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올해의 게임, Eve's Fruits. 우리말로는 이브의 열매. '할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임'이라는, 심플한 기획으로 출발한 그 게임은, AI시대의 물결을 가장 먼저 올라탄 게임이다. 그리고 그 '할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임'은 오늘, 기어이 동접 100만을 찍어버렸다고 한다. 음. 대단하네- 하고 머리를 벅벅 긁는 내게, 소라 언니는 흥분을 살짝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은아야. 내 말 제대로 들은 거야?" "아, 응… 왜?" "그럼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있는건데?" …내 표정이 엉망이었나 보다. 동접 100만명. 참으로 고무적인 수치이긴 하다. 홍보부에서는 이 딱 떨어지는 숫자로, 멋진 슬로건을 만들어 신문에 낼 테지. 그리고 나는 저 기뻐하는 CEO의 얼굴에 먹칠을 해야했다. 난 이를 어떻게 전달해야하나 고민하다, 고전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음. 안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부터." "언니도 알다시피, 우리 게임의 사고모델은 확정모델과 변동모델로 나뉘잖아? 이 중 변동모델은 동접자 수에 민감해." "그래서? "서버를 확충해야 돼." "...몇 대나?" "10대 쯤?" 기쁜 비명같은 것일 수도 있다. 게임이 유명해져서 서버를 늘려야한다는 거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타이밍이다. 서버는 곧 돈이니까. 동접수가 그간의 3개월 만에 폭발했다곤 하지만, 게임이 아직 유료화 전이라 자금이 빠듯하다. 이에 투자를 땡겨 회사 자금으로 쓰는 것은, 언니의 운영철학에 위배된다. 언니는 가급적 투자를 적게 받아 그 이득을 개발에 힘써준 직원들에게 돌리고 싶어하니까. 소라 언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건 안좋은 소식 아냐? 당장 돈 든다는 소리잖아." "그래도 그게 두번째 소식보단 나을걸?" "...뭔지 묻기도 겁나네. 누가 연봉 올려달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작년부터 연봉이 동결되어 몇몇 직원들의 불만이 있긴하지만, 난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에 봉착해있다. "버그가 났어." “...그런데?” 원래 개발자에게 있어 버그를 잡는 일은 일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CTO의 입에서 나와 CEO에게 보고되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는 CTO이고, 이는 회사내에서 최고 기술을 관리하는 직함이다. 소라 언니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심각한 거야?" "응." 소라 언니로썬 지금, 서버 10대를 구매해야한다는 말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것이다. 그녀는 머리로 가 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머리 좀 그만 긁고... 어떤 버근데?" "이야기가 안바뀌어." "뭐?" 언니는 잘못들은 것 같다는 식의 표정을 지었다. 이럴 때마다 죄지은 기분이 되는 것은 개발자의 숙명이다. 난 그런 그녀의 얼굴에 대고, 딱 잘라 말했다. "이번 업데이트 버전에서, 이야기가 안바뀌어..." "...그럼 버전을 롤백하면 되잖아." "참고로 이번 업데이트 버전이, 유료화 모델을 처음 장착한 버전이야." 요약하면- '할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임'의 유료화가 늦춰진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라 언니는 경악했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담배를 꺼내 물었고, 그런 자신에 대해 화들짝 놀랐다. “아, 여기 실내지… 미치겠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한다. 동시에 나도 좀 이해받길 바란다. 나는 안경을 벗은 다음, 눈 사이를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내가 머리를 못감은 건 좀 이해해줘. 주말내내 코드를 보고있느라 그런 거니까." <1> 스크립트 창에 씌어진 코드들은, 숱한 개발자들의 고뇌가 담긴 철학서다. 그 최적화의 흔적은, 논리를 펜으로 삼은 시이며- 곳곳에 남겨진 주석들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 대한 사랑… “...” 젠장. 다 뻥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미화해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무리였다. 나는 여전히 버그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3일째 못감은 머리로 아름다운 상상을 하기위해선, 획기적인 연봉 인상이라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차기 업데이트 버전을 몇번이고 새롭게 빌드해보았지만, 여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질 않았다. “저기, 팀장님???” “와씨, 깜짝이야!” 팀장실로 들어온 정사원이었다. 양손에 커피를 든 채였다. 정사원은 그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했다. “저, 밖에서 계속 노크했는데… 팀장님이 3시에 오라고 하셔서요.” “아, 벌써 시간이 그리됐나…? 앉아. 앉아.” 정사원이 화들짝 놀란 나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내 컴퓨터에는, 주말부터 이어진 실패한 업데이트 파일이 백만개 쯤 쌓여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디버깅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시점이었다. 난 안경을 벗고선 잠시 눈을 문지른 다음 조금 더듬으며 말했다. “음. 그래. 정사원… 요즘 회사생활은 할만해?” 시간을 벌기 위한 질문이었다. 내가 정사원을 왜 불렀더라? 이에 정사원은, 들고 온 커피 중 하나를 내게 내밀며 말했다. “다름 아니라, 그것 때문에 상담신청을 한 거였어요… 업데이트 때문에 바쁘실텐데, 상담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하! 다행이다. 내가 부른게 아니라, 정사원의 상담요청이었나보군. 이로써 무책임한 팀장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담 사유로 짐작되는 것도 마침 하나 있었다. 나는 품위있게 끄덕이며 말했다. “팀원들 관리하는 것도 내 일인데, 뭐… 그래. 