 이번엔 윤강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혔다. 윤강은 동생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원시인이 문 앞에 기대 서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윤강이 고개를 들면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낯선 공간, 낯선 얼굴들. 윤강의 눈빛은 픽셀이었을 때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아니었다. 낯선 존재를 천천히 확인하고 수용하려는 인간적인 이었다. 윤강의 시선이 원시인에게서 멈췄다. 한참을 뚫어지게 봤다. 원시인이 그 시선을 받으면서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 됐다.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가 슬며시 내렸다. "저...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구석에서 단백질 바를 무심히 씹던 민혁의 손길이 뚝 멈췄다. 루나가 팔짱을 끼면서 시선을 창쪽으로 돌렸다. 윤강이 원시인을 잠깐 더 응시하더니, 이내 짧게 답했다. "그래." 말이 끝나면서 윤강이 원시인의 어깨를 한 번 툭 짚었다. 오래 짚지 않았다. 잠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자신을 그 지옥 같은 시스템에서 분리해 준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표현이, 지금으로선 그것뿐이었다. 민혁이 방 안으로 다시 들어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였다. 윤강이 죽 한 그릇을 절반쯤 비운 참이었다. 숟가락을 드는 손이 아직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떨림을 멈추려 하지 않고, 그 상태 그대로 묵묵히 죽을 떴다. 한 숟가락씩 아주 천천히. 뜨거운 음식이 식도를 넘어가는 그 지극히 평범한 감각을 온몸으로 기억하려는 듯 보였다. 민혁이 그 앞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윤강이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쯤 입을 열었다. "29년 살면서 밥 먹는 거 이렇게 진지하게 보는 건 처음이야." 윤강이 민혁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민혁이 실없이 웃었다. "뭐." "아니. 그냥." 민혁이 뒤통수를 긁으면서 말했다. "살아있네. 진짜로." 그 한마디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윤강이 민혁을 봤다. 민혁이 윤강을 봤다. 7년이라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그걸 메우려면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뭘 말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둘이 잠깐 그냥 있었다. 윤강이 먼저 시선을 내리면서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어떻게 지내긴. 뭐 먹고 뭐 하고 살았지." 민혁이 단백질 바를 씹다가 천장을 봤다. "좋다." "뭐가." "우리가 다시 모인 거." 짧았다. 별거 아닌 말처럼 나왔는데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윤강이 민혁을 봤다. 민혁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가, 민혁이 실없이 웃으면서 먼저 시선을 내렸다. "야, 근데 진짜 너네 이름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강이랑 산 있는 데서 낳았다고 이름을 강이랑 산으로 지어버려? 그게 말이 돼?" "말 돼." 윤산이 낮게 말했다. 윤강이 피식 웃었다. 소리가 없는 웃음이었다. "산이가 아직 그러네." "뭐가?" "아무것도 안 달라졌잖아." 민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글쎄." 윤강이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죽 한 숟가락을 천천히 뜨면서 말했다. "달라지지 않은 게 있다는 게 좋다는 거야." 민혁이 그 말을 받으면서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단백질 바를 씹는 소리만 났다. 윤산이 창에서 시선을 거두면서 형을 봤다. 윤강이 윤산을 봤다. "많이 컸네." 그 한 마디에 윤산이 굳었다. 왈칵 눈물이 나왔다.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참을 수가 없었다. 막으려다가 그냥 뒀다. 그 한마디에 그동안 홀로 버텨온 모든 결계가 전부 무너졌다. 민혁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복도에서 민혁이 눈을 한 번 비볐다. 코를 훌쩍이고 단백질 바를 꺼내서 씹었다. 한결이 복도 끝에 기대어 있었다. 민혁이 옆에 서면서 단백질 바 하나를 한결 쪽으로 던졌다. 한결이 받았다. 둘이 복도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됐냐." 민혁이 물었다. "네." "고생했." 한결이 포장을 뜯으면서 말했다. "민혁 형도요." 윤산이 복도로 나온 건 조금 뒤였다. 눈가가 아직 약간 붉었다. 한결이 그걸 단번에 알아챘다. 한결이 그걸 봤다. "강한결 씨." "네." "아직 열기가 남아있습니까." "조금요." 윤산이 머뭇거리며 살짝 한결의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본 한결이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리님, 손 잡는걸로는 부족해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대리님이 저 안아줘야 빨리 식을것 같아요." 윤산의 동공이 흔들렸다. 맞는 말인것 같은데 어딘가 속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한결이 입꼬리를 더 끌어올렸다. "안아줘요, 대리님." 윤산이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왔다. 어색하게. 그러다가 한 발짝 더 다가왔는데, 한결이 먼저 팔을 뻗어서 그 단단한 품 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아, 시원하다." 한결이 중얼거렸다. 윤산의 냉기가 그의 지독한 열기를 천천히 밀어냈다. 이마에 남아 있던 땀이 식는 감각이 났다. 윤산이 한결 등에 팔을 올렸다. 처음엔 어색하게, 그다음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복도가 조용했다. 그때 복도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윤강이 걸어오다가 멈췄다. 두 사람을 봤다. 잠깐 표정이 굳었다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묘한 기류를 파악한 것처럼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한결이 윤산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윤강을 봤다. "강이 형님. 괜찮으세요?" "어." 윤강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고마워." "별거 아니에요." "아니." 윤강이 한결을 똑바로 봤다. "진짜로." 한결이 윤산의 어깨에 기댄 채 잠깐 그 시선을 받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강이 복도를 걸어가면서 말했다. "밥은 어디서 먹어." 한결이 피식 웃었다. 윤산이 그 대화를 들으며 한결의 품에서 완전히 굳어 있었다. 자신이 지금 한결과 지나치게 밀착해 있는 상태에서, 형과 한결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는 상황이 늘 무덤덤하던 윤산에게조차 엄청난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온 듯했다. 시선이 한결과 복도 사이 어딘가에 걸려 있었다. 윤강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한결은 윤산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입술을 핥았다. 동기화의 후유증은 이미 가셨지만, 몸 안의 열기는 오히려 아까보다 더 뜨겁게 치솟고 있었다. 이번엔 능력이 아니라, 순전히 눈앞의 남자 때문이었다. "대리님, 저 아직 뜨거워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제 품 안에서 얌전히 체온을 나눠주는 윤산은 너무도 무방비해서, 한결은 이대로 그를 집어삼키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다. '이렇게 귀여운 건 반칙인데.' 한결의 눈동자 안쪽, 보랏빛 인광이 소유욕을 담은 채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일렁였다. 그때 복도 끝에서 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모여봐." 민혁이 단말기를 들고 서 있었다. 화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긴급속보 — 서울 용산구 전역 전파 두절. 위성 사진 확인 결과 해당 구역 지형 소실 확인. 원인 불명.] "구가 사라졌어." # 13화. 336시간 # 뉴스가 끊겼다. 속보 자막이 다급하게 지나가던 화면은 순식간에 검은 노이즈로 뒤덮였다. 민혁이 리모컨을 가볍게 두드리며 채널을 돌렸지만 전부 마찬가지였다. 용산구라는 단어가 언급되려 할 때마다 화면이 강제로 전환됐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한 뉴스 화면으로. 그 인위적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기괴했다. "언론 통제야. 통째로 덮으려는 거지." 민혁이 서버 쪽 의자에 깊숙이 앉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정부 보안 회선에 심어둔 백도어가 열리자 날것의 데이터들이 모니터로 쏟아져 내렸다. 그중 위성 사진 한 장이 메인 화면을 가득 채웠다. 방 안의 소음이 일시에 멎았다. 서울 전경을 상공에서 촬영한 고해상도 위성 사진이었다. 한강의 줄기와 번화한 도심, 익숙한 주변 구역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있어야 할 곳에 용산구가 없었다. '없다'기보다는 거대한 무언가에 파여 나간 형상이었다.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 처박힌 것처럼, 완벽한 원형의 공백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루나가 숨을 들이켜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진을 묵묵히 응시하던 윤강의 손끝에서 잘게 부서진 픽셀 입자들이 거칠게 뿜어져 나왔다가,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인구가 얼마예요." 원시인이 낮게 물었다. 민혁이 새로운 데이터 창을 띄우며 답했다. "등록 인구만 20만 3천 명. 야간 유동 인구까지 합치면 그 이상이었겠지."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20만이라는 숫자가 주는 중압감이 방 안을 짓눌렀다. 민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고, 루나는 구역질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이어졌다. 민혁이 피로한 듯 미간을 짚었다. "정부와 AD테크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어. 각자 수습하는 게 아니라 공조하는 중이야. 이건 처음 보는 패턴인데, 양쪽 다 원인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동시에 당황하고 있지. 자기들 계획에는 전혀 없던 대형 사고니까." 자연스레 윤산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화면을 보 한결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글자가 있었다. 백설의 자료에서 봤던 'Protocol: OS.' "형, 혹시 수조 영상 있어요?" 한결이 물었다. "아마 AD테크가 수조 감시 카메라 돌리고 있을 거야." 민혁이 재빨리 키보드를 두드렸다. "찾았다." 화면이 바뀌었다. 용산구가 소실됐었던 그날 밤. CCTV 재생 버튼을 누르자 화면 속 수조가 나타났다. 물이 차 있었다. 투명한 원통형 수조. 그 안에 형체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것. 백발, 전신 흉터, 가느다란 체형. 22년 동안 거기 있었던 것. 영상이 흘렀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수조 안에 미세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물이 흔들리는 게 아니었다. 수조 주변의 공간 전체가 잘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감겨 있던 눈이 아주 천천히 들어 올려지며, 초점이 완전히 풀린 회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은 모니터 너머의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은 채,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몇 초의 정적이 흐른 뒤, 수조 속 메마른 입술이 아주 살짝 벌어졌다. 음성은 녹음되지 않았지만, 그 선명한 입 모양을 방 안의 모두가 읽어낼 수 있었다. '시끄러워.' 이어서 수조 속에 묶여 있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볍게 까딱였다. 그 순간, CCTV 화면 전체가 격렬하게 뒤틀렸다. 노이즈 너머로 붉게 점멸하는 타임스탬프의 시각은 용산구가 통째로 증발한 시각, 그리고 원시인과 백설의 파동이 공명했던 순간과 소름 끼치도록 정확히 일치했다. OS의 눈이 감겼다. 화면은 원래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아, 쟤야? 맛 없게 생겼네." 서버 랙 위에 다리를 꼬고 걸터앉아 있던 백설이 입안의 사탕을 '오드득' 깨물며 중얼거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지만, 정작 그녀는 지루하다는 듯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혁이 화면을 정지 시켰다. 원시인은 덜덜 떨리는 자신의 두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날 밤, 백설과 파동이 맞물렸을 때 무언가 엄청 커다란 게 자기 안을 통과해 지나간 것 같았다. 그 공명이 수조 속에서 22년을 잠들어 있던 것을 깨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손 한 번 까딱한 것 만으로 20만 명을 사라지게 했다는 것. "....제가 한 거예요." 원시인의 나직한 고백에 방 안의 공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한결과 윤산이 무거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민혁이 타이핑을 멈추고 낮게 읊조렸다. "OS는 어차피 각성할 거였어. 시점이 당겨진 거야." "그게...결국 같은 말 아닌가요." 원시인의 목소리가 잘게 갈라졌다. "20만 명이잖아요." 민혁이 답을 하지 못했다. 원시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게 틀린 말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침통한 정적 속에서 한결이 화면 한 구석을 유심히 살피다 입을 열었다. "형, 수조 뒷쪽 상단 확대 해줄수 있어요?" 민혁의 마우스를 움직이자 흐릿했던 시스템 기록창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각성 완료 예상 시간] [352:14:27] 숫자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루나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저 당시 기록이 352시간이면, 지금 시간 기준으로 바꾸면 얼마나 남은 거지?" "336시간." 민혁이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14일이야. 완전 각성까지." 소파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윤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완전 각성도 아닌 상태에서." 혼잣말처럼 나왔다. 그 뒤를 잇지 않았다. 잇지 않아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었다. 완전 각성도 아닌 상태에서 구 하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각성 이후에는 규모가 달라진다는 것. "OS가 있는 오라클 내부 구조를 알아야 해." 윤강이 덤덤히 말했다. "AD테크에 있을 때 수조 쪽으로 간 적이 있어. 지금은 기억이 조각나서 정확하지가 않아." 윤강이 시선이 한결을 향했다. "내 머릿속에서 기억을 끄집어내야해." "형." 윤산의 걱정 가득한 눈이 윤강을 향했다. "괜찮아." 윤강이 짧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한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기억을 보는덴 저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어요." * 이안이 다크섹터로 온 건 한 시간이 채 안 돼서였다. "맥박을 통해서, 기억이 허공에 영상으로 재생되는 거예요. 제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고, 멈추거나 되감을 수 있어요. 원하시면 중간에 멈출 수 있어요." 이안이 테이블 옆에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윤강이 손을 내밀었다. 이안의 검지가 맥박 위에 닿자, 오래된 LP판이 돌아가는 것 같은 잡음이 공간 전체에 낮게 깔렸다. 허공에 빛이 층을 이루면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영에 떠오른건 어둠이었다.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감각이 있었다. 명령. 처리해야 하는 대상. 루트. 좌표. 감정이 없는 자리에 연산만 있는 상태가 영상으로 펼쳐졌다.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지 않은 무채색의 시야. 7년 동안 윤강이 있었던 곳이 저것이었다. 이안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영상이 빠르 흘렀다. 22층. 수조 앞. 수조 안의 형는 죽은 듯 고요했다. 파동이 없었다. 오라클 코어에서 뻗어 나온 무수한 기계 회로들이 아이의 척추와 뇌를 관통해 신경계 자체를 완벽히 대체하고 있었다. 이안이 한 화면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수조 모니터에 출력되던 극비 시스템 기록 문서가 확대되었다. [OS 설계 기반: Original Seed No.1 코어 파편 + 능력자 사냥 수거 파편 다중 이식 / 자아 회로 격리 / 감정 처리 모듈 비활성화] 원시인의 파편을 중심으로, 수년 동안 사냥 당한 능력자들의 잔해를 누더기처럼 기워 붙인 흔적들이 수조 속 형체의 전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게 저 상처 가득 몸이었다. "감정을 느낄수 있어요?" 원시인이 눈가가 붉어진채 시스템 문구를 보면서 말했다. "비활성화 상태면 감정을 느끼긴 힘들거야." 민혁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치만 없어진 게 아니잖아요...." 시인의 목소리엔 물기가 배어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시선히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수조 안에서 22년 있었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까요? 없어진게 아니라 격리됐다는 거잖아요. 감정이 있는데 막혀있는 거잖아요." 원시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윤강이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무 감정을 못느끼는게 더 나을수 있어."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시인이 어떤 감정으로 말을 하는지, 윤강이 어떤 마음으로 대답하는지, 모두들 알고 있었다. 이안이 손을 거두자 LP판 잡음이 멈추면서 영상이 신기루처럼 바스라졌다. 윤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억하는 자들 전부 모여야 해. 14일 안에 준비해야 하고, 지금 당장 움직이자."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통신망을 활성화했다. 루나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훈련도 시작해야겠지. 지금 우리 전력으로 저걸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어?" 백설이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나랑 닮았어. 근데 기분 나쁜 냄새가 나." "언리드에도 연락할게요." 한결이 가볍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섰다. "그런데, 오라클을 파괴하면 능력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한결의 말에 방 안이 다시금 고요해졌다. 능력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는 오라클이 만들어낸 부산물이었다. 오라클이 파괴면 그 부산물도 사라지는 건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것들은 남아있는 건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건 살아남고 나서 생각하자." 민혁이 단백질 바를 꺼내면서 말했다. 그 한마디를 신호로 다크섹터의 멤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시인은 여전히 테이블 앞에 가만히 굳어 있었다. 비활성화라고 했다. 격리라고 했다. 22년. 수조 안에서만. 그게 어떤 건지 원시인은 알 것 같았다. 기억이 완전히 날아간 채 아동 복지시설에서 눈을 뜨기 전, 자신 역시 저 어두운 수조에 처박혀 있었다는 공포와 연민이 그를 사로 잡았다. 윤강이 소파에서 일어나 원시인 옆에 앉았다. "시인아." "....네." "지금 너무 많이 생각하고 있어." 원시인이 물기 어린 눈으로 윤강을 올려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은 앞으로 14일이나 있어. 지금은 일단 일어나자." 원시인이 머뭇거리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두 사람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윤산의 귓가로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대리님, 저 아직 몸이 너무 뜨거운데요." 윤산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코끝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강한결이 서 있었다. 이 시간이면 발열이 완전히 가라 앉고도 남았을텐데. 한결은 계속해서 윤산에게 몸을 붙여왔다. 윤산은 한결의 행동에 의문을 가졌지만 조심히 손을 내밀었다. "손 잡고 있으면 됩니까." "우선은요." 한결이 기다렸다는 듯 윤산의 길고 창백한 손가락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윤산의 차가운 피부 위로 한결의 뜨거운 체온이 침범하듯 스며들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열기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윤산은 차마 그를 쳐다보지 못한 채 멎어버린 화면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우선은요' 머릿속에 한결의 말이 맴돌았다. 윤산의 창백한 피부 위, 귀 끝이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었고, 그 모습을 한결은 만족스럽다는 듯 조용히 감상했다. 그 시각, 다크섹터 서버 화면 구석에선 붉은 카운트가 조용히 줄어들고 있었다. [335:02:41] # 14화. 아크 # 공간이 접혔다. 말 그대로였다. 서울 외곽 버려진 지하 주차장 벽면이 민혁의 손짓 하나에 조용히 안으로 말리더니, 존재하지 않던 공간이 마치 낡은 종이처럼 서서히 접히며 바닥이 열리기 시작했다. 원시인이 그 광경을 보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물리 법칙이 무시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원시인은 기묘하게 일렁이는 통로의 가장자리를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확인하며 어두컴컴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내려가야 해요?" 원시인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민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짓을 해 보였다. "들어와봐." 민혁이 아무렇지 않게 안으로 먼저 걸어 들어가며 말했다. 원시인은 벽면 가장자리를 한 번 손끝으로 툭 건드려 보고는 뒤를 따랐다. 통로 벽면에 닿는 공기가 달랐다. 바깥의 퀴퀴한 지하 주차장 냄새가 경계선을 넘는 순간 뚝 끊기고, 냉각된 서버 냄새와 먼지를 뚫고 살아 있는 공기가 코를 채웠다. 한결은 당연한 듯 윤산 옆에 밀착하여 함께 하강 통로로 진입했고, 루나와 백설, 가장 마지막으로 윤강이 들어섰다. 입구였던 공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매끈하게 맞물려 닫혔다. 수직 낙하의 공포는 없었다. 보이지 않는 바닥의 흐름을 타고 서서히 가라앉는 동안, 통로 벽면의 재질은 매 층마다 눈에 띄게 변화하고 있었다. 처음에 거친 콘크리트 질감이었던 벽면은 어느새 매끄러운 강화 합금으로 바뀌더니, 더 깊은 곳에 도달하자 수겹의 다층 방호벽으로 삼엄하게 무장한 형태로 거듭났다. 시야에 들어오는 방어 체계가 견고해질수록 이 거대한 지하 요새의 규모가 어떠할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통로 끝에서 바닥이 나타나고 발이 닿는 순간 공간이 한꺼번에 열렸다. 원시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거대했다. 지하인데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수십 미터는 될 것 같은 수직 공간이 뚫려 있었고, 여러 층으로 이어진 통로들이 벽면을 타고 연결돼 있었다. 중앙은 거대한 아트리움의 형태로 개방되어 있어 층마다 배정된 각기 다른 기능의 구역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기억하는 자들이 보호중인 능력자들이 거주할 수 있는 독립된 생활 구역, 홀로그램 모니터가 쉴 새 없이 점멸하는 대규모 작전 통제실의 유리 벽면과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식당, 그리고 휴식 공간이 입체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정부의 감시망에서 구해낸 50여 명의 능력자가 이곳에서 완벽히 보호받으며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윤강은 말없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내 사방을 모두 훑어본 윤강의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많이 바꼈네." "뭐, 보호할 인원이 늘어났으니까." "고생했다." 윤강의 말에 민혁이 잠깐 입을 멈췄다. 코를 한번 훌쩍이며, 붉어진 눈가를 숨기고 괜히 시선을 돌린 채 단백질 바를 꺼내서 씹었다. 백설은 원시인 옆에서 코를 찡긋거리며 주변 공기를 킁킁 맡았다. "냄새 많이 나. 이상한 냄새." "능력자들이 많이 있으니까요." 원시인이 웃으면서 한 발짝 비켜서자 백설이 인상을 찌푸렸다. "맛없는 거. 아저씨들 냄새 별로야." "상처받는데." 민혁이 중얼거렸지만 백설은 듣지도 않았다. 한결은 중앙 공간을 내려다보다가 자연스럽게 윤산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어깨가 맞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윤산이 옆을 돌아봤다. "아직도 뜨겁습니까." "몸 안쪽이 계속 달아올라요." 윤산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그렇습니까." 한결이 작게 웃었다. "대리님이 만져줘야 식어요." 윤산의 창백한 귓가가 붉어졌다. ".....제가 차가우니까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윤산은 대답할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차가웠던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윤산의 얼굴을 바라보던 한결의 입꼬리가 또 한번 올라갔다. * 회의는 이튿날 열렸다. 13개 구역의 리더들과 동행자들이 하나둘 아크로 도착하는 데만 하루가 걸렸다. 총 26명. 그리고 회의 시작 20분 전, 마지막으로 언리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결을 제외한 8명. 그들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웅성이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아수라였다. 거대한 체구에 붉은 문신이 새겨진 팔, 거칠게 걸친 가죽 조끼. 그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공기 자체가 묵직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 뒤를 류가 따라 들어왔다. 검은 테크웨어 차림에 낮게 묶은 흑발.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서늘한 눈빛이 회의실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제로, 이안, 미라쥬, 하데스, 발키리, 위버까지 차례대로 자리를 잡자 회의실 한쪽이 완전히 다른 영역처럼 느껴졌다. 서울 2구역 리더 박건이 작게 혀를 찼다. "저 사람들이 언리드야?" 옆자리의 소라는 대답 대신 마른침만 삼켰다. 꽃무늬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올린 채 들어온 여자가 방 안 공기를 훑더니 혀를 찼다. "아이고, 다들 장례식 왔어요? 얼굴들 왜 이래요." 부산 쪽에서 올라온 경상 10구역 대표 부산댁이었다. 목소리가 시원하게 컸다. 경상도 억양이 실린 그 한마디에 방 안이 순간 흠칫했다가, 여기저기서 아주 낮게 웃음 소리가 나왔다. 굳어 있던 공기가 서너 도쯤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한결이 회의실을 둘러보며 윤산이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윤산이 앉는 순간 한결이 바로 옆에 찰싹 붙어 따라 앉았다. 그러고는 슬쩍 윤산 쪽 팔걸이에 제 팔꿈치를 올리면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 기척에 윤산이 앞을 보면서 말했다. "또 뜨겁습니까." "항상 뜨거워요, 대리님 옆에서는." "......" 윤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듯한 창백한 손끝이 의자 팔걸이를 아주 잠깐 꽉 쥐었다가 풀렸을 뿐이었다. 하얗게 질린 손마디를 본 한결 입꼬리가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들어왔다. 한 박자 늦게, 문이 열렸다. 윤강이었다. 원시인은 그 순간을 나중에도 꽤 오래 기억했다. 뭔가 극적인 일이 벌어진 게 아니었다. 윤강은 그냥 걸어 들어왔다. 걸음이 특별히 느리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방 안 온도가 달라졌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숨을 고르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누구도 입을 막지 않았지만,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윤강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십 개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단상으로 걸어갔다. 아수라가 팔짱을 풀었다. 아수라 본인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손이 그냥 옆구리 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멈췄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서 정리되는 것 같았다. "윤강 리더. 살아 있었구만." 장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7년 전 그를 잃었다고 믿었던 이들의 회한이 응축되어 있었다. 윤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살아서 돌아왔으면 됐어. 그거면 충분해."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눈가를 훔쳤다. "자리 잡았으면 시작할게요." 민혁이 단상 앞으로 나아가 홀로그램을 활성화했다. 용산구의 위성 사진이 공중에 떠올랐다. 거대한 운석이라도 박힌 듯 움푹 패여 소멸해버린 도시의 심장부. 회의실 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린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OS의 각성 전조, 336시간의 카운트다운, 그리고 수조 속의 영상. 강원 6구역 설희가 손을 들었다. "완전 각성 시 규모가 어느 정도예요." "용산구 소실이 완전 각성도 아닌 상태에서 일어난 거예요." 한결이 구석에서 말했다. 설희가 그쪽을 봤다. "완전 각성 이후는 예측이 안 돼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충청 7구역 장태식이 낡은 헌팅캡을 벗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요." "OS 가동 전에 오라클을 파괴하는 거예요." 민혁이 말했다.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윤강이 민혁에게서 단말기를 넘겨받았다. 화면이 바뀌며 오라클 타워의 복잡한 내부 구조가 입체 홀로그램으로 펼쳐졌다. "지난 7년 동안 내부에 머물며 파악한 데이터들입니다. 코어의 위치, 진입 가능한 루트, 그리고 시스템 방어 레이어의 패턴.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역할 분담을 시작할 겁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14일입니다." 장태식이 고개를 끄덕였고, 설희는 바쁘게 메모를 시작했다. 박건도 팔짱을 풀고 상체를 숙여 도면을 살폈다. 누군가 낮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긴장감의 한복판에서, 지독하게 이질적이고 황당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언리드의 핵심 전력인 강한결이 언리드가 아닌, 엉뚱하게도 ‘기억하는 자들’ 윤산의 바로 옆 자리에 찰싹 붙어 앉아 주변의 살벌한 눈초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직 윤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언리드의 아수라가 참지 못하고 혀를 찼다. 한결은 집중하고 있는 윤산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 보고 있었다. 윤산의 새까만 눈동자가 홀로그램속 도면을 예리하게 훑고 있었다. 한결은 윤산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귓가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대리님." ".....회의중입니다." "알아요. 그런데 진짜 뜨거워서 그래요." 윤산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숨결이 엉키는 거리에서 한결이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윤산의 동공이 크게 일렁였다가 이내 앞을 향했다. ".....나중에, 회의 끝나고 식혀드리겠습니다...." 한결이 눈꼬리를 살랑거리며 더 바짝 다가왔다. "기다릴게요." 윤산의 하얀 목선이 붉게 물들었다. 루나가 그 광경을 힐끗 보고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 회의가 끝난 건 세 시간 뒤였다.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넓은 회의실엔 민혁과 윤강만이 남았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난 윤강이 민혁의 자리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워지자 민혁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뭐." "아니." "뭔데." 윤강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 예상치 못한 묵직하고도 진솔한 한마디였다. "......갑자기 뭔 소리야, 징그럽게." 윤강은 무심한 듯 시선을 돌리며 덧붙였다. "7년 동안, 이곳을 버텨준 거." 민혁이 딱딱하게 굳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단백질 바를 꺼냈다. 씹었다. 시선을 화면 쪽으로 팔면서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윤강은 그런 민혁의 등을 한 번 툭 치고는 회의실을 나섰다. "야!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가라고!" 민혁의 외침에도 윤강은 돌아보지 않았다. 민혁은 투덜거리며 단백질 바를 씹었지만, 화면을 조작하는 그의 손가락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 보였다. * 배정받은 방은 아크 3층 끝자락이었다. 원시인은 짐을 내려놓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 하나와 작은 테이블이 전부인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창문 대신 자리 잡은 조명이 의외로 아늑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벽이 두꺼운 덕분인지 아크 내부의 소음이 완벽히 차단되어 있었다. 원시인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용산구, 20만 명의 소멸, OS, 336시간. 숫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헤엄쳤다. 그 사이로 윤강의 연청색 눈동자가 자꾸만 겹쳐졌다. 아무것도 없어야 할 회색이어야 하는데, 자꾸만 그 안에서 무언가를 읽어내고 싶어졌다.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윤강이 들어섰다. 그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테이블 앞에 의자를 뒤로 돌려 앉았다. 등받이에 팔을 얹고 턱을 괸 채 원시인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담담했다. "좁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원시인이 작게 웃었다. 윤강은 대답 대신 가만히 원시인을 지켜보았다. 뭔가를 캐묻거나 재촉하지 않는,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해 주는 듯한 시선이었다. "잠 안 올 것 같아서 오셨어요?" 원시인이 물었다. "아니. 니가 못 잘것 같아서." 원시인이 그 말을 받으며 윤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윤강은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냈다. "OS 사진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요." 원시인이 말했다. 윤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22년이잖아요. 수조 안에서만. 저는 네 살 때 나왔고 그전 기억도 없는데, 근데 OS는 22년이에요. 감정이 격리되었다는 건, 없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저도 수조 안에 있었는데 지금 이렇게 감정을 느끼거든요. 그러면 OS도...." 말이 끝맺지 못하고 흐려졌다. 윤강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낮게 읊조렸다. "생각해봤어?" "네. 그런데 파괴해야 한다는 것도 알아요."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동시에 있어요." 윤강이 등받이에 얹은 팔 위로 고개를 묻었다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랬어." 원시인이 윤강을 봤다. "픽셀로 흩어져 있을 때, 감정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눌려 있는 거랑 없는 건 다르거든. 나조차 몰랐던 것들이 내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어." 방 안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고요했다.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나는 알거든." 윤강이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서 원시인을 봤다. 연청색 글리치가 아직 홍채 안쪽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처음 골목에서 봤던 그 파괴적인 눈빛과는 달랐다. 원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뭐라고 딱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동정심 느끼는 거, 잘못된 거 아냐." "........." "근데 그건 나중 일이야. 지금은 14일이 먼저고." 원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 "응." "아까 회의실에서. 들어왔을 때 다들 조용해졌잖아요. 무서웠어요, 사실은. 처음 봤을 때." "그랬겠지." "근데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윤강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원시인은 피하지 않고 그 연청색 눈을 마주 보았다. "뭐가 다른데." "눈이요. 그때랑 지금, 눈이 달라요." 윤강은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손등 위로 픽셀 입자들이 작게 새어 나왔다가 다시 살결 속으로 가라앉았다. "자. 14일 동안 쓸 체력은 남겨둬야 하니까." 윤강이 일어서서 문으로 향했다. 원시인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숫자들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아크 어딘가에서 카운트가 조용히 줄어들고 있었다. [311:58:34] # 15화. 아직은 # 아침이 왔는데도 아크는 조용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뒤 각 구역 리더들이 배정된 생활 구역으로 흩어지는 데만 밤이 꼬박 걸렸고, 언리드 쪽은 애초에 정해진 방 같은 걸 원하지 않는지 제각각 아크 구석을 차지하고 누웠다. 아수라는 복도에서 잤고 제로는 서버실 한쪽에 이어폰을 꽂은 채 벽에 기댄 자세로 눈을 감았다. 발키리만 유일하게 정식으로 방을 배정받겠다고 했다. 민혁이 그 상황을 보면서 초콜릿 바를 씹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들 관리는 어떻게 하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식당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건 오전이 꽤 지나서였다. 아크 내부에 거주하는 보호 인원들은 이미 자기들만의 루틴이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낯선 얼굴들이 섞여 들어오는 것에 노골적으로 경계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었다. 어쩌면 당연했다. 어제까지 이 공간은 민혁이 7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세계였으니까. 원시인이 쟁반을 들고 자리를 잡으려는 찰나, 식당 입구 쪽에서 낮은 파열음이 들렸다. 치익—! 순식간이었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식당 벽면이 일제히 일렁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웅장한 다크 판타지풍의 중세 주점으로 탈바꿈했다. 거칠게 깎아낸 석조 벽면을 따라 횃불 홀로그램이 타오르고, 허공에는 ‘위대한 아크의 용사들이여, 격전을 치를 준비가 되었는가!’ 라는 오글거리는 퀘스트 팝업창이 푸른 빛으로 떠올랐다. 아크의 연산 자원을 통째로 끌어다 쓴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정교한 홀로그램이었다. 원시인이 쟁반을 든 채 멈췄다. ".........또." 입구 쪽에 민혁이 번쩍이는 판타지풍 전사 갑옷 홀로그램을 겹쳐 입고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아크의 절대 군주 / Lv.99 / 상태: 만성 피로]라는 글자가 번쩍였다. 민혁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윤강의 머리 위로 [길을 잃은 전설의 길드장 / Lv.99 / 상태: 7년 무단 이탈 — 길드 해산 위기] 라는 글자가 둥실 떠올랐다. 윤강이 머리 위의 빛나는 글자를 올려다봤다. "주민혁. 안 끄냐." "7년간의 공백을 깨고 귀환한 전설의 마스터를 위한 환영 이벤트다." 민혁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때 허공의 시스템 창이 잠깐 깜빡이더니 아크 전체에 웅장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길드 마스터 권한으로, 기여도 패널티 부여!" 식당 안이 술렁거렸다. 일부는 당황한 얼굴이었고, 일부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웃음을 참고 있었다. 윤강이 눈을 감았다 뜨면서 천천히 제 머리 위에 뜬 글자를 손으로 휘저어 지워냈다. "민혁아." "하지만 7년 잠수는 길드 규칙상 기여도 200포인트 차감 사유야. 룰은 룰이니까." 그때 식당 한쪽에서 누군가 들어왔다. "마스터, 규정을 위반한 무단 침입자를 처리하고 왔습니다." 한결이었다. 그는 짙은 흑색 판타지 검사 복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었다. 어깨에서 발목까지 내려오는 코트 형태의 복장이었는데, 저게 홀로그램이라는 게 오히려 억울할 만큼 잘 어울렸다. 저 피지컬에 그 얼굴이니 뭘 입혀도 그렇겠지 싶으면서도, 막상 눈앞에서 보면 말문이 막혔다. 마치 영화 포스터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머리 위에도 시스템 창이 하나 떠 있었다. [심연의 집착남 / Lv.MAX / 상태 : 공략 불가 NPC 전담 공략중 - 전용 타깃: 윤산(대리님)] 한결이 능청맞은 미소를 지으며 윤산의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제 타이틀 어때요, 대리님." 그리고 한결이 손가락을 튕기자 윤산의 머리위에도 상태창이 떴다. 윤산이 제 머리 위에 뜬 [공략 불가 철벽 NPC / 상태: 얼음장 같은 방어력이 무너지는 중 ] 창과 한결의 창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NPC가 뭡니까."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여서, 공략 못 하는 캐릭터요." 한결이 윤산 쪽으로 몸을 슬쩍 기울이자 차갑던 윤산의 피부에 기분 좋은 열감이 훅 끼쳐왔다. 한결이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낮게 읊조렸다. "물론, 저 빼고요." "....왜 제가 타깃입니까." "제 사심이에요." 한결의 뻔뻔한 대답에 윤산은 그냥 쟁반을 들고 자리를 잡으러 걸어갔다. 자리로 가는 윤산의 하얀 목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한결이 낮게 웃으며 그 뒤를 아무렇지 않게 따라붙고는 윤산의 바로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꿰차고 앉았다. 루나가 그 광경을 보고 음료를 마시다 작게 킥킥거렸다. 민혁이 초콜릿 바를 꺼내서 씹었다. 구석에서 죽을 먹던 윤강이 윤산 쪽을 한 번 봤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저거 언제부터야." "몰라." 잠깐 침묵이 흘렀다. "...민혁아." "어." "괜찮아?" 민혁이 초콜릿 바를 한 입 더 씹었다. 시선이 한결과 윤산 쪽으로 잠깐 갔다가 돌아왔다. "괜찮아야지." 아크의 식당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소란이 번졌다. 판타지 주점 분위기 속에서 각자의 시스템 창을 머리 위에 달고 밥을 먹는 광경이 묘하게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백설은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 창을 손으로 잡으려다 통과하자 사탕을 오드득 씹으면서 흥미를 잃었다. *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점심이 지났다. 원시인이 아크 3층 복도를 걷다가 민혁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복도 끝 작은 기계실 앞에서 민혁이 패널을 열어두고 배선을 점검하고 있었다. 단백질 바를 한 손에 쥔 채였다. 오래 해온 일처럼 익숙한 자세였다. 원시인이 옆에 멈춰 서서 안을 들여다봤다. "여기도 민혁 형이 만든 거예요?" "응. 배선, 시스템, 홀로그램 이런것들. 이 지하 구조물은 처음엔 버려진 곳이었고." "7년 동안 혼자요?" "강이랑 산이랑 같이 계획했고, 나중에 사람 생기면서 같이 했는데, 초반 설계랑 골조는 나야." 민혁이 배선 하나를 손끝으로 짚으면서 말을 이었다. "공간이 필요해서 시작했어. 숨겨야 할 사람들. 갈 데 없는 능력자들. 처음엔 그냥 작게 하나 만든 건데, 들어오는 사람이 생기니까 방이 필요했고, 방이 있으니까 먹을 게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어." 원시인이 복도 벽을 손끝으로 짚었다. 오래된 콘크리트 위에 덧댄 합금이 매끄러웠다. "기억하는 자들엔 처음부터 있었어요?" 민혁이 패널을 닫으면서 몸을 돌렸다.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끼는 자세였는데, 말을 꺼내기 전에 단백질 바를 한 번 더 씹었다. "아니. 강이가 먼저 들어갔고 나랑 산이는 따라갔어." 짧게 말하고 잠깐 멈췄다. "강이랑 산이 부모님이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어. 사고로. 그 다음에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어, 오래. 우리 부모님이 걔네를 그냥 데리고 살았거든." 원시인이 민혁을 봤다. 민혁은 벽을 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우리 부모님 능력이 갑자기 발현됐어. 늦게.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갑자기 헌터가 왔어." 민혁이 단백질 바 포장지를 손으로 접었다. "강이가 그때 제일 먼저 움직였어. 우리 부모님 지키려고. 근데 못 막았지. 그 다음에 강이가 기억하는 자들 찾아갔고, 나랑 산이는 따라갔어." 복도가 조용해졌다. 환기 팬이 돌아가는 낮은 소음만 배경처럼 깔렸다. 민혁은 표정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 울거나 무너지는 게 아니라, 오래전에 이미 그 감정을 어딘가에 다 쏟아낸 사람처럼 그냥 말하고 있었다. "강이가 통합 리더 됐을 때 사람 지킬 공간이 필요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거였으니까." 민혁이 잠깐 피식 웃었다. 유쾌한 웃음이 아니라 그냥 표정이 움직인 것 같은 웃음이었다. "근데 강이가 사라졌잖아. 7년 전에. 그 다음부터는 그냥 버텼어. 계속 오는 사람들 받으면서." 원시인이 벽에 등을 기대고 민혁 옆에 천천히 앉았다. 민혁이 옆을 봤다. "왜 거기 앉아." "그냥요." 민혁이 더 묻지 않았다. 단백질 바 포장지를 손 안에서 뭉개면서 정면을 봤다. 한참 있다가 낮게 말했다. "이제 강이가 돌아왔으니까 달라지겠지." 원시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아서 같은 방향을 봤다. 복도 끝에서 아크의 환기 소음이 조용히 계속됐다. * 훈련은 오후부터 시작됐고 저녁이 지나도록 끝나지 않았다. 아크 지하 훈련 구역은 처음부터 넉넉하게 설계된 공간이었다. 충격 흡수 소재로 벽면을 덮었고 능력 파동을 분산시키는 패널이 사방에 박혀 있었다. 각 구역 리더들과 언리드가 처음으로 한 공간에서 움직이는 건 14일 계획의 첫 번째 단계였다. 실전 전에 서로의 능력 파동에 익숙해지는 것, 한 공간에서 부딪히지 않는 법을 몸으로 먼저 익히는 것. 아수라와 13구역 리더의 능력이 맞붙으며 벽면 한쪽이 통째로 날아가는 사고가 있었고, 제로가 Null을 펼치면서 훈련 구역 절반이 기묘하게 고요해지는 일도 있었다. 구역 리더들과 언리드가 서로 드러내던 경계가 훈련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다른 종류로 바뀌어 갔다. 경계에서 확인으로, 확인에서 조심스러운 인정으로. 밤이 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훈련 구역이 거의 비었을 때 한결과 윤산이 남아 있었다. 딱히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윤산이 자료를 검토하면서 남아 있었고 한결이 나가지 않았다. 이유를 물을 것도 없이 그냥 그렇게 됐다. 한결이 윤산 옆에 벽을 등지고 앉으면서 자연스럽게 어깨가 맞붙었고 윤산이 그쪽을 보지 않고 단말기를 내려놨다. "훈련 어떻게 봤습니까." "잘 됐어요. 생각보다 빨리 굴러가던데." "아수라 씨가 벽을 날렸습니다." "그건 좋은 거예요. 출력 확인이 된 거니까." 윤산이 단말기를 무릎 위에 올리면서 정면을 봤다. 훈련이 끝난 구역은 조명이 반쯤 꺼져 있어서 바닥 쪽 유도등만 낮게 빛나고 있었다. 한결이 그 빛에 옆얼굴을 드러낸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깐 물어봐도 됩니까." "뭐든요." "AD테크 잠입 전에, 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한결이 천장을 보다가 픽 웃었다. 대답이 나오기까지 딱 한 박자 늦었다. "알고 있었어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어느 정도입니까." "리스크 정도요. 저체온. 시각화 계열 능력. 대략적인 강도." 한결이 천장에서 시선을 내리지 않은 채 말했다. "자세한 건 몰랐어요." "그래서 접근했습니까." "흥미로웠어요. 저랑 반대였으니까." 한결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능력이 일찍 발현됐거든요, 저는. 다섯 살쯤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주변 사람이랑 파동이 맞으면 걔네 감각이 느껴지는 게 그냥 다들 그런 줄 알았거든요. 언리드에서 스카웃 연락이 온 게 열 살이었는데." "열 살에요." "네. 그때 당시 담당자분이 찾아와서 설명을 해줬어요. 본인은 엄청 진지하게 얘기하셨는데." 한결이 입꼬리를 올렸다.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저?" "뭐라고 했습니까." "재밌겠네요, 라고 했대요. 열 살짜리가." 한결이 낮게 웃었다. "담당자분이 나중에 얘기해줬는데, 당황하셨대요. 보통은 무서워하거나 우는데 그냥 재밌겠다고 해서." "실제로 재밌었습니까." "네." 대답이 바로 나왔다. "심심하지 않았어요. 언리드에 있으면 즐길 게 많았거든요. 일도 그렇고, 사람들 처리하는 것도 그렇고.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게 좋았어요. 매번 달랐으니까." 한결이 천장에서 시선을 내려서 정면을 봤다. "AD테크 잠입 임무가 떨어졌을 때도 비슷했어요. 또 뭔가 재밌는 게 나오겠구나, 그 정도."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근데 실제로 본 대리님은 달랐어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한결이 그 시선을 받으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평소처럼 여유롭고 느긋한 표정이었는데, 눈빛만 달랐다. "어떻게 달랐습니까." "그건 나중에요." 한결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대리님은요,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기억하는 자들에." 윤산이 단말기를 내려다봤다. "형 따라서요." "그게 다예요?" "처음엔요." 윤산이 말했다. "형이 가는 곳이라서였어요. 민혁이도 같이 갔고." 한결이 그 말을 받으면서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산의 옆얼굴을 봤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거뒀다. 훈련 구역 바닥의 유도등이 두 사람 발 아래에서 낮게 빛나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지금은 왜 있어요, 여기." 윤산이 그 질문을 받으면서 잠깐 정면을 봤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한결은 재촉하지 않고 그냥 옆에서 기다렸다. ".....지금은 제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한결이 그 말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윤산 쪽으로 돌렸다. 윤산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스스로 한 말의 무게를 느끼는 것 같았다. 한결이 잠깐 그 옆얼굴을 봤다가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멋있네요." "........" "다음에 물어볼게요, 나머지는." 한결이 어깨를 윤산 쪽으로 더 기울이면서 말했다. "그것보다 대리님, 저 아직 열기가 좀 남아있는데요." "훈련 끝난 지 두 시간 됐습니다." "체질이에요." "......거짓말입니다." 한결이 윤산을 봤다. 윤산도 한결을 봤다. 눈이 마주친 채로 윤산이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미." 한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잡혔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쪽이 더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알았어요?" "......네." "근데 알면서도 계속 식혀주고 있잖아요." 대답하지 않았다. 윤산의 창백한 피부에 색이 입혀지며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게 부정이 아니라는 걸 한결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침묵이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제일 솔직한 언어였다. 한결이 등을 벽에 기대면서 눈을 반쯤 감았다. 윤산의 냉기가 어깨를 타고 조금씩 스며드는 감각이 났다. 이상했다. 저 차가운 얼굴을 매번 무너뜨리고 옆에 붙어 있는 이 시간이 묘하게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재밌다는 단어만으로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단어가 당장 떠오르는 것 도 아니었다. 윤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위험해지는 것도 싫었다. 옆에 있고 싶었다.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온도가, 이 거리가, 지금 이 자리가 싫지 않다는 감각이 이유 없이 선명했다. 한결은 제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의 정체가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래서 그걸 말로 꺼낼 생각이 아직 없었다. 아직은. 훈련 구역 한쪽 벽의 카운트가 낮게 깜박이고 있었다. [299:41:17] # 16화. 시뮬레이션 # 회의는 오전부터 시작됐다. 전날 하루 종일 훈련 구역에서 서로의 파동을 맞춰보고 모인 자리엔 처음과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서로가 어느 정도인지는 몸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아크 작전실 한가운데 윤강이 펼쳐놓은 오라클 시설 내부 구조도 홀로그램이 입체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안이 끌어낸 윤강의 기억속 내부와 민혁이 해킹으로 찾아낸 최신 설계도를 겹쳐놓은 것이었는데, 층마다 다른 색으로 구분된 방어 레이어가 허공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지하 최하층, 수조가 있는 구역 바로 아래에 코어 구역이 붉은색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22층짜리 시설입니다. 지하 6층까지 포함해서." 윤강이 홀로그램을 손으로 짚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코어는 지하 5층. 수조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조를 건드리지 않고 코어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는 두 개예요. 하나는 서쪽 환기 샤프트, 하나는 동쪽 연구동 통과." "서쪽은 센서가 많아." 민혁이 단말기를 보면서 말했다. "해킹으로 차단할 수 있는데, 차단하는 순간 시설 전체에 이상 신호가 잡혀. 동쪽이 낫고." "동쪽은 인원이 많습니다." 윤산이 구조도를 살피면서 말했다. "연구동 기준으로 고등급 직원만 최소 열다섯은 상주합니다." "그건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한결이 팔짱을 낀 채 홀로그램 쪽을 봤다. 회의실 구석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특별히 메모를 하거나 자료를 들여다보는 것도 아니면서 놓치는 게 없는 눈이었다. "동기화 범위 안에 들어오면 전원 묶어놓을 수 있어요. 근데," 한결이 나직하게 말을 끊으며 턱짓을 했다. "OS 얘기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방 안에 낮게 긴장이 번졌다. 윤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홀로그램을 바꿨다. 그곳은 수조 구역이었다. 백발에 회색 눈동자, 전신 흉터로 뒤덮인 형체가 수조 안에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은 고요함이었다. "현재 각성 예상 시간은 카운트다운 기준 약 열하루 뒤입니다." 윤강이 말했다. "우리가 그 전에 코어를 파괴하면 OS는 코어와 연결된 상태에서 함께 붕괴됩니다. 코어가 OS의 생체 연결망이기 때문에." "만약에 OS가 먼저 깨어나면요." 한결이 물었다. 장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계획이 바뀝니다." 윤강이 담담하게 말했다. "OS가 코어와 연결된 채로 각성하면 코어만 공략하는 게 아니라 OS를 막으면서 동시에 코어를 파괴해야 해요. 두 곳을 동시에." "그게 가능한거예요?" 원시인이 조용히 물었다.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OS를 직접 본 건 윤강뿐이었고, 그의 굳은 눈빛이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최악을 기준으로 짜야 합니다." 윤산이 말했다. "OS가 각성했을 경우를 전제로 작전을 짜두고, 각성 전에 코어를 파괴하면 그쪽으로 전환하는 거죠." 장태식이 헌팅캡을 벗으면서 말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OS를 누가 막습니까." "저요." 한결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동작은 가벼운데 눈빛에는 농담기가 없었다. "OS 뇌파에 싱크를 걸어서 고정할 수 있어요. 묶어두는 거죠. 그 사이에 시인 형이 코어를 삭제하면 연결 회로에 역충격이 가고 동시 붕괴가 일어나요." 경상 10구역 리더 부산댁이 선글라스를 올리면서 끼어들었다. "OS가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매요. 그걸 한 명이 싱크로 묶어놓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되게 만들어야죠." 한결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역할 배분은 윤강과 민혁이 교대로 진행했다. 침투팀은 다섯. 한결, 윤산, 윤강, 원시인, 백설. 민혁이 통로를 열고 시설 내부로 직접 밀어 넣는 것. 통로를 유지하는 데만도 민혁의 능력이 전부 쏟아져야 해서, 그가 전투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통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해킹도 돌려야 하는 거야?" 루나가 물었다. "응." 민혁이 단백질 바를 씹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경보 시스템 차단이랑 통로 유지 둘 다. 동시에." "그 대가는." "빠르게 타겠지." 민혁이 짧게 끊었다. 루나가 그 옆얼굴을 봤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외곽 방어는 나머지 전원이었다. 한결을 제외한 언리드 여덟명과 기억하는 자들 구역 리더들. AD테크 고등급 능력자와 DAB 헌터들이 증원 병력으로 쏟아질 게 확실했다. "언리드가 정문 쪽을 맡아요." 한결이 말했다. "아수라가 최전방에 서고, 류가 궤도 차단. 하데스가 외곽 그림자 묶고, 발키리가 공중 전력 정리해요. 미라쥬는 교란, 위버는 정보 차단이고." "기억하는 자들 쪽은." 윤강이 이어받았다. "장태식 씨가 충청 팀이랑 좌측 전선 맡아주시고, 박건 씨가 서울 2구역이랑 우측으로. 경상 쪽은 최강준 씨가 정면 돌파 쪽을 눌러주시면." "다 써도 됩니까, 부분 수화." 최강준이 수염을 긁적이면서 물었다. "다 쓰세요." 최강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적 교란." "전문이죠." 루나가 짧게 말했다. 백설은 회의 내내 막대사탕을 씹으면서 홀로그램 수조 구역을 보고 있었다. 딱히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시선이 그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백설 씨는 침투팀이에요." 한결이 말했다. "OS가 각성했을 경우, 에너지를 흡수해서 속도를 줄이는 역할." 백설이 사탕을 씹던 걸 멈췄다. 수조 쪽을 보면서 코를 가볍게 찡긋했다. "냄새 나." "......네." 아주 잠깐 눈빛이 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좋아." 그게 전부였다. 대가도 위험도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은 무관심한 대답. 원시인이 백설 쪽을 봤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회의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민혁이 말을 꺼냈다. "산아." 민혁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이즈 쉐어." 방 안에 낮게 정적이 깔렸다. 루나가 민혁을 봤다가 윤산을 봤다. 윤강이 단말기를 내려다봤다. "한결이한테는 반대로 작용할 거야." 민혁은 여전히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초콜릿 바를 천천히 씹으면서. 윤산이 잠깐 굳었다. "......훈련에서 해볼게." 민혁이 초콜릿 바를 한 입 더 씹었다. 한결과 윤산이 훈련 구역 한쪽에 섰을 때,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거리를 뒀다. 딱히 신호가 있었던 게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달랐다. 윤산이 먼저 말했다. "아이즈 쉐어라고 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시각을 공유하는 거죠. 제가 보는 걸 상대가 보게 되고, 상대가 보는 걸 제가 보게 됩니다." 한결이 윤산을 봤다. 먼저 말을 꺼냈다는 게 의외였다. "처음 능력을 파악할 때 민혁이랑 한 번 써봤습니다." 윤산이 말을 이었다. 시선이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시각을 공유 한 민혁이가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민혁 형, 많이 위험했나요." "......동사 직전까지 갔습니다." 한결이 입을 다물었다. 민혁이 회의에서 그 말을 꺼낸 이유가 거기 있었다. 직접 겪어봤으니까 위력을 알고, 윤산이 자신 때문에 쓰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민혁이 직접 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근데." 윤산이 한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결 씨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괜찮은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한결이 윤산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한결이 온전히 지워줄 수 있을 거라는 신뢰와 희망이 윤산의 목소리에 작게 배어 있었다 한결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다 써도 돼요." 확신에 찬 대답에 윤산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제 능력을 전부 받아내겠다는 한결의 여유가 생경하면서도 가슴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한결 씨가 먼저 OS상정하고 싱크를 펼치시면, 저는 맞춰서 아이즈 쉐어를 쓰겠습니다." "네. 시작할께요." 한결이 눈을 감았다. 보랏빛 인광이 동공 안쪽에서 천천히 번지기 시작했다. 가상의 타깃, OS. 수조 안에서 봤던 그 형체를 향해 능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파동이 퍼지면서 주변 온도가 올라갔다. 한결의 피부가 달아오르고, 손끝에서 열기가 흘러나왔다. "한결씨, 눈 떠보세요." 한결이 눈을 떴다. 윤산의 눈동자가 변하는 게 보였다. 서늘한 빛이 가라앉으면서 안쪽에서 다른 것이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 능력이 올라오는 신호였다. 그리고 시야가 바뀌었다. 시선이 교차하는 찰나, 한결의 시야에 가장 먼저 닿은 것은 윤산의 눈으로 비치는 제 자신의 얼굴이었다. 발열로 이마에 땀이 배고 눈동자에 보랏빛 인광이 아직 식지 않은 채 윤산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 표정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결이 굳었다. 평소처럼 여유롭거나 능글맞은 게 아니었다. 뭔가를 잡으려고 집중하면서도, 그게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하는 얼굴이었다. 윤산 쪽을 향한 채로. 한결이 그걸 보면서 뭔가 이상한 게 올라왔다. 저게 지금 자기 얼굴이라는 게 한 박자 늦게, 그리고 또렷하게 들어왔다. 내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었나. 언제부터. 동시에 윤산의 망막에는 한결의 시각으로 바라본 제 모습이 고스란히 투사되었다. 아이즈 쉐어를 쓰면서 미간이 조금 좁아진 채로 한결만 보고 있는 얼굴. 한결의 발열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신경 쓰이는 게 표정에서 숨겨지지 않았다. 윤산이 그 얼굴을 보면서 느꼈다. 자신이 지금 한결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능력을 켜고 있는 내내. 창백한 귀 끝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한결의 열기가 올라왔다. 동시에 아이즈 쉐어의 대가가 흘러들어왔다. 윤산에게서 나오는 냉기가 한결의 달아오른 피부를 타고 스미는 느낌이 났다. 상쇄되는 게 아니라 섞이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온도 두 개가 어딘가에서 만나는 감각. 한결이 싱크를 더 열었다. 발열이 올라갔다. 냉기가 따라왔다. 출렁이다가 버텼다. 안정적이었다. 대가가 이득이 되었다. 한결의 열기가 뇌를 태우지 못했다. 윤산의 냉기도 심장을 얼리지 못했다. 서로의 온도가 서로를 살리며 맞물렸다. 살을 에던 지독한 냉기는 온기에 부드럽게 녹아내렸고, 온몸을 태우던 열기는 서늘한 냉기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한결의 머릿속에는 방금 마주한 자신의 얼굴이 맴돌았다.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단어가 안 맞는다고 느꼈는데. 이제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봐버렸다. 자기 얼굴로. 그래서 오히려 선명해진 게 있었다. 윤산 옆에 있어야겠다는 게. 지키고 싶다는 게. 그 감각이 이유 없이 당연한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한결이 싱크를 천천히 거뒀다. 발열이 식으면서 시각 공유도 끊어졌다. 윤산이 바로 앞에 있었다. 달아오른 귀 끝이 아직 식지 않은 채였다. 한결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여유가 섞인 게 아니었다. 그냥 솔직한 얼굴이었다. "이제 못 쓰겠다는 말, 다시는 안 하겠죠." 윤산이 한결을 봤다. "그 능력, 저한테만은 써도 돼요." 