무슨 일로?” “퇴사를 할까 해서요.” “...갑자기?” 나는 손에 들린 커피를 보며 잠시 멍해졌다. 이거, 연봉인상을 위한 뇌물 같은 게 아니었나보네. 그런데, 퇴사라니… 정사원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궂은 일을 묵묵하게 해주는 개발자였다. 자잘한 유아이(UI) 작업에서 부터, 리소스 관리, 그리고 버전 테스트까지. 신입답게, 그가 남다른 코딩 스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하는 작업들이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하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게 있다면, 일을 대하는 태도. 적극적으로 일을 도와주는 사람은 분명히 티가 난다. 어느날, 선임 개발자들이 야근의 피로에 지쳐 까무륵 잠들었을 때, 깜빡 잊고 있었던 자잘한 작업을 조용히 해버리고 가는 사람. 정사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바쁜 시기에 그런 동료를 잃는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이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무슨 일 있어?” “갑자기 결정한 건 아니에요… 제가 남들 개발하는 속도도 잘 못 따라가고, 그래서 강부장님한테 맨날 혼나고… 팀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서요.” 아직 다 죽지않은 40대의 기억력이, 그가 1년전 보낸 입사원서를 떠올렸다. 정희찬. 27살. 천안의 한 컴퓨터 공학과 출신. 나는 1년전 그 때, 정사원이 내민 포트폴리오와 자기소개가 맘에 들었었다. 이에 정사원의 학벌을 지적하는 강부장에게,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저도 전공자가 아닌데요.’ 그러자 강부장은, 어찌보면 통속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에이, 그건 경우가 다르죠. 팀장님은 애초에 S대 출신이잖습니까.’ ‘저희 채용공고에도 포트폴리오를 기준으로 뽑겠다고 강조했잖아요. 이력서 블라인드 쳐놓고 뽑은게 희찬씨의 포폴이었고.’ ‘그거, 우선 많은 이력서 확보하려고 쓴 문구 아니었습니까?’ ‘아닌데요.’ ‘...같은 전공에, 학교도 더 빵빵한 지원자들도 꽤 많잖습니까.’ ‘그 분들보다, 희찬씨 포폴이 더 나았잖아요.’ 사실, 학벌과 전공을 따져 사람을 뽑는 것도 그저 고지식한 방법론은 아니다. 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경쟁률이 높은 학교나 학과에 들어본 이들은, 적어도 중요한 경험 한가지는 해 본 이들이다. 다름 아닌,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겨본 경험. 그리고 힘든 시기를 인내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본 경험. 그 경험은, 실제로 한 개인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분명한 표지판이 되어주기도 한다. 스스로에게 당근과 채찍을 줄수 있는 사람은, 때로는 당근을 포기하고 채찍을 들어야하는 이유도 안다. 그 차이가 쌓여, 일류와 이류를 가른다. 그리고 나는, 희찬씨의 포트폴리오를 봤을 때- 그가 비록 학벌이 살짝 밀리고 전공자가 아닐 지언정, 충분히 일류가될 좋은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했었다. “으음…” 나는 성실한 상담가가 되기 위해, 업데이트에 대한 걱정을 잠시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그리고 정사원의 말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취업하기 전에 공부를 좀 더 했어야 했나봐요.” 나는 정사원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코딩 스킬이 부족해 그런 것 같다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그는, 퇴사 후 학원에 다니려한다는 계획으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거기다 강부장에 이야기도 슬쩍 끼어들었다. 티나게 표현하진 않았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강부장이 묘하게 무시한다는 식의 어감이 섞여 있었다.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희찬씨. 나 원래, 비전공자에다가 심각하게 코드 난독증 있었던 거 알아?” “팀장님이요?” 정사원은 주변을 살짝 돌아보았다. 팀장실 벽면에는 몇몇 코딩 대회 상장과, AI 관련 특허 문서가 채워져있다. 물론 그 각 종이 위에는 ‘서은아’라는 내 이름이 쓰여져 있고. ‘너는 자주 맹해 있으니까, 이런 거라도 좀 발라놔야 사람들이 기술자인 줄 알아.’ -라는 게, 소라 언니가 저것들을 붙여놓은 이유. 이에 정사원은 안믿긴다는 듯이 말했다. “에이…” “정말이야… 나 그래서 코드도 긴 건 보기 피로해하고, 내 코드도 자주 헷갈려하는 편이었어.” “그런데, 팀장님 코드, 다들 디게 깔끔하다고 하던데...” 난 굳이 겸손을 떨지 않았다. “그야, 표준 코딩 규칙(Standard Coding Convention) 대로 짜니까.” “아… 코딩 컨벤션이요? 그거 엄청 귀찮던데…” “귀찮긴 하지.” 내가 지금의 개발 수준에 이른 것에 대해, 그 비결 역시 단순한 거였다. 머리가 나쁘니 남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야 했고, 난독증이 있으니 남들보다 더 많이 정리해야했다. 그 결과로 나오는 간결한 코드의 장점은, 단순히 성능 최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코드가 정리되고 간결하게 되면 개발자의 사고도 덩달아 확장된다. 이는 개발자로써 더 좋은 구조와 방법론을 떠올릴 발판이 된다. 그래서 나는 몇번이고 내 코드를 교정하고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한 것들을 또 꼬박꼬박 라이브러리로 누적해왔다. 대략 10년간.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나는 개발자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전공자가 아님에도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음…” 계속 이야기하면 내 자랑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다. MZ들한테 라때 많이 말지 말라던데… 나는 장황해질 것 같은 말을 그냥 끊어버렸다. “희찬씨가 학원가는 건 찬성 안해... 그분들을 비하하고 싶진 않지만, 조금 냉정하게 말하면, 그분들은 실무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정말요?” “생각해봐. 일류의 개발자들이 어느 학원의 선생님으로 있을까, 아니면 개발의 최전선에서 무언가를 코딩하고 있을까?” “...” “희찬씨를 제대로 키워줄 스승이, 꼭 선생님이라는 자격이나 이름표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지마. 어쩌면 희찬씨 옆에있는 동료와 선배들이야 말로, 진짜 스승일 확률이 높으니까.” 정사원은 자신의 커피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 모습이 어딘지 짠하면서도 조금 귀여웠다. 그리고 나는 내 역활을 여기까지로 선을 그었다. 나는 정사원 인생의 대리자가 아니기에, 이 다음부턴 그 자신이 결정해야한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회사를 관두고 학원으로 가겠다는 희찬씨의 말이, 일종의 도피처럼 느껴져. 이곳이야 말로, 개발의 최전선이니까.” “...” “오지랖은 여기까지. 생각해보고, 나중에 다시 말해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사원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넙쭉 인사를 하곤 팀장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정사원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0과 1로 이루어진 코드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나는 멀티 태스킹이 안되는 인간이라, 이렇게 의식적으로 한가지 사고를 꺼버리곤 한다. 어렸을 적엔 남들도 다 그런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20살이 되고서야 알았다. 머릿속엔 다시 코드들로 가득했다. 의심나는 부분을 수정하고, 다시 업데이트했다. 이야기는 바뀌지 않았다. 의심나는 부분을 또다시 수정하고, 또다시 업데이트했다. 이번에도 이야기는 바뀌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오래 집중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개발팀장님. 4시입니다. 홍보팀 회의요.” “어? 벌써 4시야? …그 좀 미루면 안될까?” “미룬다고 말씀드려요?” “응.” 홍보팀의 천사라는 경아씨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내게 A4용지 한장을 내밀었다. “저, 죄송한데, 그렇게 말하면 이거보여주라고 저희 팀장님이…” “홍보팀장이?” 난 경아씨가 내민 문서를 바라보았다. 이 악랄한 홍보팀장은 오늘 하루 ‘Eve’s Fruits’에 올라온 한 게시글과 그 댓글을 출력한 거였다. ================================= [제목: 다들 평화루트 안가지지 않아?] (추천 베스트) 나 분명 외교루트 탔거든. 개처럼 빌면서 영주 설득했고(이게 제일 좆같았음) 그래서 외교단 출발했고. 공물 수준도 형들 말대로 조율했단 말임. 여신상도 공물에 포함했고. 그래서 영주끼리 뽀대나게 악수도 하고 초상화로 박았는데, ㅅㅂ 갑자기 전쟁남. 중간 맥락도 없음. ㅅㅂ무슨 전쟁이 자연재해냐? 갑툭튀하게. 이거, 왜 이런 거임? <어, 나도 그럼. 내가 잘못한게 아닌가보네> <나 이거, 3번째 저지랄하는거보고 겜 접을까 고민중> <순서대로 했어? 마법사랑 호감도 쌓고, 영주가 지랄하는거 조용히 마무리하고, 호송단 꾸리고, 외교단 출발…> <그거 순서 안지켜도 됨. 영주새끼랑 안틀어지는게 핵심임> <내가 실험해봤는데, 본 버전에서는 잘 돼. 선행 테스트 버전만 안되는 거임> <ㅋㅋㅋ개발자가 전쟁광임> ================================= 하다하다 이제, 링크로 주면 될껄 프린트해서 주네… 코드에 집중하느라 사내 메신저를 좀 씹었더니, 딴에는 나름 강수를 쓴 셈이다. “한다! 해! 회의!” “죄, 죄송해요…” “경아씨가 뭐가… 자. 가자고.” 그리고 회의는 끝없이 이어졌다. 홍보팀에서는 닦달했다. 선행버전이 저러는데 유료화 일정을 언제라고 공지해야되냐고. 그걸 알면 내가 개발자냐? 신이지. 강부장은 개발팀 전원을 모아놓고 걱정했다. 전체 구조를 싸악 훑어봐야되는게 아니냐며.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내가 강부장의 발언을 끊고 회의를 마쳐버리자, 그는 ‘감히’ 나를 저격하기도 했다. “팀장님은 코드가 예쁜게 그렇게 중요하십니까? 왜 본인만의 컨벤션을 고집해서 개발속도를 늦춰요? 그냥 범용 라이브러리 가져다 붙이면 끝나는 일을, 굳이 컨벤션 맞춰서 일일이 개발하는 겁니까?” 일일이 답해주기도 귀찮다. 남의 라이브러리 가져다 쓰다가, 문제 생기면 그거 누구 책임으로 돌릴 건데? 그리고 마지막. 팀장들끼리 모인 전체 회의에서, 소라 언니도 말했다. “정 안되면 전체 구조를 다시 검토해보자고. 유료화 모델이 붙기만 하면 에러가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웃음도 안나온다. 소라 언니까지 이런단 말이지? 나는 한계였다. 그리고 나는 ‘나좀 살려줘’ 같은 말을 하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 짜르고 그렇게 하면 되겠네.” 싸- 하고. 회의실은 곧바로 얼어붙었다. <2>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홍보팀장은 내게 입모양만으로 ‘왜 그래?’ 라고 했고, 나는 거기에 답해주었다. “지금 누구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거 같아?” 정확히는 소라 언니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올라가려는 언성을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다들, 마우스만 딸깍해도 게임이 잘 실행되니까, 내가 뒤에서 주식 차트나 보고있는 거 같지? 우리 게임은 AI와 맞물린 특성때문에, 전체 구조를 훑는데만 일주일이 넘게 걸려.” 과장이 아니다. 시중에는 ‘할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임'을 만들어주는, 그런 속편한 AI 모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작문을 하는 AI 기능과- 회사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게임을 교묘하게 섞어서- Eve’s Fruits의 백그라운드 기능을 구현해놓았다. “거기다 개인의 SNS를 통해 주인공을 학습시키고 이를 게임에 대입하는 건, 레퍼런스 하나 없이 내가 구현한 알짜 기술이야. 여기에 쓰인 모든 기술들을 팀원들과 공유하려면, 개발자이기 이전에 일타 강사가 되어야해. 강사료는 따로 챙겨 줄꺼야?” 말이 쉽지, 나는 그 기반을 만드는데만 1년이 걸렸다. 거기다, 그 전원이 각기 작성할 코드들을 취합하고 검토해야하는 거면-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들면 업데이트는 내 환갑때 쯤 하게 될걸?” “서팀장, 좀 진정하고-” “거기다, 우리 팀원이 한말을, 내가 검토하자고도 안했는데, 팀장 회의까지 끌고와? 여기가 무슨 시장바닥이야?!” 마지막이 내 분노의 핵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부장이 슬금슬금 월권 비슷한 짓을 해오던 차였다. 