윤산이 대답하지 않았다. 한결이 보는 자신의 얼굴을 봐버린 상태에서,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한결을 보고 있었는지를 이미 알아버렸으니까. 윤산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그게 부정이 아니라는 걸 한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원시인과 백설의 공명 조절 훈련은 처음부터 방향이 이상했다. 의도적으로 공명의 강도를 올리고 내리는 게 목표였는데, 문제는 백설이 조절할 생각이 없었다는 거였다. 원시인이 능력을 살짝 열면 백설이 눈빛이 달라지면서 전부 끌어당기려 했다. 포식자가 먹이 냄새를 맡은 것처럼. 조절이 아니라 흡수였다. "백설, 조금만." "맛있어." "그래도 조금만." 백설이 사탕을 깨물며 원시인 쪽으로 반 걸음 더 다가왔다. 진홍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원시인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왜?" 백설이 말했다. ".......조금 무서워요." "오빠가 무서워하면 냄새가 더 진해져." 원시인이 굳었다. 조절은 결국 원시인 혼자서 해야 했다. 백설이 끌어당기려는 걸 원시인이 강도를 조금씩 조절하면서 버티는 방식으로. 완성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방향은 보였다. 백설은 훈련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원시인이 그걸 보면서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판단이 안 됐다. 원시인이 훈련 중에 삭제를 몇 번이나 썼다. 쓸 때마다 기억이 아주 조금씩 날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속으로 삭제를 했을 때, 시인은 잠깐 멍해졌다. 방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있었는데 뭔지 모르게 됐다. 손을 내려다봤다. 이미 익숙해진 감각인데 익숙해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윤강이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다. 말은 없었다. 삭제를 쓸 때마다 원시인의 눈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놓치지 않고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직후의 눈이 어떤 건지 알고 있었다. 7년 동안 자기 것이 아닌 명령으로 살았으니까. 훈련 막바지에 원시인이 삭제를 쓰고 나서 손을 천천히 내렸다. 또 빠진 게 있었다. "또 날아갔어." 원시인이 작게 말했다. 누구한테 하는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윤강이 원시인 옆으로 조용히 다가와 말 없이 서 있었다. 그가 한참 만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뱉어냈다. "내가 기억해줄게." 원시인이 놀란 듯 윤강을 보았다. 윤강은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무심하게 던진 것 같은 말이 무심하지 않다는 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에서 오히려 느껴졌다. 원시인의 심장이 쿵, 하고 한 박자 크게 어긋나며 요동쳤다. 어떤 기억이 떨어져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빈자리를 매끄럽게 채워주는 그 말이 기억이 빠져나간 자리에 살짝 얹히는 것 같았다. 훈련이 끝난 밤, 마지막까지 남은 건 민혁이었다. 수치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단백질 바 포장지가 구겨진 채 옆에 놓여 있었다. 단말기 한쪽 구석에서 흐르는 카운트다운은 무자비하게 숫자를 깎아내고 있었다. 민혁이 그 숫자를 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예상 각성 시간을 기준으로 역산해놓은 수치였는데, 오라클 수조 쪽 생체 신호를 보면 예상보다 빨랐다. 미미한 차이였다. 오차 범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미세한 오차가 전부 같은 방향으로만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라클의 각성은 시간이 갈수록 속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민혁이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백질 바 포장지를 손 안에서 꽉 쥐어 뭉갰다. [281:09:44] 붉은 숫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 17화. 야시장 # 민혁이 컨셉을 공지한 건 저녁 여섯 시였다. 아크 식당 입구에 붙어 있던 홀로그램 안내판 하나가 깜빡이더니, 굵직한 글씨로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오늘 저녁: 야시장 / 참여 필수 / 불참 시 내일 훈련 두 배] 제로가 안내판을 보다가 무덤덤하게 이어폰을 뺐다. "필수예요?" "필수야." 민혁이 단백질 바를 씹으면서 지나갔다. 제로가 안내판을 다시 봤다가 이어폰을 꽂았다. 식당 문이 열리는 순간, 눈앞에는 정말 야시장이 펼쳐져있었다. 포장마차 천막이 줄지어 서 있고 허공에 뜬 주황색 알전구들이 투명한 천막 위로 은은하게 번졌다. 그 아래로 플라스틱 테이블과 낮은 의자들이 가득했다. 홀로그램 배경이 이번엔 지나치게 정교했다. 포장마차 촌 골목길 초입에서부터 맡을 수 있는 기름 냄새, 떡볶이 냄새, 순대 냄새, 어묵 국물 냄새가 뒤섞여서 지하 아크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철판 위에서 벌겋게 끓어오르는 떡볶이와 도마 위 숭덩숭덩 썰려 나가는 찰순대, 테이블 위 가득한 소주와 맥주 그리고 막걸리는 홀로그램 배경과 달리 민혁이 서울 시내에서 직접 공수해 온 진짜 음식이었다. 원시인이 들어서다가 눈을 크게 뜨며 멈췄다. "저거 진짜 술이에요?" "응. 다 준비해놨지." 민혁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백설이 원시인을 밀치고 먼저 들어갔다. 포장마차를 쭉 훑더니 떡볶이 쪽으로 직행했다. 새빨간 양념이 묻은 떡볶이를 입안 가득 밀어 넣는 백설의 진홍색 눈동자가 만족감으로 번들거렸다. 루나가 그 옆에 자리를 잡으면서 소주잔을 들었다. "나도 하나 줘봐." 백설이 루나를 봤다. 루나가 백설을 봤다. 백설이 떡볶이를 하나 내밀고 자연스레 루나가 받아서 먹었다. "맛있네." 루나가 소주를 한 잔 따라서 백설 앞에 밀었다. 백설이 잔을 봤다가 집어 들었다. 원샷. 루나가 눈을 약간 크게 떴다가 자신도 막힘없이 잔을 비웠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날카롭게 부딪쳤다. 묘한 승부욕이 발동한 듯, 두 사람은 무서운 속도로 잔을 비워내며 본격적으로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수라는 이미 기억하는 자들의 구역 리더들 사이에 끼어 앉아 호쾌하게 웃어젖히고 있었다. 두 세력 사이를 단단히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독한 술기운과 함께 서서히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경상 10구역 리더 부산댁이 선글라스를 올리며 아수라 쪽으로 잔을 기울였다. "아수라, 건배." "건배." 아수라가 술판을 벌이는 사이 조금 늦게 들어온 한결은 자연스럽게 윤산 쪽으로 향했다. 윤산은 구석 쪽 테이블에 앉아 어묵 국물을 가만히 마시고 있었다. 한결이 눈을 빛내며 소주병을 들고 윤산 옆에 앉았다. 윤산이 한결을 봤다. "또 뜨겁습니까." "아뇨." 한결이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냥 옆에 앉고 싶어서요." 윤산이 잔을 받으면서 잠깐 굳었다. 이번엔 핑계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이유가 있었는데. 발열이라거나, 싱크 연습이라거나. 그게 없으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윤산이 잔을 들면서 괜히 정면을 봤다. 한결이 그 옆얼굴을 봤다. 새하얀 귀 끝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아직 술도 안 마셨는데. 자리가 차면서 소음이 올라갔다. 장태식이 막걸리를 들고 설희 옆에 앉았고, 최강준이 소주병을 통째로 들고 아수라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위버가 나노 와이어를 얇게 펼쳐서 옆 테이블 순대를 한 점 가져오려다 하데스한테 들켰다. "그거 내 거야." "아니에요, 저 테이블 거예요." "내가 먼저 봤어." 류가 그 옆에서 조용히 어묵을 집었다. 구석에 붙어 앉은 제로는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평소라면 귀에 박아두었을 이어폰을 빼내 주머니에 조용히 밀어 넣었다. 제로 나름대로의 가장 적극적인 동화 방식이었다. 백설과 루나는 순식간에 다섯 병째를 비우고 있었다. "너 나랑 동갑이지?" 루나가 물었다. "아마." 백설이 루나를 봤다. 루나가 백설을 봤다. "말 놓자." 루나가 잔을 들었다. 백설이 잠깐 루나를 봤다가 잔을 들었다. "맘대로." 잔이 기분 좋게 부딪혔다. 한편, 마주 앉은 민혁과 윤강 앞에는 빈 병이 제법 쌓여 있었다. 주변에서 소음이 계속 올라왔다. 아수라가 어딘가에서 껄껄 웃는 소리가 났고, 루나가 뭔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민혁이 소주를 비우며 앞을 봤다. 별 홀로그램이 천막 위로 펼쳐져 있었다. "야." "어." "보고 싶었어." 윤강이 잔을 내려다봤다. 민혁이 코를 훌쩍였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술 마셨으니까 하는 말이야. 진지하게 듣지 마." "어." "7년 동안 진짜 많이 보고 싶었다." 목소리가 갈라지고,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어른스럽게 넘기려고 했는데 술이 조금 들어가니까 몸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윤강이 잔을 비워내고 민혁을 보고 한참 있다가 낮게 말했다. "나도." 그게 전부였다. 민혁이 코를 훌쩍이면서 잔을 들었다. 윤강도 잔을 들었다. 주변 소음이 계속됐다. "백설, 너 나보다 동생인데 왜 이렇게 무서워?" 원시인의 생각이 뇌를 거치지 않고 그냥 입으로 나왔다. 평소의 겁 많고 소심하던 원시인의 모습은 소주 세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거 먹고?" 옆에 있던 루나가 원시인이 마시고 있던 반병이 넘게 남은 소주병과 자신들의 테이블에 수북히 쌓여있는 빈병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웃었다. 백설은 원시인이 옆에 와서 그러든 말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오직 소주에 떡볶이를 먹는데 집중했다. 반응 없는 백설에 실망한건지 이번엔 원시인의 시선이 윤강 쪽을 향했다. 원시인은 조금 비틀거리며 윤강과 민혁의 테이블로 걸어가서 섰다. "강이 형, 저 사실 형한테 할 말 있었어요." 윤강이 올려다봤다. "그때 '기억해줄게' 라고 했잖아요. 그 뒤로 형 볼 때마다 심장이 이상해요." 순간, 시끄럽던 주변의 소음이 멎는 듯 고요해졌고, 민혁은 소주잔에 술을 따르다 삐끗하며 쏟았다. 원시인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말을 이어갔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자꾸 그래요. 훈련 중에도 그렇고, 밥 먹을 때도 그렇고. 그냥 이상해요. 왜 그래요 저?" 윤강이 원시인을 바라보며 잠시 당황한듯 굳었다가, 곧바로 일어서서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는 원시인의 허리를 단단하고 커다란 손으로 지탱해줬다. 윤강의 깊은 눈동자가 원시인의 풀린 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원시인이 그 눈을 보다가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얼굴이 급격히 달아오르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금 뭐라고 한거예요?" 한결과 나란히 앉아있던 윤산은 처음엔 분위기만 맞추려 딱 한 잔을 입에 댔을 뿐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윤산의 테이블을 찾아오는 리더들의 성화와 사방에서 밀려드는 가공할 만한 열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몇 잔을 더 비우고 말았다. 취기가 돌기 시작하자 윤산의 창백하던 피부 위로 옅은 홍조가 번지기 시작했다. 일곱잔 째가 지나면서 윤산의 자세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엔 꼿꼿하게 앉아서 마시고 있었는데, 여덟잔째를 비울 무렵에는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완벽한 존댓말을 구사하는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이 단정했지만 옆자리에 앉아 윤산의 반응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한결쪽으로 몸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윤산이 잔을 내려놓으며 한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한결 씨." "네. 대리님." "오늘은 왜 핑계가 없습니까." 한결이 눈을 반짝이며 눈꼬리가 살랑거렸다. "어떤 핑계요?" "항상 뜨겁다거나, 싱크 연습이라거나, 뭔가 이유가 있었는데." 윤산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린 채로 한결을 봤다. "오늘은 그냥 앉았잖아요." 한결이 입꼬리를 올렸다. 완벽한 존댓말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눈치채셨어요?" 한결이 소주잔을 내려놓으면서 몸을 윤산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어깨가 닿았다. 윤산이 피하지 않았다. 한결이 그 사실을 확인하면서 조금 더 기울었다. "그냥 옆에 있고 싶어서요." 한결이 말했다. "이유 필요해요?" 윤산이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정면을 봤다가 다시 잔을 들었다. 한결이 그 옆얼굴을 보다가 말했다. "저한테 말 편히 해주면 안돼요?" 윤산이 잔을 입에 댄 채로 멈췄다. "반말이요." "네." 윤산이 잔을 내려놨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천천히 자기도 모르게 한결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아주 조금. 어깨에 닿는 기분 좋은 서늘함에 한결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고개를 숙여 어깨에 기댄 윤산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윤산이 서서히 고개를 들어 한결을 올려다보았다. "......그건 아직 힘듭니다." 가까웠다. 술기운 때문에 윤산은 창백한 피부 위로 눈가가 붉어져 있었고, 유난히 긴 속눈썹 아래의 동공은 물기를 머금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결이 굳었다. 시선이 윤산의 얼굴을 훑다가 입술에서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윤산이 그걸 봤다. 한결의 시선이 어디 있는지 느꼈다. 취했는데도 알 수 있었다. 목부터 이마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윤산이 당황해 몸을 떼려 했지만, 오히려 한결의 손이 윤산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아 안으며 제 품에 가둬버렸다. "대리님." "......네." "취하시면 정말 위험하네요." 윤산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귀 끝이 아직 붉었다. 한결이 소주잔을 들면서 낮게 웃었다. 지금 이 거리에서 이 얼굴을 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하나의 시련이었다. 한결은 천장을 보며 욕구를 삼켜냈다. 자정이 넘으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루나와 백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잔을 비우고 있었다. 두 사람 다 멀쩡했다. 표정도 그대로였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나가는 걸 보면서 루나가 말했다. "너 진짜 잘 마신다." "너도." 루나가 웃었다. 백설이 잔을 들었다. "마셔." 루나가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묘한 동질감이 피어올랐다. 해가 완연히 밝아온 아크의 아침. 윤산이 식당에 내려왔을 때 이미 한결이 와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윤산이 들어오는 걸 보고 손을 들었다. 걸어 들어오던 윤산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젯밤의 기억이 선명했다. 자신이 먼저 한결의 어깨에 기댔던 감각, 한결이 자신의 얼굴을 훑어내리던 시선, 그리고 입술에 멈췄던 뜨거운 눈빛까지.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윤산이 일부러 한결 쪽을 보지 않고 음료를 받아서 테이블 반대편에 앉으려고 했다. "대리님, 여기요." "......저쪽이 더 자리가 넓습니다." "여기도 충분히 넓은데요." 윤산이 잠깐 서 있었다. 그러고는 한결 옆에 앉았다. 한결 쪽을 보지 않고 커피잔을 들었다. 한결이 윤산 옆얼굴을 뚫어지게 봤다. 귀 끝이 또 붉어져 있었다. 술은 깼을 텐데도. 한결이 커피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대리님." "네." 윤산이 정면을 보면서 대답했다. "어젯밤에 기억해요?" "모릅니다." 너무 빨리 대답했다. 윤산의 아차싶은 표정을 보며, 한결은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참고 또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윤산이 그 옆에서 잔을 꽉 쥐고 있었다. 원시인이 식당에 내려온 건 훈련 시작 시간이 다 돼서였다. 늦잠을 잔 것도 아니었다. 눈은 진작에 떴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어젯밤을 복기하다가, 생각할수록 너무 창피해서 다시 이불을 걷어차고, 또 덮고를 반복했다. 기억이 다 났다. 윤강한테 걸어가서 한 말이 전부 다. 심장이 이상하다고, 왜 그러냐고, 형 탓이라고. 그게 사실상 고백이라는 걸 술 깬 머리로 생각하니까 너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것도 민혁이 옆에 앉아 있는 데서. 원시인이 이불 속에서 신음을 뱉었다. 그리고 어젯밤 나머지도 다 기억났다.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리다가 윤강이 잡아줬던 것, 방으로 데려다줬던 것, 침대에 눕히면서 잘 자라고 웃어줬던 것. 그 웃음이 또 엄청나게 두근거렸고, 술기운이 더 올라온 원시인이 그대로 말해버렸다. '다 형 잘못이에요. 또 두근거리잖아요. 책임져요.' 원시인이 이불을 다시 머리 위로 끌어올렸다. 그 상태로 한참 있었다. 어쨌든 내려가야 했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시선이 자동으로 윤강 쪽을 향했다. 습관처럼. 윤강은 구석 자리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평소랑 똑같았다. 표정도 자세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원시인이 식판을 들고 최대한 반대편 자리로 가려는데 윤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원시인의 귀 끝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시선을 피하려는데 다리가 말을 안 들었다. 그냥 굳어서 서 있었다. 윤강이 원시인을 보고는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윤강이 웃는 걸 원시인이 처음 보는 건 아닌데, 저렇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소리가 나는 웃음. 뭔가를 참다가 나온 것 같은 웃음이었다. 원시인이 식판을 들고 굳은 채로 물었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 원시인이 입을 다물었다. 윤강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앉아." "······저 저쪽에 앉을게요." "여기 앉아." 거절할 수 있는 말투가 아니었다. 원시인이 느릿느릿 윤강 맞은편에 앉았다. 식판을 내려놓고 숟가락을 들었다가 내려놨다. 밥이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어젯밤에 한 말." 윤강이 먼저 꺼냈다. 원시인이 굳었다. "그게, 저 술을 좀 많이 마셔서, 제정신이 아니었고, 사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나온 거라서, 그러니까—" "알아." 윤강이 짧게 끊었다. 원시인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면서 나온 말인 거." 윤강이 원시인을 봤다. 눈이 깊었다. "근데 나는 알겠던데." 원시인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멈췄다. 윤강이 밥을 한 숟가락 뜨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두근거리게 한 거, 책임질게." 식당 안 소음이 귓속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네?" 원시인이 윤강을 봤다. 윤강은 죽을 먹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방금 한 말이 아무렇지 않은 말이 아니라는 건 원시인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 "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이해하잖아." 원시인이 입을 다물었다. 윤강이 원시인을 봤다. 잠깐 그 눈을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겁나면 천천히 시작해도 돼. 근데 도망치지는 말고." 원시인이 식판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또 귓가에 울릴정도로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이번엔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한참 있다가 작게 말했다. ".....왜 이렇게 무서워요, 형은." 윤강이 반찬 하나를 집어 원시인의 숟가락 위로 올려줬다. "밥 먹어." 원시인이 윤강의 얼굴을 흘깃 보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심장이 계속해서 미친듯이 뛰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어젯밤보다 조금 더 줄어 있었다. [274:33:19] # 18화. 이탈 # 신호가 잡힌 건 새벽이었다. 민혁이 서버실 모니터 가득 쏟아지는 로그 데이터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화면에 명확한 식별 코드가 찍혔다. AD테크의 최신형 탐지 드론 무리였다. 이미 아크 반경 3킬로 안까지 파고들어 와 있었고, 정확한 좌표를 아직 특정당한 건 아니었지만 이 추적 속도라면 발각은 시간문제였다. 민혁이 혹시 에러일까 싶어 화면을 두 번 더 재스캔하고 나서 옆에 있던 단백질 바를 집어 들었다. 씹지 못했다. 손끝이 잘게 떨리며 은박 포장지만 거칠게 뜯겼다. 비상 회의 소집이 떨어진 건 오전 다섯 시였다. 민혁이 허공에 입체 홀로그램을 띄웠다. 탐지 드론들의 촘촘한 비행 경로가 수십 개의 붉은 선으로 얽혀 표시되어 있었다. 그 붉은 선은, 아크를 중심으로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들어오고 있었다. "이동해야 해." 민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오늘 당장." 장내에 차가운 침묵이 맴돌았다. 민혁이 단말기를 툭툭 치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크내에 인원이 너무 많아. 이 규모가 한 번에 움직이면 상공 감지망에 쉽게 들켜버려. 무조건 팀을 쪼개서 이동해야 해." 화면을 전환하자 임시 비상 안전기지 두 곳의 위치가 나타났다. 아크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은신처였다. "1팀은 내가 맡아. 강원과 경기 지역 리더를 제외한 리더 전부와 함께 아크 보호 인원 52명 중 노약자들 포함 21명 선발대로 먼저 뺀다. 통로 열어서 직행할 거야. 2팀은 강이가 이끌어. 언리드와 강원,경기 지역 리더들과 함께 보호 인원 18명을 후발대로 터널 경유해서 와. 3팀은 루나가 시인이랑 백설 데리고 별도 루트로 이동. 보호 인원 7명 같이 데리고 가. 산이랑 한결이는 4팀. 마지막 보호 인원 6명 챙기면서 따로 움직여." "민혁아. 너 통로 네개에 안전기지 두 곳 동시에 돌리는 거야." 윤강이 낮게 말했다. "동시에 안하면 새 기지 좌표까지 전부 노출돼. 어떻게든 해야 해." 민혁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결이 설명을 들으며 윤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산은 홀로그램 작전도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한결이 입꼬리를 슥 올리며 윤산의 옆자리로 바짝 붙었다. "대리님, 우린 세트에요." 한결의 짐짓 해맑은 듯, 무엇인가 다른 뜻이 담긴 것만 같은 말에 작전도를 분석하던 윤산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동은 해가 채 뜨지 않은 오전부터 시작됐다. 1팀의 철수가 먼저였다. 민혁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아크 벽면을 뒤틀고 공간 통로를 개방했다. 보호 인원 21명과 리더들이 차례로 통로 안으로 밀려 들어가는 동안, 민혁의 안색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다. 통로 유지와 차단을 동시에 제어하느라 온몸의 영양이 폭발적으로 연소되고 있었다. 살점이 내리깎이는 것 같은 극심한 허기가 골수를 찌르는데도 민혁은 단백질 바를 연달아 세 개 처넣으며 기어코 정신을 붙잡았다. 그 사투 덕분에 1팀은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제일 먼저 안전기지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후발대인 윤강의 2팀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터졌다. 윤강이 대열 맨 앞에 섰다. 뒤로 류, 발키리, 위버, 하데스, 미라쥬와 강원과 경기지역 리더들, 그리고 아크에서 보호 중이던 능력자 18명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줄을 이었다. 이동 경로는 아크 하부 폐쇄 지하 터널이었다. 외부 노출 구간이 짧게 있는 루트였는데, 기습이 들어온다면 바로 그 타이밍일꺼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터널 중간 지점에 도달했을 때 위버가 걸음을 멈추며 한쪽 손을 번쩍 들었다. "뭔가 있어요." 안경 너머 눈동자가 극도로 날카롭게 빛났다. 나노 와이어를 허공에 얇게 펼쳐 공기를 읽던 위버가 낮게 읊조렸다. "최소 삼십 이상입니다. 고등급 능력자만 열이 넘고, 뒤로 일반 능력자와 완전 무장한 직원들이 깔려 있어요. 북서쪽 두 갈래와 남쪽 진입로, 출구 전부를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습니다." 윤강이 멈춰 섰다. 픽셀 입자들이 그의 어깨 위로 타닥타닥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돌파합니다. 전원 전투 준비. 보호 인원은 중앙 대열 유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북서쪽 차단벽이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폭발했다. D.A.B 헌터들이 어둠 속에서 쏟아져 들어왔고, 그 뒤로 AD테크 로고가 박힌 전술 조끼를 입은 일반 직원들이 소총과 충격파 발생기를 겨누며 줄줄이 따라붙었다. 선두의 중력 계열 헌터가 두 손을 바닥으로 내리치자 터널 내부 기압이 순식간에 치솟으며 공기 자체가 납덩이처럼 머리 위를 짓눌렀다. 그 압도적인 중력 파동 앞으로 류가 걸어 나왔다. 느릿했다. 귀찮다는 듯 눈을 반쯤 감은 채 밀려드는 압박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쇄도하던 중력 궤도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기묘하게 뒤틀리면서 사방으로 꺾여 나갔다. 쿠르릉 소리와 함께 콘크리트 벽면과 천장이 박살 났다. 적들을 향해 되돌아간 것도 있었다. 자신들이 날린 파동이 제멋대로 분산되는 광경에 D.A.B 헌터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류는 손 하나 들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남쪽 진입로에서 발키리가 뛰었다. 정확히는 달린 게 아니었다. 대기를 발로 밟으며 공중으로 솟아올라 천장에 닿을 듯한 높이에서 궤도를 바꾸더니 남쪽 입구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리꽂혔다. 그 이동 경로를 따라 소닉붐이 연쇄적으로 대기를 찢었다. 첫 번째 충격파가 남쪽 선두 헌터들을 날려보냈고, 발키리가 착지하면서 두 번째 충격파가 터지며 뒤따르던 일반 직원들까지 벽에 처박혔다. 총기를 들고 있던 직원들이 충격에 무기를 놓쳤다. 최강준이 정면으로 걸어갔다. "비켜." 부분 수화가 전부 터졌다. 어깨뼈가 벌어지고 상체가 거대한 짐승 형태로 팽창하면서 정면 대열을 통째로 밀어버렸다. 총알이 정면으로 꽂혀도 그냥 맞고 서 있었다. 헌터들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데스가 바닥을 내려다봤다. 반경 안 그림자들이 일제히 꿈틀거리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목을 휘감은 그림자 감옥이 헌터들과 직원들을 지하 심연 속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비명이 그림자 안으로 사라지면서 잘렸다. 미라쥬가 윤강의 허상을 터널 곳곳에 동시다발적으로 펼쳤다. 사방에서 나타나는 윤강의 실루엣에 적들의 조준선이 완전히 분산되어 갈팡질팡하는 사이, 위버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노 와이어를 허공에 사정없이 퉁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궤적들이 전방에 있던 다섯 명의 관절을 동시에 휘감으며 움직임을 잠갔다. 위버가 손가락을 당기자 다섯이 인형처럼 한꺼번에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 직후, 위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쓰러지던 헌터 하나가 역으로 와이어를 움켜쥐고 몸무게를 실어 강하게 잡아당긴 탓이었다. 와이어가 역류하며 위버의 손바닥 살점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뼈가 긁히는 서늘한 마찰음이 났지만 위버는 이를 악물고 와이어를 뜯어내며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쥐었다. 설희가 그 틈에 손을 들었다. 치명적인 독 안개가 피어오르며 입구 전체로 흘러갔다. 독기에 닿은 헌터들의 발이 굳기 시작했고, 뒤따르던 일반 직원들이 무기를 들고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밀치며 혼란에 빠졌다. 그 안개를 강제로 헤치고 들어오려던 AD테크 고등급 능력자 하나가 혼전 속에서 설희를 정확히 포착했다. 그가 날린 파동이 살벌하게 쇄도했다. 설희가 능력을 유지하느라 몸을 틀었지만 한 발 늦었다. 파동이 옆구리로 꽂혔다. 근거리라 충격이 그대로 들어갔다. 설희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이는 순간 태풍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와 앞을 막으며 적을 쓸어버렸다. 설희는 입술이 터지도록 깨물며 끝까지 독 안개를 유지했다. 그 사이, 총기를 든 AD테크 직원들 스무 명이 뒤쪽 진입로에서 동시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트리거를 당겼다. 최강준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지만 이 규모는 달랐다. 충격파 발생기와 능력 제어 포박탄, 그리고 총알이 섞여 날아오면서 보호 대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윤강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조용했다. 픽셀 입자가 그의 전신에서 스르륵 풀려나오더니 공기 중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윤강의 눈동자에 형광 연청색 빛이 가득 차며 손을 들어 올렸다. 쿠아아앙—. 터널 전체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흔들렸다. 밀려 들어오던 직원들의 발아래에서 바닥 전체가 픽셀 단위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강철 문, 차단벽, 총기, 포박탄 전부 분자 단위로 분해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것들이 압축되면서 거대한 픽셀 구체 형태가 됐다가, 다음 순간 폭죽처럼 사방으로 산산이 터지며 적들을 뒤덮었다. 비명도, 저항도 없었다. 그냥 사라졌다. 방어를 뚫으려는 의지가 픽셀 앞에서 아무 의미가 없었다. 윤강이 손을 천천히 내리고 돌아서며 말했다. "이동 재개합니다." 설희가 태풍에게 옆구리를 부축받으며 따라붙었다. 위버는 피 흐르는 손을 천으로 감으며 대열에 섰다. 같은 시각, 3팀이 작전 루트에 진입하는 순간 천장 환기구가 터졌다. 전투용 드론이었다. 개틀링 포트가 달린 시커먼 드론 다섯 대가 하강하면서 능력 제어 파동 탄환을 퍼부었다. 뒤따르는 보호 능력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거기에 더해 AD테크 무장 직원들이 측면 벽을 뚫고 쏟아져 들어왔다. 방독면을 쓴 총기 병력 열다섯, 그 뒤로 능력자 헌터 여섯이었다. 루나가 혀를 차며 즉각 페로몬을 공기 중에 살포했다. 특유의 달콤한 향취가 터널을 채우자 드론 조종사들이 극심한 두통과 환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드론들의 조준선이 갈지자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찰나, 원시인이 앞으로 나섰다. 전방을 완벽하게 가로막은 두꺼운 강화 차단벽을 향해 첫 번째 삭제를 시전했다. 손끝에서 백색의 공백이 터져 나가자 수 톤의 강철 벽이 분쇄되는 과정도 없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했다. 루트가 열렸다. "아하하! 맛있겠네!" 백설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뻗었다. 진홍색 눈동자가 타오르는 얼굴로, 손바닥 중앙에서부터 블랙홀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개방됐다. 밀려들던 직원들과 헌터들이 강력한 인력에 휘말려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백설의 표정이 기분 좋게 번들거렸다. 두 번째 삭제는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던 추적 파동의 궤적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데 썼다. 세 번째는 측면 포위망을 좁혀오던 요원들의 엄폐물과 바닥 지형을 날려버려 단절 구역을 만들었다. 네 번째는 백설의 흡수망을 우회해 루나 쪽을 노리던 헌터의 보이지 않는 에너지 가시를 공중에서 잘라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가 연달아 터졌다. 루나가 페로몬으로 인지를 무너뜨리고, 백설이 블랙홀로 흡수하면, 원시인이 삭제로 빈틈을 메우는 방식이었다. 연계 효율이 지나치게 훌륭해서 원시인은 자신도 모르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능력을 썼다. 삭제를 쓸 때마다 머릿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감각이 뇌리를 스쳤다. 흥분 상태에서 그게 뭘 의미하는지 인지할 수 없었다. 그냥 눈앞의 위협을 없애야 한다는 일념으로 손을 뻗었다. 적들의 후방 지휘 라인까지 루나의 페로몬 범위에 종속되면서 전투가 끝났다. 환각에 빠진 헌터들이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하고 서로 뒤엉켰고, 백설이 블랙홀로 생존자들을 집어삼키며 상황이 종료됐다. 터널이 고요해진 후에야 원시인이 손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흥분이 가라앉자 밀려드는 건 가벼운 두통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수십 개의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은 지독한 공허함이었다. 