내게 관리자 권한(Root Access)을 줄수 없냐고 따진다거나, 은근히 나를 제외시키고 팀원들과 담합해 업무시간에 밖에 나가 한참동안 커피를 마신다거나 하는 식의 미묘한 월권을. 게다가 그가 내뱉는 대다수의 주제가 주식에 관한 거였다. 그의 모니터에서도 주식창이 떠있는 것을 몇번 보기도 했고. 이는 팀원들이 나태해지기 시작하는 징조였다. 오늘 했던 이야기도 그렇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우리말에서, 강부장은 회의 내내 ‘팀장의 무능’을 지적하는 투로 말했었다. 난 강부장이 나에게 가진 열등감에 대해선 관심이 없지만, 그것이 팀의 사기나 업무 효율을 저하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일들을 방관하는 것도, 팀장으로서의 업무 유기다. 띠링-.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의 문자였다. 아빠한테 전화를 한번 해주라는. 씨! 코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쁜데! 시간이 멈춰버린듯한 회의실에 나만 혼자 씩씩거리고 있었다. 다들 바쁜 시기에 이렇게 대놓고 지랄을 해버렸으니, 나도 곱게는 못늙었다. 소라 언니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서팀장은 남고, 나머지는 가서 일 보도록 하세요.”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갔다. 소라 언니는 사람들을 물리고 나서 호주머니에서 사탕 2개를 꺼냈다. 그리곤 하나를 자기입에 넣고, 남은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말없이 그걸 받아선, 입 속에 털어넣었다. 막막했던 게임 개발이 여기 오기까지, 개발만큼이나 힘들었던건 사람 사이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언니는 이렇게 사탕 하나를 내민다. 상대가 사원이건 과장이건 팀장이건 할거 없이. 그리고 그 사탕을 다 녹여 먹을 때까지, 서로 아무말을 하지 않는게 불문율이다. 먼저 사탕을 다 먹은 언니가 말했다. “참고로 너네 팀원들 중 누구도, 나한테 다이랙트로 무슨 말을 한 적 없었어. 전체를 검토해보자고 한건 내가 그냥 말해본 거지… 그 정도 까지 큰 일일 줄은 몰랐어. 나중에 괜히 오해 생길까봐 말해둔다.” 이어 달짝한 사탕을 다 먹은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미안해, 언니... 나도 초조해서 그랬어.” “뭐, 그건 괜찮은데 말야.” 이상하게도, 그 무심한 말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 언니 성격 보면, 진짜 대표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지 싶다. 소라 언니는 작게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런 어조로 말했다. “너 연애 안한지 백 년쯤 됐지?” “연애할 상황이 되야 하지.” “누군 상황이 돼서 하니? 상황을 만들어서 하는 거지.” 소라 언니는 혀를 한차례 차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너 최근에 회사에서 일하는 거 말고, 따로 하는 거 없어?” “당연히 있지. 사람 뭘로 보고.” “뭐 하는데?” “그야-”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다 말했다. “-너튜브 봐. 엄청 재미있어.” “뭐 보는데?” “그... “ 대뜸 떠오르는 게 없었다. 머리를 긁다가 나는 핸드폰으로 너튜브를 실행해 보았다. 알고리즘엔 익숙한 것들이 떠있었다. “이런… AI 실용 사례들 정리해놓은 거. 최신 AI 트렌드랑.” “우와. 정.말.재.미.있.겠.다.” 소라 언니는 영혼없는 말을 끝으로 참으로 불쌍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보니, 그제야 나도 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다정하게 말했다. “업데이트 며칠 늦어도 되니까, 좀 쉬어.” 뭉클- 하면서 코끝이 찡했다. 언니의 저 말이, 얼마나 큰 각오의 말인지 아니까.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제 정말 막바지에 와있는 것이다. 알파 버전, 베타 버전, 전세계 정식 서비스까지. 우리는 정말 많은 허들을 뛰어넘었고, 이제 그 과실을 따기 직전에 있는 셈. 이제 수익모델을 붙이기만 하면, 정말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럼 월급날마다 대표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보지 않아도 될테지. 언니는 지금, 그걸 미뤄도 된다는 식으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빈말이 아니었는 듯, 덧붙였다. “은아야. 좋은 생각은 충분한 휴식 뒤에 나온다잖아... 그리고 개발자들은 그런 거 많잖아? 막혔던게 갑자기 엉뚱한 계기로 팍 풀려버리는거.” 나는 솔직히 말했다. “지금은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 “그럼 다른 게임이라도 해, 옛날처럼... 그리고 너, 내일은 출근 하지마. 이건 오너 명령이야. 그리고 앞으로 머리 안감으면 감봉이야.” “...알았어.” 시간은 이미 7시였다. 언니도 나처럼 시계를 보다 말했다. “저녁 같이 먹을래?” “아니.” “그래. 그럼 먼저 갈게.” 두 번 권하지도 않네. 소라 언니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걸 싫어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눈치를 보며 퇴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지하 식당에서 홀로 저녁을 먹곤- 눈치를 살피다 다시 사무실로 왔다. 코드를 다시 살펴보기 위해. 딱히 죄책감은 없었다. 언니는 ‘내일 출근 하지마’라고 했지, ‘오늘 일찍 퇴근하라’곤 안했으니까. 토도도도독- 조용한 사무실에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업데이트 버전의 코드 비교를 마치고 나니, 밤 11시. 눈이 따가워 의자를 뒤로 넘기며 살짝 눈을 붙이려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아빠가 입원했는데 전화도 한번 안해주냐는 핀잔이었다. “야. 너 전화 한통 하는게 뭐라고, 그거 하나 안해주냐, 이 매정한 딸래미야.” “아, 깜빡하고 있었어, 진짜… 지금이라도 할께.” “지금이 몇신데. 아빠 자, 이 년아. 내일 해.” 엄마 전화를 끊고 나자, 괜시리 또 눈물이 났다. 어두컴컴한 밤에 홀로 남은 회사에서 호르몬이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너 도대체, 뭐하는 인간이냐’ 하고. 새벽 2시쯤 되어서는, 철학서이며 시이며 사랑이었던 코드들이- 혈서로 쓰여진 협박 비슷한 걸로 보였다. 코드의 같은 줄을 다섯 번째 보고있음을 확인한 나는, 깨끗하게 승복했다. 더는 무리라고. 그리고 타이밍 좋게, 또 한번 전화가 왔다. 