어떤 기억이 날아갔는지 특정이 안 됐다. 날아간 자리가 너무 넓어서 어디가 빈자리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루나가 물었다. "....이동해요, 우선." 멍한 얼굴로 원시인이 답했다. 루나가 그 옆얼굴을 보다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호위받던 보호 능력자들이 창백한 얼굴로 원시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4팀인 한결과 윤산이 재개발 구역 건물 뒷쪽으로 진입했을 때, 전방의 어둠 속에서 불길한 파동이 먼저 왔다. 맞은편에서 환경미화원과 민간인 복장을 한 인원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위장이 정교했지만 윤산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아카이브 아이가 켜지면서 맞은편 인원들의 능력이 윤산의 망막에 실시간으로 투사됐다. "총 여덟입니다. 고등급 능력자 셋, 일반 능력자 둘, 그리고 뒤로 완전무장 직원 셋이 후위를 받치고 있습니다. 추적 계열, 신체 강화 계열, 감각 조작 계열 각각이고, 직원들은 능력 차단 포박탄 장비하고 있어요." 한결이 그 분석을 들으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 순간, 한결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보랏빛 인광이 서늘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대리님, 보호 인원들 뒤로 빼주세요. 그리고 제 바로 옆에 계세요." 윤산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로그 오버라이트를 펼쳤다. 통로 내부 감시 카메라와 경보 시스템 데이터를 전부 덮어씌우면서 후방 보호 능력자들에게 시각 신호를 넣어 뒤로 물러서게 했다. 냉기가 올라오면서 손끝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했다. 윤산이 그걸 자각하는 동시에 옆에서 한결의 열기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온도가 맞물리는 감각이 왔다. 한결이 앞으로 걸어가며 싱크를 전방위로 전개했다. 순식간이었다. 여덟 명 전원의 중추신경계와 뇌파에 한결의 동기화가 강제로 링크됐다. 눈을 감거나 멈추지도 않은 채 그냥 걸어가면서. 한결의 몸에서 열기가 올라오려 하자 윤산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서로의 온도가 자연스럽게 맞물렸다. 선두의 추적 계열 헌터가 위기를 느끼고 먼저 손을 뻗었다. 시뻘건 궤적의 추적 파동이 한결의 심장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왔다. 닿기 직전, 파동의 벡터 축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반전됐다. 치이이익—. 쾅—. 추적 파동이 발사한 본인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가면서 헌터가 자기 타격에 가슴팍이 터져 나가며 벽면에 처박혔다. 나머지 일곱이 멈췄다. 대체 무슨 능력인지 인지조차 못한 얼굴이었다. 한결이 그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신체 강화 계열 헌터 둘이 절박하게 동시에 뛰어올랐다. 초인의 속도로 한결의 목과 허리를 부수기 위해 거대한 주먹을 내리꽂는 순간, 한결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신경계를 싱크로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체온 조절 중추, 시각 처리 영역, 판단 회로를 순서대로 짚어 들어가자 강화 계열 특유의 완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한결이 픽 웃으며 싱크를 한 층 더 개방했다. 훅—. 허공에서 두 주먹이 한결의 앞에서 완벽하게 멈춰 섰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보랏빛 인광으로 물들었다. 한결이 그 뇌 속에 강렬한 인지 왜곡을 심었다. 눈앞에 있는 동료를 죽이라는 절대적 명령이었다. 스르륵—. 두 헌터가 천천히 서로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진 신체 강화 능력을 전부 폭발시키며 상대를 향해 뛰었다. 쿠쾅—, 콰직—. 뼈가 부서지고 살점이 터지는 둔탁한 타격음이 한결의 바로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한결은 그 처절한 소리를 배경 삼아, 나머지를 향해 걸어갔다. "대리님, 어때요. 효율적이죠?" 한결이 평소의 느긋한 미소와 함께 윤산을 보며 말했다. 주변에선 적들이 피가 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자기들끼리 쓰러져 가는 동안, 한결은 윤산만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는 그 극단적인 괴리에, 윤산은 새하얀 귀를 붉히고 손끝이 떨리며 당황했다. "....죽이지는 마십시오." "대리님 말이라면, 뭐든." 한결이 해맑게 대답했다. 뒤쪽 후위를 받치던 무장 직원 셋이 능력 차단 포박탄을 꺼내들었다. 한결이 그쪽을 봤다. 세 명이 동시에 멈추더니 포박탄을 서로에게 겨눠 동시에 발사했다. 차단 포박탄이 세 명의 몸을 일제히 감아버리며 세 명 모두 바닥에 쓰러졌다. 마지막 감각 조작 계열 헌터가 공포에 질려 능력을 폭발시켰다. 한결 주변 공기가 일렁이며 시야의 모든 상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사물의 위치가 수십 개로 쪼개지는 환각이었다. 한결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애초에 눈이 아니라 싱크의 주파수로 상대 뇌를 고정하고 있었기에 한결에게 시각 교란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한결이 헌터 뇌파의 주파수를 역으로 비틀자 감각 조작 능력이 그대로 역류해 본인의 뇌세포를 강타했다. "아아악! 내 눈! 내 눈이—!" 요원이 제 눈 안쪽에서 뭔가가 터지는 것 같은 극심한 인지통을 느끼며 바닥을 구르다 기절했다. 여덟 명이 한결의 손에 직접 닿지 않은 채로 전멸했다. 한결이 윤산을 돌아봤다. "안 죽였어요. 기절 한거예요." 한결의 옷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발열이 천천히 가라앉으면서 윤산의 냉기도 따라서 잦아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대가를 맞물려 잡아주며 싸운 첫 번째 전투였다. 따로 신호를 주고받지 않아도 됐다. 그냥 당연한듯 됐다. 한결이 슬그머니 윤산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팔을 걸치며 말했다. "싸울 때 훨씬 편하네요. 대리님이랑 이렇게 체온을 섞으면."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윤산이 정면을 보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한결이 그 대답을 듣고 순간적으로 보랏빛 눈동자를 깊게 빛냈다. 붉어진 윤산의 귀 끝을 보며 뭔가를 더 밀어붙이려다가, 이내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한결이 뒤를 돌아 보호 능력자들에게 손짓했다. "이동해요." [249:17:52] # 19화. 균열 # 안전기지는 불편했다. 좁고 낡았다. 습기가 벽에서 배어 나왔고 환기가 제대로 안 돼서 퀴퀴한 냄새가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아크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복도 바닥까지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할 정도로 인원이 넘쳤는데, 그래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불평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설희가 구석 자리에 앉아서 이를 악물고 있었다. 태풍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러운 손길로 옆구리 붕대를 다시 감아주는 동안, 설희는 천장을 보면서 숨을 고르게 가다듬으려 애썼다. 능력 충돌로 인한 부상 부위라 건드릴 때마다 속에서부터 쥐어짜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설희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본 태풍이 마지막 매듭을 지으면서 말했다. "많이 아프면 말해요." "괜찮아요." 설희가 짧게 잘랐다. 자신의 구역 리더의 완강한 태도에 태풍은 묵묵히 그저 자리를 지켰다. 위버는 통제실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흰 천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도 표정 하나 없이 안경을 고쳐 쓰더니 단말기를 왼손으로 조작하기 시작했다. 한 손만으로 기기를 다루느라 탁탁거리는 마찰음이 고요한 통제실에 불규칙하게 울렸다. 지나가던 장태식이 그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 발걸음을 멈추면서 물었다. "그 손으로 다음 전투까지 버틸 수 있겠어요." 위버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쓸 수 있어요." 그 한마디가 가진 무게에 공기가 잠깐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풀어졌다. 전투를 위해 자신의 한계까지 밀어 붙일듯한 어조에 장태식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지나갔다. 민혁은 통제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고 드러난 팔에 핏줄이 비정상적으로 도드라졌다. 과도한 능력을 쓴 대가가 눈에 보이고 있었다. 그 깊이를 짐작한 루나가 음료수와 고칼로리 바를 민혁 옆에 조용히 내려놓고 갔다. 민혁이 눈을 뜨지 않은 채 그걸 집어 들었다. 원시인이 복도 가장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투 흥분이 완전히 가라앉고 나서야 감각이 제대로 왔다. 뭔가가 많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 어떤 기억이 날아갔는지 특정이 안 됐다. 날아간 자리가 너무 많아서 어디가 빈자리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게 이미 익숙해진 감각인데, 오늘은 그 규모가 달랐다. 이전까지는 뭔가 빠진 것 같다는 감각이라도 왔는데, 지금은 그냥 텅 빈 것 같기만 했다. 손끝에 닿는 공기마저 낯설게 느껴질 만큼 거대한 공백. 윤강이 원시인 앞에 와서 말없이 맞은편 바닥에 앉았다. 고개를 들자, 그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썼어." 원시인이 손가락을 꼽으려다가 중간에 멈췄다. "몇 번인지 세다가 잃어버렸어요." "뭐가 빠진 것 같아." "모르겠어요. 많이 빠진 것 같은데 뭔지를 모르겠어요. 그게 더 무서워요." 원시인이 불안한 듯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잃어버린 게 있는데 뭔지 모르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에요." 윤강이 잠깐 원시인을 봤다가 시선을 내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뭔가를 결정하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이윽고 윤강이 다시 시선을 올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손 줘봐." 원시인이 손을 내밀었다. 윤강이 그 손을 잡으면서 픽셀을 아주 가볍게 열었다. 원시인의 신경계 쪽으로 픽셀이 닿는 찌릿한 감각이 왔다. 윤강이 자신의 기억속에서 시인에 관련된 기억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삭제 훈련 중에 엉뚱한 물건을 날려버리고 당황하던 일, 백설에게 쫓기다가 뒤로 넘어졌던 일, 아침에 식당에서 졸다가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던 일, 야시장에서 술 세 잔에 얼굴이 벌개진 채로 아무 말이나 했던 일. 크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이었다. 윤강은 그 작은 순간의 기억들을 픽셀로 변환해서 원시인의 신경계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원시인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자기 기억이 아니었다. 그런데 픽셀이 신경계에 안착하는 순간, 완벽한 자기 기억처럼 살아났다. 낯설고 이상한 감각이었는데, 그 이상함보다 먼저 가슴을 쳤던 건 그 기억들 안에 깔려 있는 시선이었다. 윤강의 눈이었다. 그 보잘것없고 작은 순간들을 이 사람이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원시인이 눈을 감았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텅 비어 있던 자리가 따뜻하게 채워지는 안도감인지, 이 남자가 제 사소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는 설렘인지 구분이 안 됐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벅차올랐다. 아마 둘 다였다. 절망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윤강이라는 존재로 채워지면서 바뀌는 감각이었다. 윤강이 픽셀을 거두면서 손을 놓았다. 원시인이 눈을 뜨자 가까이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윤강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 그런데 그 아무렇지 않음이 지금은 달리 읽혔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작게 느껴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는데, 한참 있다가 원시인이 겨우 말했다. "......형이 봤던 저에 대한 기억들,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응." 짧고 단호한 대답. 원시인이 서둘러 고개를 내리며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했다. 심장이 또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복도 반대편에서 한결과 윤산이 보고 있었다. 한결이 시선을 윤산 쪽으로 옮기더니 낮게 말했다. "부러워요." 윤산이 한결을 봤다. "저도 누군가가 저라는 사람을 저렇게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윤산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한결의 눈빛이 유독 무겁게 와닿았다. 한결이 먼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면서 가볍게 웃었다. 평소처럼. 근데 그 미소 뒤에 뭔가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가볍게 던진 말 같은데 가볍지 않은 온도. 윤산이 한결의 옆얼굴을 봤다. 그 말이 가슴 안쪽에서 생각보다 오래 얹혀 있었다.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였다. 통제실로 들어가 단말기를 켜고 카운트다운 수치를 확인했다. 화면을 보는 순간 미간이 좁아졌다. 예상 각성 시간을 기준으로 역산해놓은 수치가 이상했다. 이동하기 전보다 너무 많이 줄어 있었다. 계산을 다시 돌렸다. 안 맞았다. 오차가 계속 같은 방향으로만 누적되고 있었다. 더 빠르게, 더 빠르게. 민혁이 다급하게 통제실 문을 열고 나왔다. "다 모여." 목소리가 달랐다. 장난기도 없고 컨셉도 없는, 그냥 민혁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복도와 방에서 나와 통제실에 모였다. 민혁이 단말기 화면을 허공에 띄웠다. "카운트다운이 이상하게 줄고 있어." 민혁이 수치를 짚으면서 말했다. "오차 범위가 아니야. 같은 방향으로만 계속 쌓이고 있어. OS 각성이 예상보다 빠르게 당겨지고 있다는 거야."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얼마나 당겨진 겁니까." 윤산이 물었다. "지금 속도면 예정보다 사흘에서 나흘 빠를 수 있어. 우리가 원래 계획한 준비 시간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거야."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설희가 옆구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위버가 오른손을 천으로 감은 채였다. 그게 지금 이 팀의 상태였다. 그때 장태식의 단말기에서 날카로운 경고 신호가 들어왔다. 화면을 확인하던 장태식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어졌다. "기억하는 자들 구역 기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윤강이 그쪽을 봤다. "전국 구역 기지 여러 곳이 동시에 습격당했습니다." 방 안의 온도가 차갑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리더들이 서로를 봤다. 동시에. 전국 구역이. 아크가 이동하던 그 시간에. "우리가 이동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루나가 낮게 말했다. "우리 팀 이동 정보랑 구역 기지 좌표가 동시에 흘러나간 거잖아." 최강준이 팔짱을 끼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부에 있었다는 거네." 그 말이 방 안에 떨어지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기억하는 자들 리더들과 언리드가 서로를 보기 시작했다. 이틀 전 야시장에서 웃으며 잔을 부딪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증발한 것 같은 공기였다. 발키리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우리 쪽은 아니에요. 언리드 내부 정보 관리는 이안이 직접 해요. 뚫릴 구조가 아니야." "저희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청 7구역 장태식이 받아쳤다. "기억하는 자들의 리더들은 구역 정보를 외부에 공유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보안이 기본인 조직이에요." "그런데 두 곳이 동시에 뚫렸잖아요." 발키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둘 중 하나에서 나간 거겠죠." 목소리들이 겹쳤다. 조용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허물어진 것 같던 경계가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야시장에서 함께 잔을 부딪히던 사람들이 지금 서로를 경계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팽팽한 대립 사이, 윤강이 입을 열었다. "서로 의심하는 거 멈추세요." 차갑고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공간이 조용해졌다. "스파이가 있다는 결론은 맞습니다. 하지만 현재 방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싸우면 OS 전에 우리가 먼저 박살 나게 됩니다. 정보를 흘린 자를 찾되, 지금 당장은 냉정해져야 합니다." 아무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날이 선 의혹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설희가 그 침묵 속에서 말했다. "확실한 건, 언리드 쪽 아닙니까." 목소리가 차분했다. "아크에 가장 늦게 들어왔고, 내부 정보에 접근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위치잖아요. 이동 계획도 회의에서 나왔고, 그 회의에 전원이 있었지만—" "기억하는 자들 구역 좌표는 회의에서 안 나왔어요." 한결이 끊었다. 목소리가 여유로웠는데 눈빛이 달랐다. "구역 좌표까지 흘러나갔다면, 그 정보를 갖고 있던 쪽에서 나간 거겠죠." 설희가 한결을 봤다. 한결이 설희를 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쳤고, 설희의 시선이 한결을 버티다 아래로 떨어졌다. "지금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다들 의심받아야죠. 저도 포함해서요." 한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찾아야 한다는 것, 지금 당장은 OS 전투 준비가 먼저라는 것만 확인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흩어지기 시작했다. 설희가 복도로 나갔다. 루나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잠시 멈칫했다. 아까까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사람치고는,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곧았다. 루나가 그 생각을 털어내며 시선을 내렸다. 통제실 한쪽에서는 민혁이 단말기를 다시 보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빨라지고 있었다. [221:08:33] # 20화. 덫 #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통제실은 아직도 불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시끄러웠던 복도는 밤이 깊어지자 바닥 유도등만 낮게 켜진 채 고요해졌고, 민혁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여전히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실, 민혁의 눈은 화면 속 그 어떤 데이터도 제대로 담고 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같은 지점이 계속 걸려 맴돌고 있었다. 구역 기지가 동시에 털렸다. 그것도 아크가 이동하던 그 타이밍에 정확하게. 이동 계획 자체는 회의에서 나왔고 그 회의에는 보호 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참석해 있었다. 하지만, 구역 기지의 세부 좌표는 회의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건 오직 '기억하는 자들' 내부에서도 일부 리더들에게만 은밀히 공유되는 극비 정보였다. 언리드가 결코 뚫릴 구조가 아니라는 발키리 말이 사실이라면, 의심의 범위는 자연히 기억하는 자들 리더 쪽으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음 의문은 겉잡을 수 없이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오드득, 오드득. 백설이 통제실 구석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아 사탕을 씹고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에도 백설은 자리를 뜨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냥 막대사탕을 씹으면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민혁은 백설이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묻지 않았고, 백설 역시 민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묘한 침묵 속에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그냥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민혁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 쪽에서 서둘러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루나가 통제실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다. "백설 여기 있어?" 민혁이 구석 쪽으로 턱짓을 하자, 루나가 백설을 발견하고 통제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백설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알아." "알면서 왜 대답을 안 해." "아저씨 냄새 나." 그 뜬금없는 말에 루나가 당황한 듯 제 옷소매에 코를 대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한테?" "아니." 백설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툭툭 뱉어내듯 말했다. "아까 그 여자. 다친 척 하던." 루나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설희 언니?" "응. 그 여자. 고진혁 냄새." 말을 마친 백설은 사탕을 다시 입에 물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순간 루나와 민혁의 눈이 마주쳤다. 흩어져 있던 정보가 맞물리며 한 방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구역 좌표를 전부 알고 있는 리더. 회의에서 언리드에게 의혹을 돌린 사람. 그리고 백설의 냄새. 모든 정황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루나가 다시 백설을 돌아보았다. "근데, 그 말 해주려고 여기 있었던 거야?" 백설이 루나를 봤다. 잠깐. 그리고 다시 허공을 봤다. "아니." 루나가 백설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귀엽다." "흥." 백설이 사탕을 오드득 씹으면서 외면했다. 귀엽다는 말을 부정하지도, 수긍하지도 않는 반응이었다. 루나가 그 새침한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민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혁은 이미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백설, 나가자." 루나가 더 묻지 않고 백설과 함께 통제실을 나갔다. 문이 무겁게 닫히고 적막이 찾아오자, 민혁이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 통제실로 와. 메시지를 받은 윤강과 한결이 통제실로 들어오는 데는 실제로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백설이 냄새 맡았어. 설희에게서 고진혁 냄새를." 민혁은 피로한 듯 미간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엔 부족해. 설희가 강력하게 의심되긴 해도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까. 함부로 움직였다가 만에 하나 틀리기라도 하면 그걸로 끝이야. 현재 구역 좌표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기억하는 자들 리더 중에서도 소수뿐이고, 언리드 쪽은 기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안이 내부 정보를 완벽히 통제하고 있어. 그 얘긴 즉, 언리드는 이번 정보 유출에서 확실히 제외라는 뜻이야."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한결이 팔짱을 낀 채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구역 좌표를 전부 알고있는 리더 일곱명에게 각각 내용이 조금씩 다른 정보를 공유할 거야. 겉으로는 다 똑같은 작전 정보처럼 보이지만 디테일이 조금 다른." 민혁의 작전을 듣던 윤강이 물었다. "공유할 정보 내용은." "안전기지를 버린다는 것. 스파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우리쪽에서 이동하려는 건 고진혁이 당연하게 받아들일거야. 여기서 이동 시간과 루트를 조금씩 다르게 알릴거야. 그리고 각 루트를 언리드 멤버들이 체크해줘. 일곱명에게 알린 루트 중 헌터가 나타나는 위치로 스파이를 찾아낼 수 있어." 한결이 잠시 생각하다가 민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형, 찾아내면 바로 잡지 마요." 민혁이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왜." "잡힌걸 고진혁이 눈치채는 순간, 그 패는 바로 버려질거에요. 반대로 우리가 잡아내지 않는다면 고진혁은 계속해서 그 통로로 정보를 받겠죠. 그걸 우리가 이용 하는 거예요. 역으로 정보를 심는거죠." "맞는 말이야." 윤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의 말에 동의했다. ".....왜 대체 스파이짓을 한걸까, 그것도 한 구역의 리더가." 민혁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정이 있었을수도 있고, 처음부터 그쪽 이었을수도 있겠죠. 인간의 속내는 원래 가장 알기 힘들어요. 하지만 순서가 있어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게 먼저예요." 한결의 단호한 말에 통제실 내부에는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우선, 언리드 멤버들에게 작전 전달하고 형 한테 도움 될만한 사람 보낼게요." 문이 닫히고 통제실이 다시 적막해졌다. 민혁은 곧바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의심 선상에 오른 리더 일곱 명의 연락처를 메인 화면에 띄웠다. 작업 자체는 지극히 단순했다. 본질적으로는 완전히 동일한 내용의 이동 작전 메시지를 일곱 개 작성하되, 각각 디테일을 조금씩 다르게 심는 것. 누구에겐 이동 시간을 한 시간 늦게 적고, 누구에겐 경유 지점의 좌표를 슬쩍 바꾸는 식이었다. 겉으로는 동일한 작전 공유 메시지였지만, 나중에 고진혁 쪽으로 흘러 들어가 실제로 발동된 헌터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면 스파이가 누군지 단번에 특정할 수 있었다. 민혁이 첫 번째 메시지를 완성하고 두 번째를 창을 새로 열었을 때, 통제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안이 들어오고 있었다. 단추를 두어 개쯤 느슨하게 풀어헤친 셔츠 차림에, 뒤로 낮게 묶은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입꼬리에는 늘 매달려 있는 특유의 나른한 미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왜 왔어요?" "한결이 보냈어요." 돌아온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이안은 통제실에 놓여 있던 의자 하나를 가볍게 끌어당기더니, 민혁의 옆자리에 붙여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살을 직접 맞댈 만큼 밀착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거리였다. 민혁이 순간 움찔하며 슬쩍 곁눈질을 했다가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 할 수 있어요?" "구경이요." 부드럽게 웃으며 한 뻔뻔한 대꾸에 민혁이 황당하다는 듯 이안을 돌아보았다. 작업을 도울 생각도, 그렇다고 방해할 생각도 전혀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그 공간에 ‘그냥 가만히 존재하는’ 상태였다.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이미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남자를 억지로 내쫓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했다. 게다가 한결이 이유 없이 사람을 보낼 리는 없었다. 민혁이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세 번째 메시지, 네 번째 메시지. 민혁이 작업을 이어가는 동안 곁에 앉은 이안은 조용했다. 너무나도 고요하게 머물러 있어서 언뜻 존재감 자체가 희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는데도, 민혁의 온 신경은 이상하게 자꾸만 옆자리로 쏠리며 곤두섰다. 작업에 한참 열을 올리던 중, 목덜미 부근이 묘하게 간지럽고 화끈거려와 민혁은 저도 모르게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변함없이 정면의 모니터 화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민혁 쪽을 쳐다본 게 아니었다. 정말로 화면, 오직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민혁이 다시 키보드에 손을 뻗어 다섯 번째 메시지를 절반쯤 채워 나갔을 때였다. 또 같은 느낌이 왔다. 누군가의 짙은 시선이 살갗에 직접적으로 닿아오는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 민혁이 참지 못하고 슬쩍 옆을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이번엔 이안이 턱을 괸 채 민혁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하지만 이안은 시선을 들켜서 당황하는 기색 따위도 없이, 오히려 눈꼬리를 접으며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밀한 시선을 딱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같은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뭐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안이 낮게 속삭이듯 대꾸하자, 민혁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착각인가 싶었다. 저 사람은 처음 봤을 때 부터 원래 저런 얼굴이었으니까. 늘 입꼬리가 올라가 있고 눈빛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민혁이 다시금 손가락 움직임에 속도를 붙이며 여섯 번째 메시지를 두드렸다. 그런데 집중이 잘 안 됐다. 방금 전 눈이 마주쳤을 때 보았던 이안의 눈빛이 계속 걸렸다. 분명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는데, 친절한 표정이었는데, 무언가 위험하고 묘한 눈빛이었다. 아니, 저 사람 눈은 항상 저렇게 생겼다. 민혁이 단백질 바를 꺼내서 뜯으면서 스스로 생각을 털어냈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막 일곱 번째 메시지까지 완성해 전송 버튼을 누르자, 민혁은 그제야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푹 기댔다. 굳어 있던 뻐근한 목을 양옆으로 가볍게 돌리자 뚝, 두둑하는 건조한 관절 마찰음이 통제실에 선명하게 울렸다. 민혁은 단백질 바를 한 입 더 씹어 삼키며, 옆에 묵묵히 앉아 있는 이안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 늦은 시간에, 잠 안 와요?" "귓가에 소리가 좀 남아 있어서요." 이명. 민혁은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온 씁쓸한 한마디에, 짐짓 덤덤하게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주었다. 기억을 재생할 때마다 노이즈가 고스란히 귓속 신경망에 쌓이고 마는 이안 능력의 대가. 오늘 오전 적으로 마주한 헌터들의 기억을 탐색하느라 몇번이고 무리하게 사용했으니, 지금 저 고요한 얼굴 아래에서는 뇌를 찌르는 듯한 노이즈와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이안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민혁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민혁 역시 연신 능력을 쥐어짜 낸 탓에 꽤나 피로해 보였다. 수척해진 뺨과 팔뚝에 붉게 도드라진 핏줄, 눈 밑의 짙은 그늘까지. 그럼에도 끝까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집요함이 이안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안이 가만히 민혁의 목덜미로 시선을 내렸다. 옷 사이로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맥박이 보였다. 잠깐, 아주 잠깐, '.....저 목을 내 손으로 틀어쥐어 보면 귀여운 얼굴로 울어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이안은 이내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올리며, 그 서늘한 충동을 가볍게 삼켜냈다. 그리고는, 부드럽고 다정한 표정으로 민혁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민혁씨, 좀 자요." "확인해야 해요." "제가 보고 있을게요." 민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이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안은 이미 시선을 화면으로 부드럽게 고정하고 있었다. 그는 귓속에 노이즈가 남아 있는 채로 저 여유로운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민혁은 선을 긋듯 다시 모니터를 보며 단백질 바를 씹어 삼켰다. 아까 그 눈빛이 또 한 번 머릿속을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서버가 돌아가는 소음이 통제실 내부에 낮게 깔렸다. * 잠복해 있던 언리드 쪽에서 연락이 온 건 오후를 넘겼을 때였다. 민혁의 단말기 화면 위로 짧은 메시지가 들어왔다. 발신자는 발키리. 설희에게 공유한 루트에서 헌터가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민혁이 화면을 보며 초콜릿 바를 씹던 것을 멈췄다. 옆자리에서 밤새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안 역시 상체를 가볍게 앞으로 기울이며 화면을 들여다봤다. 확정.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설희야.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한결의 답이 바로 왔다. — 다음 단계 준비하죠. 민혁이 화면을 닫지도 못한 채 피로와 씁쓸함이 한데 엉킨 몸을 의자 등받이에 무겁게 기댔다. 작전이 성공한것과 기분이 가라앉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한결이 통제실로 걸어 들어온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2차 정보 심어야 해요." "......응. 심어야 하는데." 민혁은 책상을 톡톡 초조하게 두드리던 손가락을 뚝 멈추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력 손실이 문제야. 지금 각 구역 리더들 절반이 구역으로 내려갔어. 습격당한 거점에 남은 인원들 수습하러. 여기 남아있는 인원이 절반도 안 돼." 한결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하다, 이내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그거 써먹어요." 민혁이 한결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전력 손실이 진짜인 거잖아요. 고진혁도 알고 있을 거고. 그러면 지금 만신창이가 된 우리가 부상 회복과 함께 전력을 보충하려 한다는 게 저들 입장에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요. 거기서 시작해요." 민혁이 화면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 구역에서 올라오는 부상자들이 천안 쪽 폐공장 한 곳에 집결 중이라는 거로 가자. 마침 천안 산업단지 내부에 임시 아지트가 하나 있어. 부상자와 수습 인원 포함해서 사십 명 규모로." "그렇게 되면 고진혁 입장에서는 두 가지가 단번에 눈에 들어오겠죠." 한결이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패잔병을 한 번에 청소할 수 있는 기회 하나, 그리고 우리가 수습하러 간다면 핵심 전력 일부도 그쪽에 묶인다는 거 둘. 안 움직일 수가 없어요." 민혁의 눈빛이 빛나며 곧바로 키보드를 잡았다. "실제로는 폐공장을 완벽히 비워두고. 헌터들이 지하로 깊숙이 들어오면 그때 잡는 거야. 능력 쓸 공간도 없고, 빠져나올 루트도 없는 구조로 만들어야 해.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해." "그 준비는 형이 하면 돼요. 공간 설계는 형 거잖아요." 민혁이 긴장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손가락을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알겠어." 짧고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한결이 만족스러운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면서 말을 이었다. "설희한테 이 정보를 주면 고진혁에게 바로 들어 갈거예요. 움직이기 전에 준비 끝내야 해요." 한결이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멈추면서 문득 이안을 봤다. 이안이 벽에 등을 기댄 채 그쪽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한결이 피식 웃고 나갔다. 이안이 다시 민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통제실 문이 열리고 한결이 막 복도로 나오는 순간,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서 있는 윤산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작전을 짜며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던 한결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호선을 그리며 예쁘게 올라갔다. 그는 성큼 걸어가 윤산의 코앞에 숨결이 닿을 만큼 바짝 붙어섰다. "저 기다렸어요?" "지나가던 길입니다." 윤산이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 담담한척 대답하자, 한결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슬그머니 막다른 복도 끝을 향했다. '여기가 끝인데.' 윤산 역시 자신이 말을 하고도 이상했다는걸 깨달았는지, 잠시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가 이내 슬그머니 올라왔다. 한결이 윤산의 귓가에 닿도록 낮고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대리님, 저 또 뜨거워요." "그렇습니까." 윤산이 짧게 받으면서, 별 것 아니라는 듯 자연스레 손을 들어 한결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가볍고, 아무렇지도 않은, 지극히 덤덤한 동작. 순간, 한결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처음으로 윤산이 먼저 손을 잡았다. 그동안 늘 자신이 핑계를 대며 거짓말로 만져왔던 손이었다. 그 사실에 한결의 심장이 사정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작 일을 저지른 윤산은 꼿꼿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의 유도등 불빛 아래에서도, 그의 창백하던 귀 끝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손을 얹은 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역력했다. 한결이 그 옆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웃었다. 소리 없이, 눈꼬리부터 접히는 웃음. 윤산의 차가운 손바닥이 손등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좋다." 한결이 아주 낮게, 혼잣말처럼 뱉었다. 윤산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온통 붉어진 귀와 뺨을 한결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정면만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손만으로는 열기가 다 식지 않을것 같아요." 한결은 슬그머니 팔을 뻗어 윤산의 어깨를 제 단단한 품 안으로 감싸 안았고 그대로 복도를 나란히 함께 걸어갔다. 윤산은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 빛인 채로도 한결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 설희의 단말기에 메시지가 온 건 다음 날 오전. 발신자는 민혁이었다. 스파이가 있다는 게 알려진 상황이니 회의를 열 수 없다. 신뢰할 수 있는 인원에게만 따로 공유한다는 메시지. 설희가 그 한 줄을 읽는 순간, 가슴이 한 박자 내려앉았다가 올라왔다. 신뢰할 수 있는 인원. 설희가 호흡을 억누르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전국 기지 습격으로 부상을 입은 각 구역 능력자들이 천안 쪽 폐공장을 거점으로 집결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십 명 규모, 구역별 수습 인원 포함. 집결 완료 예정 시간과 폐공장 좌표까지 명시돼 있었다. 설희가 화면을 닫지 않고 그대로 읽었다. 이상할 게 전혀 없는 메시지였다. 기지들이 무참히 털렸으니 남은 인원들을 한곳으로 모아야 하는 건 당연했다. 천안이라는 지리적 위치도 납득이 갔고, 부상자 규모도, 집결 시간도 자연스러웠다. 민혁이 이런 상황에서 인원을 수습하는 방식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위화감. 아니, 죄책감이던가. 설희가 전송 창을 열었다. 좌표와 집결 시간을 기계적으로 복사해서 붙여넣었다.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 위태롭게 올라갔다. 멈추지 않았다. 결국 손가락이 무겁게 내려갔다. [전송 완료] 화면이 차갑게 바뀌는 순간 설희가 단말기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바깥에서 바람 소리가 낮게 들렸고, 안전기지의 환기 소음이 그 위로 서글프게 깔렸다. 설희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머릿속에 피어오르는 그 어떤 죄책감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 이성을 비워냈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태풍이었다. "여기 있었어요?" 태풍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말했다. 그의 손에는 시원한 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설희의 것을 당연하다는 듯 내밀면서 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설희가 물을 받고 잠시 태풍을 바라봤다. 태풍이 천장을 보다가 설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설희가 시선을 내리면서 물잔을 내려놓았다. 태풍이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냥 다시 천장을 봤다. 그 침묵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유일하게 안심하고 숨을 쉴 수 있는 도피처 같았다. 태풍이 처음 강원 6구역에 들어온 건 8년 전이었다. 기억하는 자들에 막 발을 들인 신참이었고, 설희는 얼마 전 리더 자리를 받은 참이었다. 처음 합류했을 때 태풍이 한 말이 뭐였는지 설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리더님, 저 잘 싸워요. 믿어보세요.' 자신만만하던 그 얼굴이 누군가의 흔적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설희가 기억하는 남동생의 마지막 얼굴. 어려서부터 설희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 능력이 개화하자마자 정부에게 처참하게 사냥당한 아이. 그 피투성이 동생의 마지막 눈빛이 태풍의 얼굴에 기이할 정도로 완벽하게 포개졌다. 설희는 그날 이후 태풍을 내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능력자 사냥이 잔혹하리만치 절정이던 그해 겨울, 터널 전투에서 바로 그 일이 있었다. 고진혁이 기절한 태풍 옆에 무릎을 꿇었을 때, 설희는 달려가려 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게 늦어버렸다. 고진혁이 천천히 일어서면서 설희를 봤는데 그 얼굴이 소름 끼칠 정도로 담담했다. 분노도 경고도 아닌, 이미 다 끝난 일이라는 얼굴. 그 담담함이 그 어떤 협박보다 더 무서웠다. 고진혁이 말한 단어들만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생체 연동, 스위치, 언제든 어디서든. 설희가 협력하지 않는 순간, 그 스위치가 가차 없이 눌릴 거라고. 그 이후로 7년 동안 설희는 복종하며 협력했다. 태풍은 아무것도 모른다. 자기 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도, 설희가 그 7년 동안 그를 살리기 위해 뭘 해왔는지도. 그냥 설희 옆에서 강원 6구역을 지키면서, 부상이 나면 붕대를 감아주고, 밥을 챙겨주고, 오늘도 물을 두 잔 들고 왔다. 그게 전부였다. 설희가 한 번도 말로 한 적 없는 것들을 태풍은 그냥 행동으로 채웠다. 알아서, 말없이, 8년 동안. 태풍이 옆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드는 것 같았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설희가 그 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창문 쪽으로 옮겼다. 방금 보낸 메시지가 고진혁한테 닿았을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연스러웠다. 그게 오히려 더 무겁고 고통스럽게 다가왔다. 지잉. 설희가 단말기를 확인하고 다시 내려놨다. — 확인. 환기 소음이 낮게 계속됐다. [186:08:02] # 21화. 미끼 # 민혁이 아무도 없는 복도 끝에서 능력을 펼치자, 벽면이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며 작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성인 여섯 명이 들어서면 꽉 찰 정도로 좁고 낮은, 외부와 완벽히 차단된 밀실. 방 안으로 먼저 걸음을 옮긴 민혁이 단말기를 켜자 허공 위로 천안 산업단지의 입체 지형도가 푸르스름하게 떠올랐다. "들어와."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는 안전한 공간이었다. 윤강과 원시인이 먼저 걸어 들어왔고, 그 뒤를 이은 윤산의 등 뒤로 한결이 그림자처럼 바짝 밀착해 들어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윤산의 옆자리를 자연스럽게 꿰찬 한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루나와 사탕을 오도독 씹고 있는 백설까지 합류하자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백설은 내부를 한번 슥 훑어보고는 구석 벽면에 가만히 등을 기댔다. 민혁이 홀로그램 지형도를 손끝으로 짚으면서 말을 꺼냈다. "정보가 고진혁한테 들어간 거 확인됐어." 그가 화면을 가볍게 쓸어 넘기자 천안 폐공장의 상세한 내부 구조도가 나타났다. 지하로 길게 이어지는 통로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고, 그 끝에는 사방이 막힌 넓고 텅빈 공간이 펼쳐졌다. "헌터들이 지하 깊숙이 들어오는 순간, 내가 출구 쪽 공간을 접어서 퇴로를 완벽히 끊을 거야.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구조니 거기서 한 번에 처리하면 돼." 민혁의 설명에 방 안의 온도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원시인이 홀로그램을 올려다보다가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그런데 처리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무구한 질문에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민혁은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단백질 바를 꺼내 뜯으며 한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팔짱을 낀 채 구조도를 응시하던 한결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확실하고 빠르게 끝내야 해요."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하고 여유로운 음색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서늘한 무게감은 전혀 달랐다. "OS 전투 전에 여기서 전력 소모할 여유가 없어요. 단순히 가두고 시간 끄는 방식은 안 돼요. 헌터들이 얼마나 밀려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민혁 형이 공간 유지하느라 힘을 다 빼버리면, 진짜 싸움에서 대책이 없어져요." 윤강이 한결의 옆얼굴을 무겁게 주시하자, 한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통로로 들어오는 족족, 전부 숨통을 끊어놓는 게 맞습니다. 저랑 언리드 멤버 셋이면 충분해요." 그 말이 방 안에 가라앉는 동안, 구석에서 사탕을 깨물어 먹던 백설이 번쩍 손을 들었다. "나도 갈래." 한결이 고개를 돌려 백설을 바라보았다. 구조도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백설의 진홍빛 눈동자가 묘한 갈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완벽한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좋아요. 같이 가도 됩니다." 한결이 건조하게 대꾸하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내내 침묵을 지키던 윤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죽이지 않을 수는 없습니까?" 그 나직한 한마디가 방 안의 공기를 가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럼 당분간 제 발로 걸어 나가지도 못할 정도로만, 깔끔하게 제압할게요." 한결의 즉각적인 대답이 튀어나왔다. 찰나의 망설임조차 없는, 윤산의 말이 끝 맺어지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답이었다. 방금 전까지 무자비하게 숨통을 끊겠다고 말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의 완벽한 태세 전환이었다. 순간 방 안이 기묘한 정적으로 휩싸였다. 루나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결과 윤산을 번갈아 보았고, 단백질 바를 입에 밀어 넣던 민혁의 손길도 우뚝 멈췄다. 윤강은 헛웃음을 삼키듯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고, 상황 파악이 안 된 원시인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결 씨, 평소에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지 않았어요?" "제가 그랬나요?" 한결은 지형도를 바라보며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너무나도 태연한 안색이었다. 원시인이 이상하다는 듯 한마디를 더 얹으려 하자, 옆에 있던 루나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하지 말라는 루나의 필사적인 눈짓에 원시인은 얼떨결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입안에서 막대사탕을 쏙 빼내 손에 쥔 백설이 한 박자 늦게 몸을 돌렸다. "나 안 갈래." 한결이 백설을 봤다. "왜요." "재미없잖아. 다 살려두면." 백설은 흥미가 완전히 식어버린 얼굴로 툴툴 거리더니 다시 벽을 보며 외면해 버렸다. 더는 관심조차 두지 않겠다는 새침한 태도에, 루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연신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렸다. "알겠습니다." 한결이 짧게 상황을 정리하며 다시 지형도로 눈길을 주려는데, 가만히 한결을 바라보던 윤산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섰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한결의 미간이 단번에 좁아졌다. "대리님은 안돼요.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한결 씨 발열 때문입니다." 윤산이 정면으로 한결의 시선을 마주해 오며 나직하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저도 같이 있어야 체온 조절이 됩니다." "그래도 안돼요. 너무 위험―" "그리고, 한결 씨 강하잖아요." 윤산이 툭 던지듯 덧붙인 그 한마디에, 밀실 안의 시간이 순간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말을 끝내자마자 윤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애꿎은 홀로그램 지형도만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하지만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그의 귀 끝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대단한 칭찬이자 신뢰를 표현 해놓고 뒤늦게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뚝딱 거리는 게 역력했다. 한결이 굳어버린 자세로 윤산의 옆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눈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라가고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어지는 미소. 그것은 평소의 인위적인 미소가 아니었다. 방 안의 모두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온전한 기쁨과 숨길 수 없는 신남, 순수한 행복으로 가득 찬 진짜 웃음이었다. 옆에서 그 지독한 주책을 실시간으로 직관하던 루나는 음료수를 마시려다 순간 사레가 들려 컥, 하고 숨을 들이켰다. ".......알겠어요." 한결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윤산의 바로 옆자리로 한 발짝 더 바짝 좁혀섰다. "같이 가요, 대리님." 윤산은 제 뺨까지 밀려드는 후끈한 온기를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민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단백질 바를 한 입 더 씹어 삼켰다. 윤강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지형도로 시선을 옮기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원시인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민혁의 등을 툭툭 쳤다. "형, 저 두 사람 뭔가 있어요?" "몰라." "아니, 근데 한결 씨 윤산 대리님 말은 진짜 잘 듣는다. 원래 저랬어요?" "몰라." "형, 나 뭔가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응." 민혁이 영혼 없이 말을 자르고는 홀로그램 지형도의 핵심 지점을 팍 짚으며 다음 단계로 대화를 강제로 전환했다. 원시인은 여전히 아쉬운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이미 작전 모드로 돌아선 민혁의 기세에 눌려 강제로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모든 작전 회의가 완전히 끝난 후, 밖으로 나온 원시인이 윤강의 옷자락을 붙잡고 슬그머니 물어본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형, 그런데 아까 한결 씨 왜 그랬던 거예요? 왜 그렇게 갑자기 얌전해져서 말을 잘 듣고, 또 왜 그렇게 강아지처럼 신나 한 거예요?" 윤강이 멈춰 서서 제 옆에 찰싹 붙어 있는 시인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눈을 깜빡이며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동공을 잠시 바라보던 윤강이 이내 낮게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알게 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도 가르쳐줘요." 윤강은 대답 대신 커다란 손으로 시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장난스레 파헤치듯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시인의 어깨를 단단한 품 안으로 감싸 안으며 복도를 따라 유유히 걸어갔다. 원시인은 억울한 듯 투덜거리면서도, 제 어깨를 감싸 쥔 윤강의 묵직한 온기에 이끌려 얌전히 발걸음을 맞췄다. 그들이 멀어져 가는 복도 끝에서, 민혁이 임시 공간을 닫는 미세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안쪽으로 접혀 있던 벽면이 서서히 펴지며 다시금 틈새 하나 없이 매끄럽게 맞물렸다. * 천안 외곽, 폐기물 처리 시설이 밀집한 산업단지 끄트머리는 낮 시간임에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황량했다. 줄지어 선 폐공장들 중 가동 중인 시설은 단 하나도 없었고,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들은 외벽이 가차 없이 녹슬고 유리창이 깨진 채 흉물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억하는 자들의 아지트는 그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안쪽에 위치해 있었다. 진입로가 좁고 주위를 둘러싼 건물이 없어,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고 내부 상황을 완벽히 감추기에는 최적의 구조였다. 한쪽 귀에만 이어폰을 꽂은 제로가 무표정한 얼굴로 껌을 씹으며 공장 외벽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구조를 파악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산책을 하는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태도였다. "범위 잡을게요." 시선은 정면에 고정한 채, 제로가 툭 던지듯 말했다. 옆에 서 있던 한결이 구조도를 떠올리며 지시를 보탰다. "지하 전체야. 건물 외벽까지 완전히 덮어야 해." "알아요." 짧은 대꾸와 함께 제로가 다시 걸음을 뗐다. 콘크리트 바닥을 딛는 그의 발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공장 입구의 낡은 철골 기둥에는 하데스가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후드티 주머니에 양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에는 유독 깊은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헌터 몇이나 오는 거예요." "확실하진 않아요. 최소 삼십은 넘을 거예요." 한결의 답변에 하데스가 느릿하게 후드 모자를 깊게 뒤집어썼다. "많네요." 귀찮음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는 그 어떤 긴장감도, 두려움도 없었다. 반면 아수라는 진작부터 온몸의 세포를 예리하게 세우고 있었다. 정문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입구를 노려보는 엄청난 거구의 삭발한 머리와 팔뚝의 붉은 문신이 흐릿한 오후 햇살을 받아 흉흉하게 빛났다. 두터운 가죽 조끼 한 장만 걸친 채 서 있는 거대한 실루엣은 존재 자체만으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한결이, 나 오늘 얼마나 써도 돼." "적당히요. 전부 살려둬야 해요." "......" 그 짧은 조건에 아수라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번졌다. "그럼 그냥 출구만 막으라고?" "네. 지하에서 올라오는 놈들 퇴로만 차단해요. 기절시키는 것까지는 괜찮으니까." "겨우 그것만?" "그것만요." 아수라는 제 육중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들의 실랑이 옆에서, 윤산은 조용히 아카이브 아이를 가동했다. 시야 막 너머로 건물의 구조가 선명하게 펼쳐졌다. 지하 통로와 사방이 막힌 공동, 그리고 비상구의 위치까지 파악해 나가는 윤산을 한결이 슬쩍 곁눈질했다. "대리님, 제 뒤에 바짝 붙어 계세요." ".....저도 현장 전투 경험은 많습니다."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듯 윤산이 담담하게 받아치자, 한결은 평소의 장난기를 지워낸 진지한 얼굴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래도 안 돼요. 진짜로요." 완강한 태도에 윤산은 결국 입으로 밀려 나오던 반박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윤산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한결은 만족했다는 듯 시선을 정면의 공장 건물로 돌렸다. 붉은 노을이 뉘엿뉘엿 저물며 사방에 짙은 음영이 깔릴 무렵, 마침내 헌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터들의 선두가 공장 내부로 발을 디디는 바로 그 순간, 한결의 동공 안쪽에서 짙은 보랏빛 인광이 번뜩였다. 그의 싱크가 레이더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지하로 진입하는 헌터들의 뇌파가 한결의 싱크에 촘촘하게 걸려들기 시작했다. 숫자가 많았다. 한결이 파동의 범위를 한 단계 더 넓게 개방하자, 체온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열기가 피부를 덮기도 전에, 옆에 서 있던 윤산의 서늘한 냉기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혈관을 타고 번지던 열감이 윤산의 냉기에 순식간에 안정적인 궤도에 정착했다. "시작하죠." 기둥에 기대어 있던 하데스가 바닥을 향해 시선을 툭 던졌다. 순간, 공장 내부에 드리워져 있던 어둠과 음영들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일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벽면을 타고 바닥을 가로지르던 새까만 그림자들이 헌터들의 발목을 사정없이 낚아챘다. 억누른 비명이 채 터지기도 전에, 그림자에 속박된 이들이 스펀지에 흡수되듯 지하로 고꾸라지며 소리가 뚝 끊겼다. 이상을 감지한 후발대 헌터들이 급히 걸음을 멈추며 제각기 능력을 꺼내 들었고, 그것이 본격적인 사냥의 신호탄이 되었다. 한결이 싱크를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능력을 개화해 반격하려던 헌터 여섯 명의 신경 회로가 일시에 다운됐다. 찌릿하게 손끝이 마비되는 감각과 함께 그들은 모든 움직임이 봉쇄됐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적들의 틈을 놓치지 않고 하데스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일렁이던 어둠이 지하 공간을 뒤덮으며 거대한 그림자 감옥을 완성했다. 그림자 안으로 들어온 헌터는 제 발로는 절대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공장 후면의 비상구 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데스의 그림자를 가까스로 피해 지하에서 탈출하려던 헌터 네 명이 철문을 박차고 튀어나오다, 정문 앞에서 버티고 서 있던 아수라와 정확히 정면으로 마주쳤다. 아수라가 천천히 팔짱을 풀자, 그의 구릿빛 피부 위로 둔탁한 금속성 광택이 흐르며 전신이 강철보다 단단한 질감으로 변모했다. 공포에 질린 선두 헌터가 반사적으로 파괴적인 충격파 능력을 폭발시켰다. 대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파동이 아수라의 가슴팍에 직격했다. 하지만 아수라는 고개조차 꺾이지 않았다. 육중한 충격 에너지는 그의 몸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상쇄되어 흡수될 뿐이었다. "간지럽네." 아수라가 씩 웃으며 육중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네 명의 헌터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한꺼번에 쓸려 나가며 콘크리트 벽면에 처참하게 박혔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줄줄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려 기절했다. "이 정도면 살려둔 거 맞지?" 아수라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안쪽을 향해 호쾌하게 외쳤다. 그 소란의 한복판에서도 제로는 여전히 공장 외벽을 따라 귀찮은 듯 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를 따라 Null의 보이지 않는 장막이 거대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내부에서 아무리 격렬한 파동이 몰아치고 강철이 부딪쳐도, 제로가 그어놓은 경계면에 닿는 순간 모든 흔적은 연기처럼 지워졌다. 외부에서는 이 폐공장이 그저 정적에 잠긴 유령 건물로 보일 터였다. 풍선껌을 씹으며 청소를 하듯 현장을 무심히 확인하는 제로의 안색에는 작은 미동도 없었다. 지하에서는 여전히 빠져나가려는 적들의 처절한 발악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하데스의 정교한 그림자 조작 아래 고장난 장난감처럼 쳐박힐 뿐이었다. 하데스는 후드 모자 끈을 귀찮다는 듯 만지작거리며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 수십 갈래의 그림자가 사방을 종횡무진하며 단 한 명의 도망자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무력화된 적들의 머리 위로 한결이 싱크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뇌파를 일일이 짚는 번거로운 과정 대신, 영역 내에 존재하는 모든 의식 회로를 거대한 질량으로 찍어 눌렀다. 순간적으로 뇌가 타버릴 듯한 열감이 한결의 온몸을 덮쳐왔지만, 언제나처럼 윤산의 얼음장 같은 냉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들어왔다. 두 온도가 맞물리는 순간 한결이 싱크를 완전히 개방했다. 지하 밑바닥에서 헌터들이 맥없이 고꾸라지는 건조한 타격음이 쿵, 쿵, 쿵 연달아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아수라가 두리번거리면서 안쪽을 훑었다. 더 싸울 게 없나 찾는 눈빛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하데스가 그림자를 거두면서 모자를 벗었다. 두 사람이 멀뚱히 서 있는 그 사이, 한결이 윤산의 눈치를 힐끗 살피더니 지하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부스럭거리는 짧은 소음이 지나간 후,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한결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한 손에는 기절한 헌터 한 명의 뒷덜미가 덜렁덜렁 쥐여 있었다. 한결이 헌터를 윤산 앞에 내려놓으며 눈치를 살짝 봤다. "죽은 거 아니에요." 윤산이 당황한 듯 한결을 보자, 한결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기절만 한 거예요. 확인해봐요." 윤산은 어서 확인해보라는 한결의 간절한 눈빛에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쓰러진 헌터의 경동맥 부근에 손가락 두 개를 지그시 가져다 댔다. 선명한 맥박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자 윤산이 손을 거두며 한결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있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결의 표정이 활짝 피어올랐다. 눈꼬리가 가늘게 접히며 안색 전체가 환해지는 해맑은 미소. 그의 완벽한 피지컬 뒤로 꼬리가 사정없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환각이 보일 지경이었다. "약속 지켰어요."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마주하자, 윤산은 묘하게 밀려오는 간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슥 시선을 돌려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지만 창백한 귀 끝이 이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루나가 현장에 없다는 사실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공장 한편에서 가만히 서있던 하데스가 그 광경을 보며 아수라 옆으로 다가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거 뭐예요." "몰라." "칭찬받으려는 거예요?" "그런 것 같네." 아수라가 한결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언리드 이미지 혼자 다 깎아 먹고 있어." 그때, 제로가 외벽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면서 이어폰을 빼서 주머니에 넣고는 아수라와 하데스 곁으로 왔다. "끝났어?" 아수라가 물었다. "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지하에 무덤처럼 쌓인 헌터들을 영혼 없이 응시하던 제로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저 먼저 가도 되죠." "잠깐, 뒷마무리—" "일거리 또 늘리지 마요." 