이번엔 대학 동창이자 같은 게임 동아리 출신인 홍보팀장에게서였다. “어. 지철아.” “은아, 너. 어디야?” “나? 나야 회사지.” “그래? 그럼 기다려봐.” 뚝-. 전화는 바로 끊겼다. 잠시 후, 지철이는 비닐봉투를 들고서 팀장실로 들어왔다. 놀랍게도, 맥주캔이 든 비닐봉투였다. “야, 여기 회사야.” “뭐, 어때. 대표님 퇴근 했잖아.” “이른다?” “연봉도 동결됐는데, 이 정도 복지는 있어야지.” 딸깍- 지철이가 맥주캔을 따자 고소한 냄새가 흘러왔다. 마흔의 나이 답지 않은 악동같은 표정이, 묘하게 전염성 있다. 난 유혹에 지고 말았다. 지철이는 내가 든 맥주캔에, 자기걸 부딪히며 말했다. “너 눈에서 불나오겠다.” “많이 빨게?” “응… 뭘 그렇게 목숨걸고 하냐?” “유료화 가지고 재촉했던 게 누구시더라.” “나라고 어떡하겠냐. 위에서 쪼는데. 게다가-” 지철이가 맥주를 들이키길래, 나도 같이 들이켰다. 캬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시원했다. “-천하의 서팀장님이, 그렇게 멘탈이 약할 줄은 몰랐지.” 음, 글쎄. 나는 사람의 멘탈이, 방어구가 아니라 소모품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에 등장하는 기사들의 갑옷이 아니라, 마법사들의 마나처럼. 이 능글능글한 홍보팀장이 항상 웃고다니긴 하지만, 자기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루종일 압박을 받아봐라. 웃고다닐 힘이 남아있는지. 그리고 이 나이 마흔의 남자가, 단순히 사담을 나누기 위해 새벽 두시의 개발팀장을 찾아왔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이 녀석, 술이 약하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그래서, 진짜 용건은?” “응?” “시간을 아끼자고… 적당히 술을 마셨다 치고. 얼큰해졌다 치고. 어느 정도 선 넘는 말을 해도 용서가 될 만큼 알콜이 올랐다 치고. 같은 회사의 개발팀장인 대학 동창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철이는 멋쩍게 웃었다. “너, 우리 게임 해본지 오래 됐지?” 어쭈? 장난하나. 얘도 강부장 과였나? 개발자가 테스트를 하기 위해선, 하기 싫어도 게임을 실행해야한다. “내가 하루에, 우리 게임, 몇시간 테스트 하는 줄 알아?”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녀석은 봉투 속에 있던 오징어 다리를 꺼내더니 하나를 툭 떼서 내 입에 집어넣었다. “회사 계정으로 남의 SNS 긁어와서 학습시켜서 하는 거 말고. ‘진짜’ 니껄로 게임 하는 거 말야.” 어, 이건 좀 뜨끔했다. 사실 나는 내 껄로 게임을 해본적이 없다. 변명하자면- 난 원래 SNS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이해하질 못했다. 어차피 내 뱃속에 들어갈 것들을 사진으로 찍어 저장한다거나- 남의 뱃속에 들어갈 것을 구경한다거나- 남의 일상사, 여행, 옷, 남자친구 등을 보며 ‘좋아요’를 누르는 즐거움에 대해. 그런 내가 SNS를 한 경험이라곤- 개발 초기에 해당 API를 이용하기 위해 테스트 해 본 것 뿐. 그 이후로는 쭈욱, 회사에서 남들이 만들어놓은 테스트 계정으로 게임을 실행했었다. “우리… 예전에는 정말 재미있게 했었잖아. 애초에 게임회사에 취직한 이유도 그거였고.” “...그래서?” “살짝만, 초심으로 돌아가보자고. 닦달만 하지 말고, 너 자신의 업적을 좀 느끼고 즐겨보란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갸웃 하고 말았다. 닦달의 최고봉은 우리 회사 홍보팀이지 않은가. “누가 누굴 닦달하는데?” “너가. 너 자신을.” 나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철학 전공이었던 애가 저런 말을 하니, 어울리는 면이 있었다. 지철이와 나는 퇴근길이 겹친다. 우리는 돈을 아낄겸 같은 택시를 탔다. 술값을 대신해 택시비를 낸 나는, 집에 오자마자 머리를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가 잠들기를 포기했다. 미칠듯이 피곤하고 눈이 따가운데 잠이 오질 않는다니. 머리속엔 오직 업데이트 생각 뿐이었다. “아오, 진짜!” 머리띠를 하고선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곤 Eve’s Fruits를 실행했다. 뱀이 사과를 향해 입을 벌리는 익숙한 로고가 떴고, 나는 ‘새 캐릭터 생성’ 버튼을 눌렀다. 가장 먼저 뜨는 인터페이스는 이거다. ‘사용하는 메일 및 SNS계정을 알려주세요.’ 우리 게임의 주요한 차별점이다. 게임의 이야기를 ‘너의 이야기’로 치환해준다는 것. 나는 소라 언니랑 지철이가 한 말을 떠올리곤, 내 SNS에 접속을 했다. 휴면계정이 되어 인증을 거쳐야 했고, 놀랄 것도 없이 한장의 사진도 없이 텅텅 비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친구신청 메시지는 꽤 수북이 쌓여있었다. 확인해 봤더니, 소라 언니, 정사원, 강부장, 이지철, 엄마아빠 등. 회사 사람들과 가족들이었다. ‘자신의 멋진 사진을 올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세요’ 하고 SNS의 표지에 적혀져 있다. 나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철이 말대로, 정말 ‘제대로’ 캐릭터를 생성해볼 요량이었다. <3> 내 SNS에 쌓여 있는 도합 20개의 친구신청들. 그중 7개는 회사 직원들이었고, 4개는 가족. 그리고 3개는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이어 100통이 넘는 메시지 앞에선 좀 당황스러웠다. 컴퓨터 앞에서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튀어나왔다. “송구하기도 해라.” 진심이다. 답변은 커녕 ‘좋아요’하나 달아주지 않는 나에게 이리도 관심을 보내주다니. 가장 최근에 올라온 메시지는 소라언니의 거였다. 그것도 어제, 나와 사탕을 나눠먹고 바로 보낸 거인듯 했다. [Captain Sora: 너 소개팅 생각있니?] [Captain Sora: 이 사람도 개발자라서 말이 잘 통할 거야.] [Captain Sora: 너 네크손 알지? 거기 총괄 PM이야.] [Captain Sora: 예전부터 우리 프로젝트 눈여겨 봤데. 참고로 엄청 잘생겼어, 이 얼빠년아.] [Captain Sora: 사진보고 맘에 들면 ‘합격’이라고 해. 나머진 언니가 알아서 한다.] 문자나 전화로 알리지 않고 굳이 SNS 메시지로 전달한 건, 일종의 타협인듯 했다. ‘업무 외 시간엔 직원들에게 연락하지 않는다’하는 그녀의 신조와의 타협. “뚜쟁이 나셨네.” 하고, 모든 친구신청을 수락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소라 언니가 작성한 피드들이 주르륵 떴다. 가장 먼저 느낀건 배신감이었다. “이 언니, 연애하고 있었어?!” 가장 최근의 피드에서, 소라 언니는 두꺼비상의 남자를 옆에 두고서 손가락 하트를 한 채 웃고 있었다. 뭐랄까. 회의 실에서 연애 어쩌고 했던 이야기와 소개팅을 주선하는 메시지가 단번에 설명된다. 이 프로젝트 마무리의 CEO께서 영수증같은 거에 시달리고 있을 줄 알고 내심 동정하고 있었는데, 취소다. 뒤에서 몰래, 이렇게 인생의 꿀을 빨고 계셨단 말이지? 나는 당당하게 ‘싫어요’를 누른 다음 피드를 내렸다. 가족들의 SNS가 이어졌다. 3년전에 결혼한 오빠는, 조카를 목마 태운 채, 코끼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었다. 아마 사진을 찍고 있는 올케를 향해 저리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리라. 코끼리도 눈꼴시려웠 것이다. 나는 그 코끼리를 대변하는 마음으로, ‘싫어요’를 눌렀다. 그 다음으로 뜬 건 머리가 벗겨진 강부장의 피드. 그의 피드에서는 주식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피드가 올라온 시간이 오늘 2시 였던 걸 보면, 분명히 회사에서 찍은 것. 그 배짱을 존경한다. 그리고 당연히 ‘싫어요’를 눌렀다. 머리나 확 더 빠져버려라. 정사원의 피드. 회사 주변의 컴퓨터 학원 간판을 찍어놓았다. ‘싫어요’를 눌렀다. 대학교 수업을 쌩까고 BTZ 공연을 보러 간다는 생각없는 여동생의 피드에도 ‘싫어요’를 눌렀다. 그리고 다음 피드는, 내게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다름아닌, 대학교 시절 게임동아리였던 선배의 피드였다. 거기엔 화려한 꽃무니와 함께, ‘공개 청첩장’이라는 대담한 이미지가 올라와 있었다. “결혼한다고?” 뭔가,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사실 내가 게임을 좋아하게된 계기가 그 선배였다. S대의 게임 동아리장. 새삼스러움에, 피식 하고 웃게된다. 항상 인기가 많았던 그는, 달라붙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공부밖에 모르던 나도 어딘가 나사풀린 그의 매력에 흠뻑 젖었었다. 그리고 결국.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그의 태도에 착각한 나머지, 고백 후 대차게 까여버리는 흑역사를 창조하기도 했다. 음. 혹시 이거 ‘싫어요 x 100’ 같은 기능은 없나? 그 웨딩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애도 내가 아는 애였다. 여자애들 사이에선 여우라고 불리던, 연극영화과 백승미. 난 내게 친구추가를 건 그들의 무심함을 떠올리며 ‘싫어요’를 눌렀다. 물론 그 백승미의 이름도 ‘여우같은 뇬’으로 수정했고, 그 예비 남편의 이름은 ‘첫사랑(삭제예정)’이라고 수정했다. 아무튼, 그들의 결혼식엔 죽어도 안갈테다. 다음으로 뜬 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잘생긴 남자였다. 그 슈트입은 뽄새와 날렵하게 빠진 턱선이, 진짜 무슨 만화책을 찢고 나온 주인공같다. “와아…” -하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기시감 때문이었다. 회사 밖에서 바깥 활동을 잘 하지 않는 내겐, 좀 낯선 기시감.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봤더라. 어디서- “앗!” 나는 뭔가를 번뜩 떠올렸다. 그리곤 인터넷 히스토리를 뒤져 해당 페이지를 찾아냈다. 인터넷 뉴스의 페이지였다. ‘38세 게임 개발의 신화.’라는 타이틀로 시작된. 그는 내가 좋아했던 게임을 만든 개발자였다. 2019년 화제의 게임, ‘The Mage’. 1인 개발로, 대박을 터뜨렸던 잘생긴 개발자.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친구신청을??? 나는 그의 SNS 공개정보를 클릭해 보았다. 그리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헐, 미친.” ============== 42살. K 공대 출신. 까칠함. 연극 감상을 좋아함. 현 네크손 개발 PM. =============== …네크손 개발 PM? 머리가 살짝 띵해왔다. “소라 언니, 이 사람을 소개시켜줄려고 한 거야?” CEO인 그녀의 막강한 인맥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아무튼 사양한다. 아니, 절대 사양이다! 내 머리는, 잘생긴 사람들 앞에서는 먹통이 되어버리는 심각한 버그가 있다. 그런데 이런 40대 답지 않은 조각 미남이라니. 이는 보나마나 나를 또 다른 흑역사로 인도할 것이다. 아마도 내 SNS 아이디는, 이 추진력 만땅의 언니가 알려준 것이리라. 나는 소라언니로 인해 혹여라도 연락을 주고 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싫어요’를 눌렀다. 피드는 끝없이 이어졌다. 게임의 설정들로 가득한 기획팀장의 피드. 게임의 실제 홍보도 겸하고 있는 홍보팀장의 피드. 결혼식에 입고가기 좋은, 중후한 멋을 강조한 옷 광고 피드…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모니터 위로 지나갔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나와 오빠의 사진이 도배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때의 모습이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가난했지만, 나의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아빠와 엄마의 피드를 끝으로, 나는 SNS 창을 껐다. 괜히 감상적으로 변할것 같아서다. 나는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으니까. “게임하자, 게임.” 나는 ‘Eve’s Fruits’의 입력창에, 내 SNS의 연동을 걸었다. 잠시 후, 나도 아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Eve’s Fruits’는 보다 즐거운 플레이를 위해, 본인 사진 등록을 권장합니다. 이는 주인공 캐릭터에 반영됩니다. SNS에 본인 사진을 등록하거나, 아니면 직접 본인의 멋진 사진을 업로드해 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네.] [아니오.] 음. 나의 멋진 사진이라니. 한동안 피부관리도 안했고,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지쳐있는 40대 개발자에겐 다소 과도한 요구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거기엔 19살의 서은아가 활짝 웃고 있다. 코 끝이 찡했다. 호르몬이 어제 오늘 미쳤나? 새삼, ‘나도 저렇게 웃었을 때가 있었구나’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내 메일에 내 민증 사진을 업로드 한뒤, 이를 게임 상에도 등록해버렸다. 그러자 순조롭게 다음 상황으로 넘어갔다. 로딩바와 함께, 다시 메시지가 떴다. [세계관을 만들고 있어요.] ‘할 때마다 이야기가 바뀌는 게임’의 1단계였다. 팀원들은 이를 농담삼아 이를 ‘천지창조’ 단계라고 한다. 엄밀히는 기획팀장이 치밀하게 짜놓은 세계관에, 특정 요소를 변형하는 단계다. 그 특정 요소라는 것은, 플레이어의 성격과 인간관계에 따라 게임의 시작점(starting point)를 배정하고 그 주변 인물을 설정하는 단계다. 