아수라의 외침을 가볍게 씹은 제로가 이미 저 멀리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아수라는 단체로 제멋대로인 팀원들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고진혁의 단말기에 오류 신호가 들어온 건 해가 완전히 넘어갔을 때였다. 천안으로 급파했던 대규모 투입 인원들로부터 그 어떤 보고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통신 장애라고 판단해 명령을 내렸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고진혁이 파동 감지 스캐너를 활성화했다. 모니터를 확인한 그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신호 전무. 헌터들이 폐공장 좌표로 진입한 직후부터 현재까지, 현장에서는 단 한 줄기의 파동도 감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서른 명이 넘는 노련한 전투 능력자들이 있는 공간에서 파동 스펙트럼이 완전히 제로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자연스러울 수 없는 현상이었다. 고진혁이 단말기 화면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덫이군.' 고진혁은 가죽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며 어두운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천안 폐공장 부상자 집결 정보. 완벽하게 설계된 유인책. 그 기밀이 자신에게 도달했던 타임라인과 정보 유출 경로를 머릿속으로 정교하게 거슬러 올라갔다. 설희. '기억하는 자들' 강원 6구역의 리더이자, 지난 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내부 정보를 꼬박꼬박 상납해 왔던 완벽한 복종의 루트. 고진혁이 한 손으로 턱을 괴며 미간을 좁혔다. 설희라는 이름 석 자 옆에 처음으로 서늘한 물음표가 낙인찍혔다. [160:44:51] # 22화. 균열의 끝 # 태풍이 쓰러진 건 아무 예고도 없었다. 복도를 걷다가 마치 신호가 꺼져버린 기계처럼 그냥 무릎이 꺾였다. 그리고 바닥. 설희가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을 때 태풍은 이미 복도 한가운데 쓰러져 있었다. "태풍아!" 비명을 지르며 설희가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급히 그의 어깨를 붙잡아 돌려눕히자, 태풍이 간신히 초점 없는 눈을 힘겹게 떴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비 오듯 식은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설희가 태풍의 몸 곳곳을 빠르게 훑었다. 겉으로 드러난 외상은 전무했다. 다른 능력과의 충돌로 인한 파동상의 흔적조차 없었다. 순간, 설희의 전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굳어버렸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감각이었다. 7년 전, 고진혁이 설명했던 바로 그것. '생체 연동. 언제든 어디서든.' 고진혁이 스위치를 건드린 것이다. 다행히 태풍의 숨은 아직 붙어 있었다. 이건 명백한 경고이자 테스트였다. 설희가 여전히 자신들의 유용한 패로 남아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돌아서 버렸는지 확인하려는 잔인한 방식. 태풍이 흐릿한 시선으로 설희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아랫입술을 뗐다. "리더.....왜 그런 눈으로 봐요......" 정작 태풍은 자신이 왜 쓰러졌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갑작스러운 빈혈이나 피로 누적일 뿐이라 여기는 듯했다. 설희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누르며,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괜찮아. 잠깐 방에 누워서 쉬고 있어." 태풍을 겨우 방에 데려다 눕힌 설희는 복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길게 뻗은 복도 끝, 환하게 불이 켜진 작전 통제실이 보였다. 설희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선 순간, 통제실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동결되듯 가라앉았다. 모두가 설희의 창백한 안색과 미세하게 떨리는 어깨를 봤다. 정적 속에서 설희는 마침내 모아둔 숨과 함께 오랜 비밀을 터뜨렸다. "태풍이 몸 안에......폭탄이 있어요." 순식간에 방 안이 죽은 듯 고요해졌다. "7년 전, 고진혁이 강제로 심어둔 거예요. 생체 연동형이라 어떤 물리적, 능력적 방법으로든 억지로 빼내려고 하면 그 즉시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했어요." 설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방금 태풍이가 복도에서 쓰러졌어요. 고진혁의 테스트예요. 내가 아직 쓸 만한지 간을 본 거겠죠. 조만간 완전히 스위치를 누를 거예요." 주민혁이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화면에서 시선을 뗐다. 통제실 구석 소파에 기대어 있던 윤강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앉아요." 설희가 멍한 눈으로 윤강을 바라보자, 그는 담담하게 의자 하나를 그녀의 앞으로 쓱 밀어주었다. 설희는 잠시 망설이듯 서 있다가, 이내 힘이 풀린 다리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안 씨." 윤강의 부름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설희의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의자를 당겨 앉은 이안이 부드러운 눈으로 말했다. "손 주실 수 있어요?" 설희가 떨리는 손을 내밀자, 이안의 손가락 두 개가 맥박이 뛰는 곳에 살포시 얹어졌다. 오래된 LP판이 긁히며 돌아가는 듯한 낮은 잡음이 통제실 전체에 잔잔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공에 투명한 빛의 입자들이 아지랑이처럼 모여들더니, 홀로그램 영상처럼 선명하게 열렸다. 7년 전 터널 안. 설희가 달려가고 있었다. 그 끝에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어린 태풍의 옆에 고진혁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억지로 빼내려고 하면 죽어. 잊지 마라, 이 녀석의 목숨이 네 손가락 끝에 달렸다는 걸' 화면 속 설희의 얼굴은 핏기가 가신 채 처절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통제실에 모인 리더들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그 참혹한 과거를 응시했다. 기억의 장면들은 빠르게 전환되며 이어졌다. 처음에는 사소한 정보들이었다. 각 구역의 대략적인 인원 규모, 이동 패턴, 그리고 일상적인 회의 요지들. 단말기 앞에서 전송 버튼을 누를 때마다 설희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 얼굴이 무려 7년이었다. 어느새 통제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려 있었다. 방에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리더를 따라왔던 태풍이, 문가에 선 채 허공에 떠오른 설희의 과거를 지켜보고 있었다. 7년 동안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매일 지옥을 걸었을 리더의 진실을 마주한 태풍의 몸이 충격으로 굳어졌다. 이안이 설희의 손목에서 손을 거두었다. 허공을 부유하던 기억의 파편들이 먼지처럼 서서히 부서져 흩어졌다. 설희는 끝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아프도록 꽉 쥐고 있었다. 그때 벽에 기대어 상황을 지켜보던 한결이 윤산의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좁히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빼내려 하면 죽는다.' 몸 속 폭탄에 물리적인 장치뿐만 아니라, 해제를 방해하는 능력이 함께 걸려 있다는 뜻이겠네요." "....맞아요. 그래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어요." 설희가 체념이 섞인 담담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결이 제 단말기를 톡톡 두드리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방법이 있어요. 원시인 형도 도와야 하고." 잠시후 연락을 받고 통제실로 들어온 제로가 이어폰 한쪽을 빼면서 무심한 눈으로 한결을 봤다. "제로. 태풍 씨 몸 전체를 Null로 덮어줘." 제로가 태풍을 봤다가 다시 한결을 봤다. "몸 속 폭탄에 능력이 걸려있을 수 있어." "알겠어요." 제로는 짧게 대답하고는 문가에 서 있던 태풍에게로 다가갔다. 태풍은 영문 모를 감정에 휩싸여 굳어 있다가, 제로와 설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좀 이상한 느낌 들 수 있어요." 제로가 태풍 앞에 서면서 Null을 펼쳤다. 순간, 태풍의 전신을 완벽하게 휘감는 투명한 장막이 밀려들었다. 제로가 태풍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을 읽기 시작했다. 태풍의 능력 아래 감춰진 아주 작은 다른 능력의 파동. 심장 부근. 제로가 그 파동을 Null로 덮어 격리하며 원시인을 향해 턱짓했다. 한결이 원시인을 보며 말했다. "이제 형 차례에요. 강이 형님때 처럼만 하면 돼요." 원시인이 주춤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해볼게요." 원시인이 짧게 말하며 곁에 서 있는 윤강을 봤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 신기하게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원시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태풍의 심장 쪽을 향했다. 그의 손끝에서 순백색의 '공백'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통째로 지워버리는 삭제가 아니었다. 아주 가느다란 실처럼, 제로가 격리해 둔 정밀한 파동의 틈새만을 겨냥했다. 제로의 눈동자가 빛났다. 태풍을 덮고 있던 Null의 장막에 가느다란 틈새가 열렸다. 그 미세한 틈을 놓치지 않고 원시인의 순백색 공백이 스며들었다. 스윽―. 소리도 없는 완전한 삭제. 태풍의 몸이 한 번 들썩였다. 설희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으나, 이내 태풍의 입에서 깊고 맑은 숨이 새어 나왔다. 원시인은 백색의 빛을 거두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소중한 모래알 하나가 쏙 빠져나간 듯한, 기묘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대가로 지불된 기억의 삭제. 어떤 소중한 기억이 날아갔는지 스스로는 도무지 특정할 수 없었다. 그때, 따스한 그림자가 원시인의 시야를 채웠다. 어느새 다가온 윤강이 원시인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괜찮아?" 낮게 가라앉은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담긴 윤강의 목소리에, 원시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씩 웃었다. "형이 전부 기억해줄 거잖아요. 괜찮아요." 통제실 안이 아득한 정적에 휩싸였다. 윤강은 붉게 달아오르는 원시인의 새하얀 귀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없이 그의 조금 차가워진 손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설희는 꽉 쥐고 있던 무릎 위의 손이 스르륵 풀리며 전신에 허탈감과 해방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뜨거운 눈물이 속절없이 차올랐고, 주체할 수 없이 턱끝이 잘게 떨렸다. 자신이 그토록 고독하게 짊어지고 가던 무게가, 원시인이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괜찮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에 너무도 허망하고 완벽하게 깨부서진 것이다. 그 다정함이 너무 가볍고 또 따뜻해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설희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자, 태풍이 조용히 걸어와 그녀의 곁에 앉았다. "리더, 나중에 다 얘기해줘요. 혼자 버틴 시간들 전부 다요." 설희는 메어오는 목을 가누지 못해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태풍은 말없이 큰 어깨로 그녀의 등을 가만히 지탱해 주었고, 설희는 마침내 지옥 같은 시간에서 벗어나 길고 긴 해방의 숨을 내쉬었다. 쾅―! 같은 시각, 서울 어딘가에 위치한 고진혁의 집무실. 그의 단말기 화면에 띄워져 있던 홀로그램 스캔 모니터가 꺼지며 붉은색 [SIGNAL LOST]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박였다. 생체 연동 회로의 신호가 완전히 끊겼다. 단순한 통신 장애나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다. 연결되어 있던 추적 모듈 자체가 완전히 소멸해 버린 징후였다. 고진혁은 꺼진 화면을 서늘한 눈빛으로 응시하다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거칠게 탁, 두드렸다. "직접 가야겠군." [138:13:29] # 23화. 전날 밤 # 민혁이 회의를 소집한 건 저녁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카운트다운이 줄어드는 속도가 어젯밤과 달랐다. 계산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봤지만 결과는 같았다.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었다. 적어도 내일. 작전을 시작해야 했다. 사람들이 통제실로 들어왔다. 회의 소집 명령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작전 통제실로 걸음을 옮겼다. 설희와 태풍도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태풍은 설희의 옆자리에 앉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민혁이 단말기를 조작하자 허공으로 투명한 홀로그램이 떠 올랐다. 오라클 타워의 상세 구조도 위에 현재 가용 인력의 배치 명단이 겹쳐졌다. "상황 정리할게. 카운트다운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당겨지고 있어. 지금 속도라면 늦어도 내일 안에는 무조건 움직여야 해." 민혁의 진지한 목소리가 통제실을 울렸다. "문제는 각 구역 리더들 절반이 구역 수습 때문에 내려가 있다는 거야. 여기 남은 외곽 방어 인원이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턱없이 부족해. 배치를 전면적으로 수정해야해."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민혁은 화면 속 배치도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안으로 들어갈 침투조는 변동 없어. 강한결, 윤산, 윤강, 원시인, 백설. 그리고 내가 진입 통로를 열고 유지하면서 외부 해킹을 병행할 거야. 외곽 방어는 언리드 멤버들과 충청 7구역 장태식팀, 경상 10구역 부산댁팀이 전담해 줘요. 루나는 교란."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설희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도 외곽 방어 조에 넣어주세요." 장내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설희는 리더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단호하게 덧붙였다. "제 독 안개는 광범위한 외곽 교란에 꽤 유효할 거예요. 그리고.....저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빚이 있어요." 그녀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읽었는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가만히 배치도를 살피던 윤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 역시 군말 없이 명단 맨 끝에 설희의 이름을 새로 추가했다. 태풍은 복잡한 눈빛으로 설희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풍이 쓸쓸하게 시선을 내리며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회의는 길지 않았다. 변경된 배치를 최종 확인하고 정확한 진입 타이밍을 조율한 뒤, 각자의 역할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것으로 회의는 끝이 났다. 긴장감 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복도 끝에서 장태식이 부산댁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에 선글라스를 쓴 부산댁이 낮게 말했다. "내일 죽지는 말아요, 팀장님." 장태식이 헌팅캡을 고쳐 쓰면서 받았다. "댁도요." 한결이 윤산을 찾아낸 건 통제실에서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직후였다. 윤산은 텅 빈 복도 끝 창가에 홀로 서 있었다. 단말기 화면을 심각하게 내려다보던 윤산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한결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어깨가 맞닿을 만큼 가까이 곁에 기대어 섰다. 창밖을 보며 잠시 생각을 고르는 듯하던 한결이 이내 윤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리님." "네." "요즘 대리님이랑 저, 부쩍 더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아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윤산의 새까만 눈동자가 한결을 향했다. 한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내며 입꼬리를 예쁘게 올렸다.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흘러나오는 솔직한 미소였다 "처음엔 강한결 씨라고 부르셨잖아요. 성까지 붙여서." 윤산이 말을 하지 않았다. "근데 어느 순간부터 한결 씨가 됐어요. 말투도 바뀌었고요. 예전엔 항상 다나까였는데 요즘은 요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그건, 그냥 상황이....." 윤산이 다급하게 변명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도무지 논리적인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결은 그런 윤산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목소리를 한 톤 더 낮추며 속삭였다. "복도에서 먼저 저 기다려 주시고, 손도 잡아 주셨잖아요." 불쑥 튀어나온 낯간지러운 기억에 윤산의 새하얀 귀 끝이 순식간에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한결은 붉게 물들어가는 윤산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꼬리가 가늘고 부드럽게 접혔다 "저는 그게 너무 좋아서, 말 안 하면 못 참을 것 같았어요." 윤산은 단말기를 쥔 손에 힘을 준 채 억지로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부정하고 싶었는데 할 수가 없었다. 다 맞는 말이었다. 성을 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말투가 조금씩 편해진 것도, 먼저 다가가 손을 얹었던 것도.... 전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아니, 자연스레 먼저 한 일들이었다. 윤산이 떨리는 숨을 삼키며 단말기를 내렸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그게 왜 좋습니까." "대리님이 처음으로 저한테 먼저 움직여 주신 것 들이니까요." 그 대답이 귀를 타고 흘러드는 순간, 윤산은 가슴 안쪽이 팽팽하게 조여드는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태어나서 연애 같은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낯선 기분과 떨림은 겪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지금, 이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자꾸만 한결에게 곁을 내주고 다가갔던 이유,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짓는 해맑은 웃음이 오직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이토록 심장이 뛰는 이유. 전부 하나의 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윤산이 복잡한 얼굴로 무언가 말을 꺼내려다 이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한결은 그런 윤산의 침묵을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곁을 지키며 온기를 나눠줄 뿐이었다. 한결이 윤산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일 다 끝나고 얘기해요, 나머지는." 윤산이 고개를 돌려 한결과 시선을 맞췄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한결이 올곧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윤산은 그 눈빛을 거부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렀다. "......네." 짧게 뱉어낸 대답과 달리 윤산의 심장은 통제 불능일 정도로 거세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복도 유도등 아래, 나란히 선 두 사람 사이로 설레는 침묵이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원시인은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마주 오던 윤강과 딱 마주쳤다. 윤강이 걸음을 멈추며 시인을 내려다보았다. 시인 역시 어정쩡하게 멈춰 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적막한 복도 한가운데에 묘한 기류가 감돌았다. 원시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어." "....내일 무서워요?" 시인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투명하리만치 맑은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궁금해서, 그리고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마음에 묻는 눈빛이었다. 윤강은 가만히 제 앞에 선 시인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낮고 담담하게 답했다. "네가 다칠까봐 그건 좀 무서워." 그 말이 복도에 조용히 떨어지는 순간, 원시인의 심장이 또 한번, 쿵 하고 요동쳤다 "......저 또 두근거렸어요." 시인이 작게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아주 솔직하고 숨김없는 고백이었다. 윤강이 픽 웃으며 시인의 앞으로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섰다. 시인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윤강의 커다란 손이 시인의 하얗고 부드러운 뺨 위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거친 손끝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눈 감아." "......갑자기 왜요." "감아봐." 시인은 영문도 모른 채 엉겁결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은 이미 터질 것 같은 속도로 폭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입술 위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화들짝 놀란 시인이 눈을 번쩍 떴다. 윤강이 깊고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일 내 곁에 있어."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시인의 귀 끝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타올랐다. "잘 자." 윤강은 시인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가볍게 한 번 토닥여 주고는 유유히 걸어갔다. 복도에 홀로 남겨진 원시인은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 이내 스르륵 벽에 등을 기대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른 심장 소리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시인이 손을 내리고 허망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래놓고 어떻게 자요." 아무도 없는 고요한 복도에 그 말이 조용히 번져나갔다. 같은 시각, 백설은 통로 쪽 창가에 걸터앉아 습관처럼 막대사탕을 오드득 오드득 깨물어 먹고 있었다. 루나가 양손에 음료수 두 캔을 들고 걸어오더니, 그중 하나를 백설의 코앞으로 쓱 내밀었다. 백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캔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탄산 싫어." "이건 딸기 맛이야." 백설은 짐짓 싫은 척 캔을 받아들었다. 루나가 그 옆에 나란히 걸터앉으며 제 캔을 소리 나게 땄다. 칙, 하는 파열음과 함께 두 사람은 나란히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루나가 음료수를 가볍게 한 모금 들이키고는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내일 무서워?" "아니." "나는 조금." 백설이 루나를 돌아봤다가 다시 창밖을 봤다. "그냥 다 해치우면 되잖아." "너는 그게 답이구나." 루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백설은 대꾸 대신 딸기 맛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백설이 빈 캔을 루나 쪽으로 살짝 밀었다. "더." 루나가 그걸 보고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인간병기 같았던 애가, 지금은 제 옆에서 딸기 음료를 다 마시고 더 달라고 캔을 밀어내고 있었다. "백설아." "왜." "내일 다 끝나고 또 마시자." 백설이 가만히 루나를 응시했다. 정작 말을 꺼낸 루나는 쑥스러운지 정면만 쳐다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백설이 쯧, 하고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거뒀다. "그러든가." 루나가 그 한마디를 듣고 음료수를 한 입 더 삼켰다. 속으로 번지는 웃음은 감출 수 없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작전 통제실의 메인 모니터는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민혁은 홀로 의자에 앉아 미간을 짚은 채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반쯤 베어 문 단백질 바가 들려 있었지만 더 이상 씹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내일 진입할 침투조의 최적 동선의 시뮬레이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능력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소모량을 초 단위로 다시 계산하고, 동시에 진행할 서버 해킹 타이밍을 맞추는 작업. 만에 하나 변수가 생겼을 때의 플랜 B를 가지치기 하는 것 까지. 잠들기 전에 완벽하게 확인해두지 않으면 도저히 발을 뻗고 잘 수가 없었다. 스윽—. 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이안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통제실을 한 번 둘러보더니 민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혼자 뭐해요." "작전 확인이요." 이안은 근처에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민혁의 바로 옆에 붙여 앉았다. 민혁이 힐끗 그를 보았다가 이내 무심하게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라고 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제멋대로 앉아버린 사람을 쫓아내기도 귀찮은 노릇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란히 화면을 향해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혁이 손가락으로 배치도를 짚으면서 동선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이안은 불필요한 참견 대신 담담한 눈빛으로 함께 읽어 내려갔다. 민혁이 단백질 바를 마저 한 입 베어 물며 불쑥 물었다. "잠 안 와요?" "안 오네요." "이명이요?" "오늘은 아니에요. 그냥 안 와요." 민혁은 대꾸 없이 오물거리며 화면 위의 노이즈를 제거했다. 이안이 배치도 속 침투조의 동선을 가만히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민혁 씨." "네." "내일 잘 할 거예요." 칭찬도 아니었고 위로도 아니었다. 그냥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는 이안만의 부드러운 확신이었다. 민혁이 이안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느긋하고 평온한 얼굴로 화면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민혁은 이안의 옆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이내 픽 웃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단백질 바를 한 입 더 씹었다. 통제실 내부에 낮게 깔리는 환기 소음이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여유롭게 느껴졌다. 한결이 복도에 혼자 남은 건 윤산이 자러 들어가고 나서였다. 윤산은 문을 닫기 직전, 살짝 붉어진 얼굴로 한결을 돌아보며 나직하게 한마디를 남겼었다. ".....내일 봐요." "네, 잘자요."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한결은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창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희미한 유도등만 켜진 고요한 복도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일 전투가 끝나면, 그에게 전하려고 남겨둔 단어가 있었다. ‘고백’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머릿속에 올려놓고 보니 기분이 묘했다. 살아오면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해당되는 일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늘 임무가 재밌었고, 재밌는게 좋았다. 삶에서 '좋다'라는 건 그거면 충분했다. 하지만 윤산은 명백히 달랐다. 대가 때문이 아니었다. 냉기가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싱크를 개방할 때 체온이 맞물리는 감각이 편해서가 아니었다. 그런 모든 이유를 전부 걷어내고 나서도, 가슴속 깊은 곳에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이 강렬한 흔적을 남긴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윤산이 정면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하는 것, 무표정한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작고 다양한 표정이 있는 것, 당황하거나 부끄러우면 귀 끝부터 새빨갛게 물들어 가는 것, 먼저 손을 얹어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윤산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 그 모든 것들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내일이 지나도, 그다음에도 늘 옆에 있고 싶었다. 한결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 느껴보는 이 낯설고 생경한 감정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자각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은 윤산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굴려보니 온몸의 감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순리처럼 아주 당연하게 와닿는 감정이었다. 내일이 끝나면 말할 것이다. 대가 때문이 아니라고. 늘 옆에 있고 싶다고, 그게 전부라고. 창밖에서 불어오는 밤바람 소리가 나직하게 복도를 두드렸다. 내일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24화. 침투 # 민혁이 결연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숨이 멎을 듯한 정적과 함께 오라클 타워 외벽과 맞닿은 버려진 건물의 콘크리트 벽면이 마치 종이처럼 안쪽으로 말려 들어가며 거대한 진입 통로가 열렸다. 평소보다 훨씬 넓게, 그리고 깊게. 민혁의 안색이 통로가 열리는 속도에 맞춰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깨가 말라가고 허리가 눈에 띄게 수척해졌지만, 민혁은 입에 물고 있던 단백질 바를 거칠게 씹으며 끝까지 중심을 잡았다. 오늘만큼은 단 한 순간도 흔들릴 수 없었다. "들어가." 보랏빛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낸 한결이 선두로 치고 나갔고, 형광 연청색 빛무리를 두른 윤강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원시인과 윤산을 중앙에 보호하듯 배치한 대형의 마지막은, 여전히 입안에서 막대사탕을 굴리고 있는 백설이 장식했다. 그들이 암흑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공간은 언제 열렸냐는 듯 흔적도 없이 닫혔다. 민혁이 스르륵 눈을 감으며 통로 유지에 집중했다. 저들이 코어에 도달할 때까지, 이 통로를 절대 놓쳐서는 안됐다. 동시에, 타워 바깥의 외곽 방어선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오라클 타워 북측 외벽 너머에서 굉음과 함께 D.A.B 소속의 헌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단순한 인해전술이 아니었다. 최전방에는 강력한 고등급 능력자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 뒤를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예 병력이 빈틈없이 받치고 있었다. 상공을 새까맣게 뒤덮은 탐지 드론 편대에서는 능력자를 제압하는 포박탄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아수라가 정면으로 돌진했다. 전신의 분자 밀도를 극대화해 강철보다 단단하게 바꾸는 순간, 가슴팍으로 세 발의 포박탄이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귀를 찢는 충돌음이 울렸지만, 아수라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운동 에너지를 몸으로 전부 흡수해 버린 그가 씩 웃으며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파괴적인 풍압과 함께 전방에 있던 헌터 다섯 명이 동시에 날아가 저 멀리 외벽에 처박혔다. 