메시지 아래는 이렇게도 떠있다. [팁: 본 게임의 세계관에 대해 궁금하시면, 아래 버튼을 클릭해주세요.] 물론 클릭할 필요는 없다. 내 머릿속엔 기획자 만큼이나 빵빵하게 본 세계의 세계관이 그려져 있으니까. 본 게임의 세계관은 중세의 판타지를 골자로 한다. 서구적인 요소와 동양적인 요소가 공존하며, 성직자나 마법사 같은 전통적인 판타지 요소가 있는. 가급적 ‘모든 연령대’와 ‘성별’을 ‘오래’ 사로잡는 것이, 본 게임의 기획의도였다. 그리고 어쨌든, 지금으로선 성공한 기획의도라 볼수 있으리라. 모든 연령대- 고등학생에서 50대 남성까지도 본 게임에 접속하고 있으며, 모든 성별- 남자 유저가 대부분인 RPG 장르에서 1/3이 여자라는 사실은 고무적인 것이며, 오래 사로잡는 것- 100만의 동접자가 생기기까지 누적된 꾸준한 재접률이 이를 증거한다. 슬금슬금 차오르던 로딩바가 가득 찼고, 다시 메시지가 바뀌었다. [캐릭터를 구체화 중입니다.] 여기서부터가 가장 버그로 의심되는 구간이었다. 경우의 수가 ‘특정 가문의 아들/딸’로 한정되는 시작점과는 달리, 그 주변인물의 성격과 역활과 장단점을 설정하는 이 대목이, 기술적으로도 가장 어려웠던 구간이었으니까. 역시나 로딩바가 가득 찼고, 다시 메시지가 바뀌었다. [주인공인 ‘서은하’를 구체화 합니다.] 유저 반응 게시글을 보면,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신기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자신의 피드를 바탕으로 AI를 통해 자신이 재구축된다는 묘한 기분에. 잠시 후, 로딩바가 차다 말고 또다른 메시지가 떴다. [SNS로 부터 받은 본인 정보만으로는 캐릭터를 구축하기에 불충분합니다.] [본인의 정보를 추가해 주시겠습니까?] [네.][아니오.] 음. 이건 내가 SNS 작성한 피드가 없어서 그렇다. 예전에 테스트 할 때도, 연예인 사진이랑 그들의 어록만 몇번 넣었다가 바로 삭제해버렸지 아마. 나는 이번에도 ‘네’를 클릭했다. 이번에는 거대한 텍스트 창이 떴다. [본인의 이야기, 혹은 본인이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음. 언제였던가. 기획팀에서 이 부분을 좀 바꾸자고 제안했던게 기억난다. 나는 개발 팀장의 권한으로 대차게 까버렸지만. 기획팀의 주장은 그랬다. 항목을 몇 개로 정리해서 유저가 접근하기 쉽게끔 하는게 어떻냐고. 나의 반려 사유는 이랬다. 그 작업량에 비해, 개발 중요 순위에서 낮은 것 같다고. “으음…” 나는 텍스트 창에 ‘나는’ 이라고 타이핑한 다음, 손을 멈추고 말았다. 막상 내가 해보니, 기획팀의 주장이 좀 더 이해가 갔다. 자기소개라니. 이게 꼭 무슨, 입사원서를 쓰는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하, 이거 좀… 쑥쓰럽네.” 눈이 너무 따가워 안경을 벗고, 입력수단을 음성으로 전환했다. 살찍 어지러웠다. 모니터의 옆의 마이크 방향을 조절한 다음, 조심히 입을 열었다. “아빠 엄마가 22살때 나를 낳았어.” “위로 한 살 터울 오빠가 한 명 있고, 아래로 15살 차이나는 늦둥이 여동생이 한명 있어.” SNS의 피드 정보를 나열하듯, 사실적인 서술을 하다 말고, 툭- 내 안의 것들이 튀어나왔다. “행복했었어.” 이상했다. 한 번 튀어나오기 시작하니, 연달아 그 근처의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의 너무 잦은 애정행각이, 징그럽지만 좋았고-” “오빠랑 엄청 싸웠지만, 서로 무심히 챙겨주며… 좋았어.” “늦둥이 막내의 투정이 한심하지만, 그래도 가끔 귀여워서 좋았어.” 이상하다. 오래동안 눌려보진 못한 ‘좋아요’를, 몰아서 클릭하는 기분. 나는 약간 코먹은 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그래서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었어.” 망할 호르몬아. 그만좀 나대라. 코끝이 왜 자꾸 시큰거리는 거야.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 나름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에 입학했고, 원하는 진로의 공부를 미친듯이 했어… 원하는 취직을 했고, 꾸준히 경력을 쌓았어.” 나는 코끝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아.” 투둑. 책상위로 뭔가 떨어졌다. 눈물일줄 알았는데, 코피였다. 호르몬이 아니라 체력의 문제였던 모양이다. “소라 언니한테 몇번 ‘연봉 언제 올려줄거냐?’는 식으로 투정부리기도 했어. 하지만 사실, 연봉을 수십억 받아도 마찬가지일 거야. 어차피 돈 쓸 시간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면 자랑인줄 알테지. ‘어머, 자랑을 돌려서 말하네’ 같은 식으로. 그리고 그런 반응을 마주하고 나면,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진다. “엄마 아빠한테 용돈을 붙이며 투정부리지만, 사실 돈에 관심도 없어... 살면서 제대로 연애도 한번 못해봤고, 또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결혼처럼 거창한건 바라지도 않는다. 얼빠라니. 그건 연애를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방패막이에 불과하다. “난 불행해.” “그리고.” “행복하고 싶어.” 그러자 자존심처럼 버티고 있던 벽 하나가- 와르르- 마음속에서 무너져내리는 것 같다. 코피를 대충 닦아보지만, 어지러움은 닦이질 않았다. 나는 반응 농담삼아 말했다. “도와줘. 난 네 어머니 같은 거니까.” 우습다. 애는 커녕 결혼도 못한 40대 여자가, 자기가 만든 게임을 눈앞에 두고 어머니 타령이나 하고 앉아있으니. 그런데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빌드를 시작합니다.] 어? …내가 입력 완료버튼을 눌렀던가? 어지럽다 못해 빙글거리는 시야 속에서, 나는 뭔가 큰일이 났다고 직감했다. ‘몸 챙겨가면서 일해’라는 엄마, 아빠, 소라 언니의 말이 소용돌이 쳤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이 어지러웠고- 우주를 백만년쯤 돌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어지러움은 멈췄다. 그리고 매스꺼웠다. 이번에도 코 끝이. 나는 까맣게 변한 시야 속에서도, 어떤 익숙함을 감지해 냈다. 이 냄새는… 흡사, 소라 언니의 담배 냄새?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는 진짜 소라 언니가 있었다. “어때, 한 번 만나 보겠어? 너 얼빠잖아.”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기다란 곰방대를 문 소라 언니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잠깐만. …곰방대라고??? 가관인 건 그것 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시대착오적인 챙 넓은 모자에- 무슨 결혼식장에서도 눈총받을 고급스런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어, 언니?” “만나 볼거냐고.” 