하데스가 지면을 가만히 내려다보자, 그의 발밑에서부터 시커먼 그림자들이 일제히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과 벽면을 거침없이 타고 오른 그림자들은 이내 헌터들의 발밑에서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지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장벽으로 솟구쳐 올랐다. 갑작스러운 차단벽에 당황한 헌터 무리 중 몇 명이 장벽 안으로 뛰어들었다가, 그림자 감옥에 발목이 묶여 지하로 끌려 내려갔다. 그 단말마 조차 암흑 속으로 완전히 삼켜져 뚝 끊겼다. 하데스가 후드 모자를 눌러 쓰며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이자, 그림자 장벽이 더욱 두꺼워졌다. 그 위로 발키리가 대기를 박차며 수직으로 솟구쳤다. 상공의 드론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올라가면서 이동 경로마다 소닉붐이 연달아 폭발했다. 첫 번째 충격파가 하늘을 날던 드론들을 휴지조각처럼 산산이 조각냈고, 방향을 꺾으며 내리꽂은 두 번째 충격파가 지상 병력의 대형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사방에서 비명과 파열음이 뒤섞였다. 그 혼란의 한가운데를 류가 유유히 걸어갔다. 적들이 그를 저지하기 위해 쏟아내는 수십 발의 총탄과 능력의 파동들은, 류의 몸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궤도에 걸려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오히려 저격수가 쏜 탄환이 그대로 역류해 발사한 주인의 어깨를 뚫었다. 류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저 산책이라도 하듯 전장을 관통했다. 그 반대편 전선에서는 위버가 나노 와이어를 공중에 개방했다. 촘촘한 나노 와이어가 허공에 그물처럼 펼쳐진 순간, 오른쪽 길목을 파고들던 병력이 일제히 우뚝 멈춰 섰다. 보이지 않는 실이 관절을 파고들며, 무릎이 사정없이 꺾이고 어깨가 단단히 굳어버린 십여명의 병력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꼴사납게 고꾸라졌다. 동시에 미라쥬가 전선 곳곳으로 제 능력을 폭발시켰다. 사방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미라쥬의 환영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복제되어 나타났다. 열 개, 스무 개, 셀 수도 없이 증식한 분신들은 단순한 잔상이 아니었다.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실체화되어 강력한 타격력을 지닌 질량체들이었다. 어느 게 진짜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환영에 적들의 조준선이 갈팡질팡 찢겨 나갔다. 한편, 제로는 아주 느긋한 태도로 손을 까딱 들어 올렸다. 껌을 씹으며 그 어떤 긴장감도 없는 지극히 사소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제로를 중심으로 펼쳐진 Null이 발동 되자마자 반경 내에 있던 헌터 여덟 명의 능력이 촛불이 꺼지듯 한순간에 소멸했다. 능력을 다시 쥐어짜 내려던 헌터들이 제 가슴팍을 내려다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제로의 영역 안에서 그들은 그저 무력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안이 서 있었다. 여전히 나른하고도 다정한 미소만큼은 입꼬리에 걸친채, 사방에서 뼈가 부서지고 폭음이 터지는 지옥 같은 전장 한가운데서도, 그는 홀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지독하게 느긋해 보였다. 이안이 오른손을 허공에 뻗었다. 틱, 지직—. 순간 오래된 턴테이블 위의 LP판이 긁히는 듯한 잡음이 사방에 깔리기 시작했다. 대기 중에 부유하던 빛의 입자들이 소음을 따라 정교하게 뭉쳐지더니, 이내 거대한 실루엣들을 형상화해 나갔다. 영상의 찌꺼기 처럼 남은 노이즈들이 실체적인 물리력을 얻어 허공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 빛으로 된 형상들이 일제히 전방의 헌터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안은 느긋하게 기댄 채 그 광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좌측 전선에서는 장태식이 지면을 누르며 능력을 개방했다. 주변의 모든 금속 성분이 장태식의 손으로 빨려들어가나 싶더니 땅 위로 거대한 강철 장벽들이 겹겹이 솟아올랐다. 적들이 파고드는 길목을 완벽히 차단하자, 그 뒤를 받치던 충청 팀 멤버들이 지형지물을 이용해 일제히 화력을 퍼부었다. "스케일 한 번 키워보자고!" 부산댁이 호쾌하게 소리치며 오른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오라클 타워 북측을 감싸고 돌던 거대한 수로에서 수십 미터 높이의 해일이 솟구쳐 올랐다. 거대한 물줄기가 마치 장벽처럼 상공을 휩쓸며 드론 편대의 절반을 통째로 집어삼켜 침수시켰고,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압도적인 수압이 지상 헌터들을 무참히 밀어냈다. 길수는 그 소란을 틈타 물 표면을 미끄러지듯 달리며, 후방에서 엄호하던 적들의 발목을 묶어버렸다. "죽여주네, 오늘!" 부산댁이 웃어젖히며 두 번째 파도를 끌어올렸다. 루나의 눈동자 안쪽에서 오로라빛 인광이 무서운 속도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서늘하고도 기묘하게 달콤한 파동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밀려들던 후방 병력이 순식간에 제자리에 굳어졌다. 루나가 페로몬 프리즘에 심어놓은 극도의 공포가 그들의 이성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병력이 하나 둘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설희가 능력을 개방해 독 안개를 전장에 자욱하게 깔기 시작했다. 태풍이 그 옆에서 강력한 풍압을 일으켜 독 안개를 적진 한가운데로 매섭게 밀어 넣었다. 독기에 노출된 적들의 몸이 까맣게 변하며 굳어 들어갔다. * 타워 외부의 폭발적인 소음과 달리, 내부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두꺼운 방호벽에 막혀 바깥의 폭음은 미세한 진동으로만 전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적막을 깨고 발밑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장을 짓누르는 묵직한 파동이 주기적으로 올라왔다. 수조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OS가 완전한 각성을 향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백설이 코를 실룩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냄새 나. 이상한 냄새." "OS예요?" 원시인이 긴장한 얼굴로 묻자, 백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썩은 것 같아." 그 말에 선두에 서 있던 윤강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그의 탄탄한 어깨 위로 형광 연청색 픽셀의 빛무리가 타닥타닥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결이 싱크를 가볍게 펼치며 건물 내부를 읽어갔다. 바로 두 층 위, 텅빈 공간에 수십 개의 파동이 밀집해 있었다. 그런데 그 질감이 살아있는 능력자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생명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기이하게 뒤틀린 듯 한 느낌. "올라가죠." 한결의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은 순식간에 두 개 층을 주파했다. 복도 끝에 위치한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한 순간, 안쪽에서 귀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문짝이 통째로 날아갔다. 하나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형체들이 무리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지만, 가까워질수록 그 기괴한 형상에 숨이 턱 막혔다. 팔다리의 길이가 기형적으로 길거나 비틀려 있었고, 신체 비율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어떤 것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기계 부품과 이종의 피부가 난잡하게 꿰매어져 있었다. 마치 무덤에서 억지로 끌어 올린 시체 인형처럼, 뼈마디가 꺾이는 듯 한 기이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AD테크가 자행한 생체 실험의 실패작들 이었다. 한결이 밀려오는 실험체들을 보랏빛 눈동자로 빠르게 훑어 내렸다. 적들의 외형을 냉정하게 분석하던 그의 시선이, 무리의 후방에서 뒤틀린 채 걸어오는 두 개의 형체에 닿았다. '.......' 분명 예전 조사 기록에는 살해당한 흔적이 남은 시신 일부만 발견 되었다고 했다. 얼굴을 알아본 건 거의 생물학적인 반사에 가까웠다.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거기서 모든 사고가 멈췄다. 감정이 와야 하는 자리가 비어 있었다. 너무 어릴 때 겪은 단절의 대가였을까. 한결은 눈 앞에 괴물이 된 자신의 부모를 보면서도 심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게 뛰었다. 슬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눈앞의 존재들은 그에게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했다. 그 사이 나머지 멤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강이 손을 뻗자, 전방을 가로막던 실험체 무리의 절반이 픽셀 조각으로 바스러지며 분자 단위로 해체되었다. 동시에 백설이 블랙홀을 개방하자 인력에 이끌린 실험체 셋이 순식간에 압축되어 소멸했다. 원시인은 손끝에서 순백색의 공백을 발현해, 달려들던 실험체들을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원시인의 시선이 한결의 앞 두 실험체에게 닿았다. 얼굴이 익숙했다. 무언가 희미하게. "저분들....분명...." 원시인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한결은 싱크를 펼치며 두 사람의 신경 회로를 찾아 짚었다. 그리고 운동 명령을 심었다. 단순한 명령이었다. '일직선으로 달려. 절대 멈추지 마.'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조된 두 육체가 통제권을 잃고 비틀거리는 기이한 걸음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복도 막다른 길에 위치한, 두꺼운 콘크리트 방화벽이 서 있었다. 거리는 단 열 걸음 남짓. 콰앙—!! 콰앙—!! 둔탁하고도 거대한 파열음이 복도를 울렸다. 한결이 충돌이 일어나는 순간 싱크를 거뒀다. 그리고 그냥 걸어갔다. 부서진 두 잔해를 향해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평소와 같은 얼굴로. "가요." 한결의 발걸음이 이미 계단 쪽을 향하고 있었다. 코어까지 단 세 층을 남겨두었을 무렵, 한결이 멈췄다. 갑자기 멈춘건 아니었다. 그의 걸음이 조금씩 느려지더니, 마치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된 인형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 이유 없이. 앞에 적이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멈춰있는 상태로. 윤산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지금 한결이 내뿜는 파동은 지독하게 이상했다. 체온이 치솟는 것도, 가라앉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주변의 모든 소음을 빨아들인 것처럼, 그의 파동 자체가 비정상적으로 고요해져 있었다. 피부를 스치는 공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했다. 윤산은 아무말없이 손을 뻗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한결의 커다란 손 위에 자신의 하얗고 차가운 손을 가만히 얹었다. "......괜찮아요?" 한결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산을 바라본 한결이, 이내 평소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언제나 보아왔던 한결의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대리님." 아무렇지 않은 말투에 웃고있는 입술과는 달리 한결의 눈은 공허했다. 윤산은 그 이유를 알수 없었지만 한결의 손을 잡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잡고 있었다. 그저 한결의 파동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결이 손에서 전해지는 윤산의 체온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희미한 생기가 다시금 차올랐다. "가요." 타워 외부의 방어선이 한 시간을 넘기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들의 스케일이 문제였다. 아무리 해치우고 격파해도 D.A.B와 AD테크의 병력은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전방을 굳건히 사수하던 아수라의 체력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몸으로 포박탄을 연달아 받아내며 버텼지만, 고등급 헌터 두 명이 동시에 꽂아 넣은 충격파에 처음으로 그 강철같은 몸이 뒤로 밀려났다. 상공을 책임지던 발키리 역시 연이은 능력 과부하로 어깨근육이 무겁게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소닉붐으로 격추한 드론의 빈자리는 대기하던 후속 편대로 즉각 보충되고 있었다. 장태식이 이를 악물며 지면에서 금속 장벽을 세 겹으로 두껍게 연성해 올렸다. "조금만 더 버텨!" 쿠구구구궁—! 바로 그 순간, 전장 전체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파동이 감지되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에너지의 방향이 외부가 아니었다. 방어선의 가장 안쪽에서 터져 나온 파동이었다. "아이고, 미안해요! 우리들 다 같이 꽤 오래 있었는데―!" 부산댁이 선글라스 너머로 휘어지게 웃으며 손을 치켜올렸다. 헌터와 병력을 막아서던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궤도를 틀어 아군의 후방 방어선을 무자비하게 덮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규모였다. 초고압의 해일이 장태식의 강철 장벽을 종잇장 찢듯 단숨에 파괴하며 충청 팀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으악―!" 후방에 있던 미나가 물질 강화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버텼지만, 급류에 실린 수십 톤의 수압을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미나는 콘크리트에 처박히며 그대로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 "부산댁―!" 장태식이 소리치면서 사방의 금속 파편을 엮어 긴급 방어막을 쳤다. 그러나 부산댁이 손을 가볍게 흔들자 다시 한번 거대한 파도가 장태식의 방어막을 통째로 날려버렸고, 이내 길수가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수막으로 장태식의 시야와 지면을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충청 팀의 후위 대형은 격류에 휩쓸려 완전히 찢겨 나갔다. 아수라가 분노를 터뜨리며 육체 밀도를 최대치로 올려 파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철보다 단단한 육체로 수압을 찢어 발기려 했지만, 부산댁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손가락을 비틀어, 아수라의 몸위로 모든 수압을 압축시켰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 속에 아수라의 발이 지면에서 허망하게 떴고, 이내 무시무시한 급류에 밀려 외벽 지지대에 정통으로 처박혔다. 공중에서 상황을 파악한 발키리가 다급히 급강하하며 연속 소닉붐으로 파도를 흩트리려 했다. 하지만 길수가 한발 빠르게 수면을 차고 올라와 허공에 거대한 수막을 넓게 펼쳤다. 강력한 소닉붐의 충격파가 수막의 부드러운 탄성에 그대로 흡수되어 증발해 버렸다. 발키리가 경로를 바꾸려는 순간, 부산댁의 거대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채찍처럼 휘몰아쳐 그녀를 지상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지면이 움푹 패이며 발키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부산댁이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중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리며, 안타깝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팀장님, 내가 죽지 말라 했지, 내가 안죽인다고는 안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죄책감이나 미안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처참하게 찌그러진 금속 잔해를 밀쳐내며 겨우 일어난 장태식이 입가에 흐르는 핏자국을 닦아내며 부산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언제부터요." "처음부터요. 나랑 길수는 원래 이쪽 이거든." 부산댁이 픽 웃으면서 다음 파도를 끌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 파괴된 북측 외벽의 거대한 보안 게이트가 열렸다. 한 남자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고진혁이었다.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잔인하게 빛나는 그의 안광이 초토화된 외곽 전선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시선이 내부 진입로의 어둠을 향해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설희가 그 섬뜩한 살기의 방향을 읽어내는 순간, 그녀의 손끝이 다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097:19:33] # 25화. 희생 # 설희가 독 안개를 펼치기 시작한 건 고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외곽 전선은 이미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부산댁이 사방으로 밀어붙인 거대한 파도에 장태식 팀의 방어 대형이 완전히 산산조각 났고, 아수라와 발키리마저 강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채 의식을 잃고 벽면에 처박혀 있었다. 이안이 자신의 기억 실체화 능력을 쥐어짜 내며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으나, 밀려드는 적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달랐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헌터들의 공세에 방어선은 속절없이 밀려났다. 그 혼란 속을 고진혁이 유유히 걸어 들어왔다.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사냥개 같은 눈이 내부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설희가 앞으로 나섰다. 독 안개가 손끝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짙고 낮게 퍼지는 안개가 고진혁의 진입로를 막으며 지면을 기어들었다. 그가 독 안개 속으로 발을 디디려던 찰나, 거센 물줄기가 한 박자 빠르게 폭발하듯 들이쳤다. 부산댁이었다. 눈앞을 집어삼킬 듯 솟구친 거대한 수벽이 설희와 고진혁의 사이를 난폭하게 갈라놓았다. 무시무시한 수압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설희가 펼쳐둔 독 안개를 밀어냈고, 설희 역시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거칠게 밀려났다. 그 짧은 틈을 타 고진혁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내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선글라스를 가볍게 밀어 올린 부산댁이 생긋 웃으며 설희를 향해 돌아섰다. "나한테 집중해요, 리더님." 미소를 띤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설희가 독 안개를 한층 더 짙게 끌어올렸다. 이에 질세라 부산댁이 손을 뻗자 사방에서 해수가 요동치며 고층 건물 높이에 달하는 해일이 솟구쳐 올랐다. 설희는 몸을 날려 수벽을 피하는 동시에 독기의 방향을 교묘하게 틀어 수압 내부로 스며들게 만들었다. 물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독기가 역류하자, 부산댁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물속에 스민 독을 강제로 분리해 내려는 물줄기와, 그 틈새를 파고들어 통째로 부식시키려는 독기의 치열한 파동 싸움이었다. 이때 설희의 뒤를 받치던 태풍이 강력한 풍압을 보태며 독 안개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기세를 탄 독기가 순식간에 부산댁의 턱밑까지 육박했으나, 그녀는 촘촘한 수막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방어해냈다. 그 순간 측면에서 길수가 수면을 박차고 튀어나오며 태풍을 향해 물 장막을 펼쳤고, 태풍은 중심을 잃고 마구 비틀거렸다. 순식간에 전선이 사방으로 엇갈렸다. 설희는 부산댁과의 거리를 강제로 좁히며 독기를 한계까지 쥐어짜 냈다. 하지만 부산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설희의 머리 위로 거대한 수압 덩어리를 떨어트렸다. 설희가 황급히 독 안개로 방어 장막을 형성했으나, 무시무시한 무게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멀찍이 날아가 처박혔다. "리더!" 태풍이 설희를 향해 달려왔다.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떨며 겨우 일어선 설희는 과도한 능력 제어로 인해 손끝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부산댁은 이미 다음 파도를 끌어내고 있었고, 길수마저 수막으로 사방의 퇴로를 차단했다.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설희는 마지막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독 안개의 성질이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기체가 아닌, 무섭도록 농축된 액체 상태의 파동이 되어 설희의 전신을 희미하게 빛내며 감싸기 시작했다. 그 파멸적인 변화를 알아챈 태풍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들어갔다. "안돼요, 리더! 제발 멈춰요!" 설희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태풍을 바라보았다. 이미 모든 결정을 끝마친, 일말의 미련도 없는 초연한 눈빛이었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부산댁이 다급히 수막을 겹겹이 올리려 했으나, 설희는 이미 탄환처럼 전방으로 돌진한 후였다. 무서운 속도로 수막을 찢고 파고든 설희가 부산댁의 전신을 두 팔로 강하게 결박했다. 부산댁이 비명을 지르며 뿌리치려 발버둥 쳤지만, 살을 파고드는 단단한 포박은 풀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육체를 가둔 독기가 한계점을 넘어 눈부시게 팽창했다. 쿠구구궁—! 굉음과 함께 지독한 폭발이 외곽 전선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치며 주변의 헌터들을 낙엽처럼 날려버렸고, 그 직격타를 맞은 부산댁은 뒤쪽 외벽 콘크리트를 깊숙이 부수며 거칠게 박혀버렸다. 길수가 경악하며 달려갔으나, 피투성이가 된 부산댁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몸의 절반이 완전히 마비된 것을 깨닫고 주저앉을 뿐이었다. 초토화된 폭발의 중심부에는 설희가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태풍은 단숨에 달려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차가운 손을 맞잡았다. 가늘고 미약한 숨결이 간신히 이어지고 있었으나, 온몸을 덮었던 독기가 희미하게 흩어지며 그녀의 의식은 서서히 꺼져 가고 있었다. 태풍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설희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그 시각, 고진혁은 지하 내부 복도를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검은 코트 자락의 흔들림조차 규칙적일 만큼 그의 태도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이미 오라클 시스템의 권한을 넘겨 받아 침투조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계단을 디디며 그가 서서히 자신의 능력인 리스크 오버로드를 해방하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는 무거운 파동이 번지며 건물 내부를 순식간에 압도해 나갔다. 그리고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마침내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강한결의 시선과 고진혁의 눈빛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격돌했다. 고진혁에게 강한결은 불길한 변수였다. 일말의 위험을 배제하고 타깃을 돌려 곧바로 윤산을 향해 리스크 오버로드를 직격으로 뿜어냈다. 공기가 달라지는 찰나, 한결이 움직였다. 그것은 철저한 본능이자 무조건적인 반사 행동이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 신체가 먼저 반응한 한결은 망설임 없이 윤산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진혁의 파동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순간, 엄청난 기세로 발열이 폭발했다. 평소 윤산의 냉기를 곁에 두고 안전하게 조절하던 수준과는 차원이 다른, 화산 같은 열기가 내뿜어졌다.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펄펄 끓어오르는 고열의 대가가 통제를 벗어나 피부를 뚫고 뿜어져 나왔다. 한결은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짚었다. 그의 손끝이 닿은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붉게 달아오르며 지독한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윤산의 사고 회로가 완전히 정지해 버렸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참히 허물어지는 한결의 모습에, 윤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충격과 함께 앞으로 질주했다. 한결의 앞에 무릎을 꿇은 윤산은 그의 커다란 몸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동시에 아이즈 쉐어를 한결에게 펼치며 냉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한결이 내뿜는 용암 같은 발열과 윤산의 빙산 같은 냉기가 정면으로 충돌하자, 두 사람의 신체 사이에서 희뿌연 증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사방을 가득 메웠다. "한결 씨...!" 윤산이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한결은 그저 핏기 없는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살을 태워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고열이 윤산의 하얀 팔목을 타고 번지며 당장이라도 살점이 델 것 같았지만, 윤산은 절대 그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모든 감각을 쥐어짜내 냉기를 더 깊숙이 한결의 열기가 폭주하는 심장부를 향해 밀어 넣었다. "제발, 한결 씨.....안 돼요....." 늘 빈틈없던 목소리가 물기 어린 떨림으로 무너져 내렸다. 스스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한결의 얼굴은 위험할 정도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맥박은 너무도 위태로웠다. "강한결 씨!"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점차 비명에 가까운 애원으로 변해갔다. 사방에서 적들의 파동이 어지럽게 오가는 격렬한 전장이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 윤산의 세계는 철저히 정적 속으로 가라앉아 오직 눈앞의 남자만을 비출 뿐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맺히더니, 뺨을 타고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윤산은 한결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자신의 모든 온도를 그에게 완전히 쏟아부었다. 윤산의 간절한 냉기가 심장부에 스며들자, 거칠게 요동치던 한결의 열기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가늘게 떨리던 한결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흐릿하게 흩어지던 시야의 초점이 다시 또렷하게 맞춰졌을 때,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가장 먼저 담긴 것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윤산의 얼굴이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윤산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 차 눈물이 흘러내리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눈망울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왜 울어요, 대리님." 한결이 깨어난 걸 보면서도 윤산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결이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속삭이듯 다시 물었다. "왜 울어요." 윤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단어가 스쳐 지나갔으나 막상 뱉어낼 수 있는 말이 전혀 없었다. 그런 윤산의 얼굴을 깊게 응시하던 한결의 동공에 짙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사실 오늘 전투 끝나고 멋지게 말하려고 했는데." 한결이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어조에 담긴 묘한 느낌에 윤산의 몸이 움찔하며 경직됐다. "대리님 표정 보니까, 지금 말해야겠어요." 어느새 몸 안쪽까지 도달한 냉기 덕분에 발열의 대가는 완벽하게 상쇄되어 있었다. 숨결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한결은 천천히 손을 들어 윤산의 창백한 뺨을 커다란 손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정면으로 보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산이 형." 사방을 휘감던 차가운 냉기도, 자신의 호흡마저도 그 순간 전부 멈춰버린 것만 같았다. 오직 '사랑해요, 산이 형'이라는 한결의 나른하고도 선명한 음성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윤산이 놀람과 떨림이 교차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한결이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보랏빛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거짓 없는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산의 눈가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다시 툭 떨어졌다. 한결은 가볍게 몸을 일으켜 윤산의 하얀 이마 위에 자신의 입술을 느릿하게 부딪쳤다. 차가운 피부 위로 아찔할 만큼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가 부드럽게 각인되었다가 떨어졌다. 상체를 온전히 일으켜 세운 한결이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나머지는 나중에 제대로 해줄게요." 한결이 돌아서며 고진혁을 향해 걸어 나갔다. 윤산은 한동안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마에 닿았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과 뺨을 감싸 쥐었던 커다란 손길의 열감이 여전히 화끈거리며 지워지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고, 하얗던 목덜미와 뺨은 어느새 새빨간 홍조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중에 멍해져요, 대리님." 언제 다가왔는지 원시인이 옆을 스쳐 지나가며 무구한 얼굴로 툭 던지듯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윤산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뺨의 붉은 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고진혁은 바로 타깃을 전환했다. 강한결이라는 변수에 막혔으니 다음 목표는 명확했다. 코어 제어실을 향해 전진하던 원시인과 백설을 향해 리스크 오버로드를 내뿜었다. 그 순간, 픽셀 입자의 벽이 그 사이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이번엔 고진혁이 리스크 오버로드를 윤강에게 조준하여 개방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강제로 끄집어낼 수 있는 대가의 잔상이나 부작용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인 육체였다. 당황한 고진혁이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재차 파동을 밀어 넣었으나, 윤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픽셀을 전개할 뿐이었다. 이 전선에서는 물리적으로 승산이 없음을 직감한 고진혁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 앉았다. 그는 미련 없이 윤강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복도 끝 제어실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거대한 수조 구조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고진혁이 품 안에서 단말기를 꺼내 코어 시스템의 강제 접속 코드를 광속으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이를 포착한 백설이 사납게 달려들며 단말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고진혁이 마지막 승인 코드를 누른 후였다. 삐이이이익—! 동시에 거대한 수조 내부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OS 각성 프로토콜'이 강제로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수조의 유리 표면이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맑던 액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불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원시인은 허공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온몸이 굳어버렸고, 백설 역시 코를 찡긋거리며 기분 나쁜 포식자의 체취를 감지하곤 반사적으로 뒤로 서너 걸음 물러섰다. 고진혁이 단말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낮게 명령했다. "전부 처리해." 그러나 그의 명령이 무색하게도, 거칠게 출렁이던 수조 내부의 움직임이 일순간 완전히 정지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정지가 아니라 공간의 차원이 뒤바뀌는 듯한 기묘한 징후였다. 천천히, 그리고 분명하게. 수조 표면의 파동이 가라앉으며 기괴할 정도의 고요함이 제어실을 덮쳤다. 그리고 마침내, 수조 깊은 곳에서 두 개의 눈동자가 열렸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서늘한 회색 눈동자. 얼음처럼 새하얀 백발이 출렁이는 물 사이로 길게 흘러내렸고, 가느다란 체구 위에는 잔혹한 흉터들이 전신을 빼곡히 뒤덮고 있었다. 장장 22년이라는 영겁의 시간 동안 어두운 수조 속에 격리되어 존재해 온 오라클의 정점, 'Protocol: OS'가 서서히 고진혁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쿠우우웅—! 그와 동시에 가공할 만한 압력이 공간 전체를 강타했다. 대기를 찢는 소리도, 그 어떤 마찰 파동도 없었다. 그저 존재만으로 주변 공간의 중력 법칙 자체를 완전히 뒤틀어 무겁게 짓눌러 버린 것이다. 위험을 감지하기도 전에 고진혁은 자신의 두 발이 지면에 자석처럼 단단히 달라붙는 기괴한 감각을 느꼈다. 뚝, 뚜드득. 뼈가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그의 무릎이 허망하게 꺾여 들어갔다. 고진혁은 저항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바닥에 문자 그대로 납작하게 압착되어 처박혔다. 콰과과극! 무시무시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가 쓰러진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 사방으로 거미줄 같은 균열이 길게 찢어발겨졌다. 수조 속 OS의 서늘한 안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깨운 공간이 극도로 '시끄러웠다'는 것. 오직 그 사소하고 간결한 이유가 전부였다. 경악스러운 광경에 숨을 죽이던 원시인이 본능적으로 떨리는 손을 치켜들며 삭제의 공백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기척을 감지한 OS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회색 동공이 허공을 가로질러 정확히 원시인의 눈동자와 일직선으로 맞물렸다. 그리고, 수조 내부에서 전파된 OS의 목소리가 모두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울려 퍼졌다. "돌아와." # [1부 완결] 26화. OS # "돌아와." 단조롭고도 서늘한 그 한마디가 가라앉은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의 고저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사실만을 건조하게 읽어내는 기계 같았다. 콰아아앙―! 두꺼운 특수 강화 유리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제어실 바닥을 요란하게 때렸다. 자욱한 유리 먼지 사이로 창백하고 마른 형체가 서서히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OS의 등과 팔뚝, 목덜미 곳곳에는 굵고 가느다란 회로 다발들이 아직도 연결되어 있었다. 코어에서 뻗어 나온 금속성 케이블들이 그의 피부를 꿰뚫고 신경계 깊숙이 박혀 있었다. 각성 프로토콜이 강제로 가동된 탓에 코어와의 연결이 완전히 절단되지 않은 상태. 절반만 깨어난 채 시스템의 끈에 묶여 있는 형태였다.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마다 OS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그 회색의 시선이 오직 한 사람만을 향했다. 원시인. "넌 내 안에 존재해야 해." 살의도, 분노도, 그 어떤 욕망도 담기지 않은 눈빛이 오히려 공포를 자아냈다. 그저 서랍 밖으로 튀어나온 물건을 당연하게 제자리에 되돌려놓으려는 듯한 무감각함이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주변 공간이 기괴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대기가 통째로 뒤틀리며 제어실 내부의 밀도가 급격히 한 방향으로 쏠렸다. 원시인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몸이 미세하게 앞으로 끌려 나갔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를 통째로 삼키는 인력이었다. OS가 공간 자체를 당기고 있었다. 시인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백색의 공백을 열어 저 괴물 같은 인력을 지워내야 했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를 사납게 비집고 들어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백설이었다. 그녀의 작은 손바닥 위로 블랙홀이 피어오르며 OS의 인력과 정면으로 격돌했다. 거의 동시에 반대편에서 윤강이 지면을 박차고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목표는 OS가 아니었다. OS와 원시인 사이의 공간, 그 인력이 흐르는 경로 자체였다. 푸른 픽셀 입자들이 쏟아지며 두 사람 사이의 허공을 빽빽하게 채웠다. 그러나 픽셀이 OS에게 닿는 순간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윤강의 픽셀 입자들이 OS의 인력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윤강의 눈매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픽셀을 두 배로 끌어올렸지만 결과는 같았다. 사라지는 속도만 빨라졌을 뿐이었다. 백설이 이를 드득 갈며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손끝의 블랙홀이 크기를 키우며 능력을 무섭게 끌어올렸다. 핏빛 진홍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럼에도 OS의 회색 시선은 오직 그 너머의 원시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제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아무런 연산 가치도 없다는 듯이. "야." 백설이 불렀지만 반응은 없었다. "야, 너 지금 나 못 봤냐고." 그제야 OS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마치 회전축이 녹슨 것처럼, 기계적이고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회색 눈동자가 백설의 전신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훑어 내렸다. 찰나에 불과한 시선이었다. "폐기물." 간결하고 차가운, 완벽한 배제 판정이었다. 스윽. OS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백설이 디디고 있던 공간 전체가 위에서부터 무자비하게 내리눌렸다. 공간 압착. 대기가 문자 그대로 접혀 들어가며 밀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그 여파로 백설이 유지하던 블랙홀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주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던 힘이 반대로 꺾여, 백설 자신의 육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으윽.....!" 백설이 이를 드러내며 버텼지만, 애초에 출력의 궤가 달랐다. 입안에 문 막대사탕이 박살 나 튀어나갈 것만 같은 중압감에 작은 발이 바닥을 쓸며 뒤로 밀려났다. "백설!" 원시인이 소리쳤다. 그 순간, 윤강이 다시 픽셀을 전개했다. 백설을 덮치는 압착 공간을 향해 푸른 픽셀 장벽을 층층이 쌓아올렸다. 원시인이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삭제의 공백을 강제로 개방했다. 촤아악―! 새하얀 공백의 궤적이 두 사람 사이의 허공을 비스듬히 가르며 공간을 짓누르던 OS의 압력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족쇄가 풀리듯 압박이 사라지자 백설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착지했다. 튀어나오려던 사탕을 혀로 밀어 넣으며 씩씩 숨을 고르는 백설의 눈동자가 야수처럼 흉포하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OS는 이미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고, 오직 원시인만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 난전 속에서 한결이 보랏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싱크를 개방했다. '······!' 한결의 미간이 굳어졌다. 능력을 각성한 이후 단 한 번도 미끄러진 적 없던 싱크가 허공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대상이 동기화를 거부하는 게 아니었다. 아예 싱크를 걸 인간으로서의 접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OS의 신경망은 인간의 뇌파 대역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오라클 코어에서 뻗어 나온 무기질의 연산 회로가 그의 신경계 전체를 완벽히 대체하고 있었으니까. 상황이 나빴다. OS를 직접적으로 건드릴 수 있는 물리적, 정서적 수단이 전무했다. 원시인이 중앙의 코어를 향해 아주 미세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OS의 반응 속도는 무서우리만치 빨라졌다. 시인이 반 걸음만 움직여도 회색 동공이 칼같이 따라붙었고, 공간 압력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졌다. 도저히 틈이 나지 않는 철벽의 방어였다. 코어로 가려면 저 괴물을 강제로 정지시켜야 하는데, 묶어둘 방법이 없었다. 윤산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아카이브 아이가 켜지며 OS 등 뒤로 뻗어 있는 수천 개의 회로 다발이 시야 안으로 점멸했다. 주 회로들은 신호가 너무 조밀해 틈이 없었다. 윤산의 시선이 더 깊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보조 회로들이 코어 쪽으로 수렴하는 지점, 주파수가 겹치며 밀도가 살짝 낮아지는 구간이 잡혔다. 완벽하진 않지만 억지로 비집고 들어갈 수는 있는 유일한 틈새였다. "한결 씨." 윤산이 낮게 불렀다. "OS 뒤 회로 다발을 노리세요." 한결이 시선은 OS에게 고정한 채 귀만 기울였다. "들어갈 수 있겠어요?" "충분해요." 한결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너무나 매력적인 돌파구였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싱크를 회로 안으로 밀어 넣으려면 OS의 연산이 단 한 호흡이라도 흐트러져야 했다. 윤산이 손가락 끝에 집중했다. OS에게도 눈이 있었다. 회색 동공이 처리하는 시각 신호가 존재했다. 그 안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밀어 넣으면 일시적인 연산 오류가 발생 할 것이다. 서늘한 냉기가 치솟았다. 손끝을 넘어 손목까지, 서리가 피부 안쪽을 타고 빠르게 올라왔다. 윤산은 이를 악물고 OS의 시각 신호 안으로 포스드 프레임을 밀어 넣었다. "지금입니다." 한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보랏빛 인광이 동공 깊숙한 곳에서 폭발하듯 타오르며 싱크가 전개됐다. 코어에서 OS로 흐르는 회로 주파수, 그 미세한 틈새를 향해 한결이 자신의 싱크 파동을 무자비하게 쑤셔 박았다. 처음부터 인간의 영역이 아닌 자리에 끼워 넣는 것처럼 거친 저항과 반동이 뇌를 때렸다. 한결의 온몸에 붉은 열기가 한꺼번에 치솟았다. 콰득! OS의 고개가 기계적인 파찰음을 내며 처음으로 원시인이 아닌 한결을 향해 홱 돌아갔다. 회로 깊숙이 이물질이 침투했다는 신호를 감지한 것이다. 원시인에게 뻗치던 공간 인력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OS가 즉각 한결을 향해 압력을 방출하려 했지만, 윤산이 버티며 포스드 프레임을 유지해 시각 교란을 이어갔다. 두 곳의 신호를 동시에 처리하던 OS의 연산 속도가 다시 한 박자 지연됐다. 그러나 한결의 열기 역시 한계치를 넘어서며 전신이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시인 형, 지금......!" 그 신호와 동시에 원시인이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공간을 지배하던 인력이 풀린 그 짧은 틈새를 시인이 무서운 속도로 파고들었다. OS가 뒤늦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회로 안쪽에 박힌 한결의 파동이 족쇄처럼 OS의 연산망을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원시인이 제어실 정중앙의 코어 구조물 앞에 도달했을 때, 윤강이 이미 그 옆에 서 있었다. 무수히 빛나는 푸른 픽셀 장벽이 코어 주변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차단하며 두 사람을 굳건히 방어했다. 원시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손끝이 눈에 띄게 잘게 떨려왔다. 알고 있었다. 이 삭제 능력을 펼칠 때마다 자신의 소중한 기억이 조각나 사라진다는 것을.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불안으로 흔들리는 시인의 눈동자를, 윤강이 다정한 시선으로 마주해왔다. 윤강은 시인의 떨리는 손 위로 자신의 커다란 손을 가만히 겹쳐 잡았다.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가 고요하고 단단했다. 시인의 손끝을 지배하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삭제." 원시인이 마침내 능력을 완전히 개방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순백의 공백이 거대한 오라클의 코어를 통째로 집어삼키며, 마치 이 지구상에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다는 듯 완벽한 인과의 삭제를 일으켰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압력이 부딪히고, 픽셀이 터지고, 콘크리트가 갈라지던 제어실 안의 모든 소음들이 순식간에 진공상태처럼 증발해버렸다. 그 무음의 공백 속에서, OS가 입을 벌렸다. 비명도, 언어도 아니었다. OS의 전신이 거칠게 경련했다. 메인 코어와의 연결이 영구히 끊어지면서, 22년간 그의 뇌와 척수를 대신해 흘러 다니던 연산의 역류가 한꺼번에 방향을 잃고 빈 껍데기 위를 헤집어놓은 결과였다. 감정도, 의지도 없이 그저 명령에만 반응하던 회색 눈동자에서 마침내 불빛이 꺼지듯 초점이 지워졌다. 마지막까지 원시인의 실루엣을 눈에 담은 채, OS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스르륵 허물어졌다. 그리고. 콰과과과광―!!! 코어가 소멸한 반동이 지하 전역을 강타하며 엄청난 대폭발을 일으켰다. 억눌려 있던 거대한 에너지가 사방으로 분출되며 제어실 천장이 무너지고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엎드려!" 윤강이 소리치며 푸른 픽셀 장벽을 넓게 펼쳐 무섭게 쏟아지는 잔해들을 막아섰다. 거대한 바위들이 장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사방으로 먼지가 휘날리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들은 폭풍 같은 충격파에 밀려 바닥을 굴렀다. 자욱한 흙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사방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한결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하나 타들어 간 것처럼 무겁고 뜨거웠다. 그런데 평소 느끼던 기분 나쁜 발열의 후유증이 아니었다. 무언가 완전히 달라진 감각에 한결이 문득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제어할 수 없이 폭주하던 고열이 아니었다. 한결의 의지에 따라 형태를 잡으면서 손끝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순수한 보랏빛 불꽃이었다. 한결이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자, 불꽃 역시 그의 호흡에 맞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흩어졌다 다시 모여들었다. 바로 곁에서, 윤산 역시 멍하니 자신의 손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주변에 서리가 내리거나 온도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윤산이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자, 허공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정교하고 아름다운 얼음 결정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산이 손끝을 구부리자 얼음 꽃들이 투명하게 부서졌다가 다시금 그의 생각대로 날카로운 형태를 갖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 무렵, 지상에서는 이미 천지를 뒤흔드는 대혼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의 테헤란로에서, 부산의 화려한 해운대 해안도로에서, 한적한 강원도의 국도 위에서.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경악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사람이 튀어나오고, 눈에서 빛이 솟구치며, 몸이 지면에서 떠올랐다. 평생 능력자가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씨앗’들이, 코어가 파괴됨과 동시에 일제히 폭발하듯 개화한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비명과 경탄이 터져 나왔고, 자동차가 공중에 떠오르거나 대지가 요동치는 대혼란이 몰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상의 모든 미디어가 긴급 속보 체제로 전환되었다. 스튜디오의 앵커는 완전히 패닉에 빠진 채 말을 잇지 못했고, 그 등 뒤의 대형 스크린에는 전국에서 실시간으로 제보되는 충격적인 영상들이 쉴 새 없이 스쳐 지나갔다. 한강 한가운데를 마치 지면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 몸이 액체화되어 흘러내리는 사람, 제 손 안에서 기어 나오는 벌레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이들의 모습이 가감 없이 전파를 탔다. 화면 하단엔 붉은 자막이 다급하게 흘렀다. [[속보] 전국 동시다발적 미확인 초자연 현상 발생......원인 불명] # 2부 1화. 변화 # 오라클 타워에서의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땐 이미 새벽이 한참 지난 후였다. 아크 공용 공간의 소파와 바닥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기운 없이 늘어져 있었다. 누군가 틀어놓은 대형 모니터에서는 연신 긴박한 뉴스가 쏟아졌지만, 그 누구도 리모컨을 잡지 않았다. 채널을 돌릴 생각조차 못 할 만큼 화면에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탓이었다. 화면 속 앵커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더듬었다. 대본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 눈앞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패닉에 빠진 얼굴이었다. 그 뒤로 실시간 제보 영상들이 날것 그대로 송출되고 있었다. 한강 한가운데를 맨발로 유유히 걸어가는 남자부터, 아파트 외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괴한 액체 형태의 인간, 그리고 놀이터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르는 아이까지. 사방에서 찍힌 영상들이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거칠게 흔들리는 화면 사이로 사람들의 비명이 섞였다가 뚝 끊기기를 반복했다. 화면 하단에는 시뻘건 속보 자막이 다급하게 가로질렀다. [[속보] 전국 동시다발적 초자연 현상 발생 ― 원인 불명] 무거워진 공기 속에서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루나는 소파 위에서 무릎을 가슴팍까지 끌어안은 채 멍하니 모니터를 응시했고, 민혁은 머리를 소파 등받이에 툭 기댄 채 천장과 화면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윤강은 팔짱을 낀 채 그 뒤편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결은 윤산이 앉은 자리 바로 옆 바닥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아 시선만 화면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깨뜨린 건 원시인의 뜬금없는 한마디였다. "저희....회사 잘렸겠죠?" 방 안이 순간 얼어 붙었다. 루나가 굳은 채 원시인을 돌아봤고, 민혁이 천장을 보던 고개를 내렸다. 정작 질문을 받은 윤산은 화면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고 담담하게 답했다. "무단결근 누적으로 이미 권고사직 처리됐을 겁니다." 참지 못한 루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민혁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전국이 초토화되는 뉴스가 실시간으로 흐르는 와중에 두 사람이 퇴직 처리 여부를 진지하게 논하고 있었다. 윤강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원시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커다란 손을 뻗어 원시인의 뒤통수를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결이 슬며시 윤산 쪽을 돌아봤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무표정이었지만, 새하얀 피부 위로 드러난 귀 끝이 이미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루나의 웃음소리가 신경 쓰이는 건지, 본인 말이 저렇게 웃길 거라고 예상 못 한 건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한결은 윤산의 표정을 하나하나 눈에 전부 담아가며 나직하게 웃었다. 새벽이 다 지나갈 무렵까지 뉴스는 멈추지 않았다.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 방으로 흩어지자, 공용 공간에는 모니터 불빛만 남은 채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윤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복도를 걸어 제 방으로 향하는 내내 머릿속이 좀체 정리되지 않았다. 전국에서 씨앗이 터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크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는데. 자꾸 다른 기억이 끼어들어 사고를 방해했다. '나머지는 나중에 제대로 해줄게요.' 귓가를 간지럽히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뺨을 감싸 쥐던 손의 온기가 살결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이마에 내려앉았던 촉감까지도. 그가 말한 '나머지'가 의미하는 바를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고백을 받고 이마에 입술이 닿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버텨냈는데, 그 '다음'이 대체 어디까지일지 상상하는 순간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날뛰었다. 이게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그를 향한 설렘인지 도무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분명한 건 그 혼란스러운 감각이 전혀 싫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생각에 잠겨 제 방 문을 벌컥 열었던 윤산은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한결이 방 안에 있었다. 문 앞에서 굳어버린 윤산을 보며 한결이 벽에 기댄 채 팔짱을 풀었다. 놀란 기색도, 들어와있어도 되냐고 묻는 기색도 없었다. 그냥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들어오세요." 본인 방이 아닌 사람이 할 말이 아니었다. 당연한 듯 뻔뻔하게 말하는 한결을 보며 윤산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자 좁은 공간이 순식간에 한결의 온기로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죠." "그게 말이...." "산이 형."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윤산의 말을 툭 가로막았다. 한결이 벽에서 등을 떼고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씩 좁혀오는 거리에 윤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등이 문에 닿았다. 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한결은 숨결이 고스란히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와 멈춰 섰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윤산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무표정이었다. 윤산은 항상 무표정이었다. 그런데도 한결은 늘 알 수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목선, 잘게 떨리는 긴 속눈썹, 시선을 한결의 어깨 언저리에 억지로 고정해두려는 것.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 '내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한결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그가 커다란 손을 뻗어 윤산의 턱끝을 부드럽게 쥐어 올렸다. 윤산의 고개가 들리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얽혀 들었다. 피할 틈도 없이, 한결이 고개를 숙여 윤산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볍게 내리눌렀다. 짧게 맞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 윤산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미처 감지 못한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처리가 안 되는 얼굴이었다. 그 어리숙하고 무구한 반응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결이 턱을 쥐었던 손을 옮겨 윤산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형 옆에 있고 싶어요." 평소의 여유로운 가면을 한 꺼풀 벗겨낸,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계속." 윤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뺨에 닿은 한결의 손을 밀어내지 않은 채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뿌리치지 않는다는 것, 그게 윤산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임을 한결은 알고 있었다. 한결이 다시 한번 입술을 맞댔다. 이번엔 조금 더 오래. 맞닿은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얽혔다. 이윽고 아쉽다는 듯 천천히 입술을 뗀 한결이, 윤산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방 안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윤산의 달아오른 목선이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결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도망가지 않고 있다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한결이 피식 웃으며 윤산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가 떨어졌다. "천천히 해요." 한결이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갔다. 딸깍,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윤산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한결이 어루만지던 뺨 위에 여전히 온기가 맴돌았다. 떨리는 손을 들어 뺨을 쓸어내려 보았지만, 가슴속에서 터질 듯이 날뛰는 심장 소리는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흩어지고 불이 꺼진 한참 뒤에도 원시인은 소파를 지키고 있었다. 화면 속 세상은 혼란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파 위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곳처럼 느껴졌다. 긴장을 풀어도 되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안도감이 밀려오자 눈꺼풀이 걷잡을 수 없이 무거워졌다. 쿠션을 꼭 끌어안은 채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원시인은 깜박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윤강이 공용 공간을 지나치게 된 건 순전히 갈증 때문이었다. 어두운 거실 한복판, 소파 위에 조그맣게 웅크려 있는 형체를 발견하고 발걸음이 뚝 멈췄다. 원시인이었다. 쿠션을 꼭 끌어안은 채 등을 둥글게 말고 자는 모습. 늘 주변 눈치를 살피거나 미안해하던 평소와 달리, 무방비하게 곤히 잠든 얼굴이 퍽 평온해 보였다. 윤강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원시인의 얼굴을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소리 내어 불렀다. "시인아."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원시인." 윤강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으나 마땅한 덮개나 담요는 보이지 않았다. "왜 소파에서 자." 윤강이 원시인의 앞으로 몸을 숙였다. 커다란 두 팔을 뻗어 한 손은 그의 등 뒤를, 다른 한 손은 무릎 아래를 받쳐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생각보다 터무니없이 가벼운 무게에 속으로 조금 놀라는 순간, 반동으로 원시인의 고개가 윤강의 단단한 어깨 쪽으로 툭 기울어졌다. 잠결에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익숙한 체온을 감지하고는 다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윤강은 혹여 그가 깰까 봐 숨을 죽인 채 잠시 자리에 멈춰 서서 추이를 살폈다. 다시금 쌕쌕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번지자, 그제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도가 조용했다. 원시인의 방 앞에 다다르자, 윤강은 한 손으로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내리고 발로 문을 슬쩍 밀어 열었다. 침대 맡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그를 내려놓으려던 찰나, 원시인이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아직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꿈과 현실의 경계에 걸쳐진 흐릿한 눈동자였다. ".........형?" "어." ".....왜 여기....." "소파에서 자고 있었어." 원시인은 잠 기운에 취해 윤강의 짧은 답변을 뇌로 전달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다시 스르륵 눈을 감으려는 찰나, 침대 맡에 선 윤강의 소매 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손끝에 들어간 힘이 제법 완강했다. 윤강이 제 소매를 붙잡은 하얗고 부드러운 손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잠결에 저지른 무의식적인 행동이라 본인은 인지조차 못 하는 게 분명했다. 원시인의 눈은 이미 기분 좋게 감겨 있었고, 방 안에는 다시금 고른 호흡 소리만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윤강은 잡힌 옷자락을 살짝 빼내려다가 멈췄다. 한참을 그 상태로 침대 머리맡에 우두커니 서 있던 윤강은, 이내 자포자기한 듯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침대 가장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등을 벽에 기대고 팔짱을 푼 채 멍하니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았지만, 시선은 자꾸만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원시인에게로 향했다. 윤강은 원시인의 잠든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어둠 속에서 원시인의 숨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루나가 아크 복도를 지나다 백설을 보고 멈칫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백설의 뒷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늘 입고 다니던 고스로리 원피스 소매 끝에서 손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원래라면 손등까지 덮고도 남아야 할 길이였다. 밑단도 묘하게 올라온 것 같았고, 전체적인 키와 비율이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백설아." 루나가 부르자, 백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입안에 문 막대사탕을 오도독 깨물어 삼키는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이 심드렁했다. "너 좀 커진 거 아니야?" "몰라." "아니 진짜로, 소매 보면......" "몰라." 두 번째 대답도 완벽하게 무관심했다. 숨기려는 게 아니라, 그게 어떻다는 건지 그 자체를 모르는 눈이었다. 루나가 다가가 백설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손목의 유격을 확인했다. 분명히 자란 게 맞았다. 루나의 머릿속에서 파편화되어 있던 정보들이 빠르게 맞물렸다. 오라클 코어가 파괴됐다. 씨앗들이 일제히 개화했다. 물리적 시간축이 통째로 묶여 있던 백설의 성장이 드디어 태엽을 감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설이 맞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루나는 일단 섣부른 말을 아꼈다. "잠깐 내 방 와봐." "왜." "옷 줄게. 그거 작아 보여." 백설은 귀찮다는 듯 루나를 빤히 바라보며 거절할 핑계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마땅한 이유가 없었는지 사탕을 오도독 씹으며 터덜터덜 방향을 틀었다. 루나가 그 뒤를 따라가며 뒷모습을 다시 한번 훑었다. 분명히 컸다. 그 시각, 공용 공간의 대형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속보] AD테크, 능력자 피해 전문 보험 상품 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