내 눈이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초상화가 한 장 놓여있었다. 두터운 서류 위에 놓여진, 잘 생긴 남자의 그림이. “그 정도면 네가 말하는 ‘합격’ 아니야?”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SNS 피드에도 있던 남자의 모습이었다. 네크손 PM의 얼굴을 하고 있는. <4> "이... 무슨?" "연애하라고, 이 년아. 쉬는날 까지 극장와서 밤새 일하지 말고. 왜 디렉터라는 년께서, 맨날 극장에 와서 쳐 주무시는 건데?"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수북한, 창고같은 공간이었다. 금이간 거울, 가면과 망토, 정체 모를 상자, 날개 같은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고, 벽에는 양초가 걸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심호흡을 반복하다 소라언니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대체… 언니 꼴은 왜 이래… 이거 코스프레 같은 거야?” “코스프…? 뭔데, 그건?” “게임 캐릭터 흉내낸 거냐고.” “게임? 도박장에서 하는 거?” 이어 언니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얘가 지금, 잠이 덜 깼나.” 후욱- 하고 담배연기가 밀려왔다. 그 냄새가 너무 생생해서 기침이 나왔다. 그녀는 그런 내게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너, 18살이면 슬슬 시집갈 나이잖아, 이것아. 맨날 남자 얼굴만 밝히니까 짝을 못 만나는 거고.” “...응?” “거기다 이 분, 본인이 먼저 널 소개해 달라고 한 거란 말야.” 소라 언니는 내 앞에서 초상화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내 앞머리가 흔들렸다. “됐고. 그래서 할거야, 말거야? 주선해?” 어? 어?? 어???? 난 바보가 아니다.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다는 소리다. 드디어 과로에 지친 한 개발자가 미쳐버린 순간이 온건가? 난 곰곰히 생각하다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냐아냐. 그러기엔 난 지금 너무 논리 정연해. 이어서 나는 언니를 내버려둔 채, 그 창고같은 공간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리고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빨간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놓여있는 수많은 객석 의자가. “허허…” “야, 너 정말 왜그러는건데.” “마지막. 한번만 더 체크해보고.” “뭘 체크해?” 이 체크만 끝나고 나면, 지금 상황은 완전히 설명할 수 있었다. 나는 극장 입구 밖으로 달려나갔다. 따각- 따각- 따각- 대리석이 깔린 대로로, 마차 한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슬쩍 물러난 덕에 말발굽에 튀는 진흙을 피할 수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마부는, 모자를 슬쩍 벗으며 내게 목례를 했다. 좌측 멀리로는 10여미터 높이의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어어, 진짜로? 난 마지막으로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각기 크기가 다른 3개의 달. 이는 ‘Eve’s Fruits’를 상징하는 시그니쳐이기도 했다. 난 논리를 중시하는 업종에 일하는 여자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이 상황에 대해선 한가지 결론 밖에 나올 수 없었다. 나는 펄쩍 뛰고 말았다. “이거! 꿈이었구나!” “얘. 얘! 너 아까부터 계속 뭐래는 거니?” 초상화를 한 손에 들고, 여전히 곰방대를 한손에 든 언니가 날 뒤따라 와서 말했다. “너 술 마셨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자각몽인 것이다! 내가 할 행동은 하나였다. “아냐아냐. 음. 크킄. 음음. ” “계집애, 표정관리 안되네… 하겠다는 거지?” “응?” “만남, 주선한다. 3일 쯤 뒤에 댁에서 뵙기로 하면 되겠지?” 오오. 나 이 패턴을 안다. 꼭 저러다가 중요한 순간에 꿈에서 깨게 되지. 당할 줄 알고? 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돼.” “...안해?” “아니. 3일 뒤는 안돼.” “...그럼?” 나는 현실에 나였다면 절대로 못할 말을 내뱉었다. “지금 당장 가.” 소라 언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어서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의 위아래를 살폈다. “지금? 그 꼴로?” “내 꼴이 어떤데?” “...직접 봐.” 그제서야 나는 내 차림새를 보았다. 펑퍼짐한 바지 끝을 끈으로 질근 묶어놓았고, 남성용 구두를 꺾어신고 있었다. 활동하기 좋아보이는 셔츠 중간에는 정체모를 얼룩이 묻어나 있다. “뭐, 어때. 꿈인데.” “너 아까부터 자꾸-” “미남은 기다리게 하는거 아냐.” 소라 언니는 갑자기 역정을 냈다. “여자가 그렇게 대뜸 찾아가는게 무슨 경우야! 없어보이게!” “괜찮아, 괜찮아... 어느쪽이야?” “어느쪽이긴… 저쪽에 있는 탑이잖아.” “탑?” 이 게임상에서 ‘탑’이라고 하는 것은 조금 특별한 위치에 있다. 나는 호기심을 가득 담아 되물었다. “마법사였어?” “...마법사 더글라스 경을 몰라? 내가 몇번이나 말했잖아.” “푸웁.” 소라 언니가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더글라스’라고 발음하는게 웃겼다. ‘Eve’s Fruits’에서, 주인공을 제외한 이름은 임의로 조작되는데, 딱 그 설정 대로였다. “저쪽 탑 말이지?” “나 안가.” “그럼 혼자 가야지.” 소라 언니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다가 날 따라왔다. 이 짜릿한 기분에 전율이 인다. 그래. 그동안 난 너무 힘들게 살았어. 꿈을 깰 때까지, 잠시나마 이 해방감을 누려보자고. 나는 탑으로 이동하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내 손으로 심어놓은 오브젝트들이, 눈앞에 질감을 입고서 자리하고 있었다. 줄을 맞춰 심어져 있는 가로수와 길 양쪽으로 세워져 있는 벽돌집들. 아기자기한 유럽풍 부띠끄와 기분 좋은 향기가 흘러나오는 빵집. 걷는 방향을 따라 시원하게 밤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홍보팀장, 지철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닦달만 하지 말고, 너 자신의 업적을 좀 느끼고 즐겨보란 말이야.’ 어찌보면 그 단순한 말이, 정말 내게 필요했던 조언인지도 모른다. 내가 구축한 세계가 눈으로 피부로 코로 느껴진다. 뿌듯할 수 밖에. 지금도 어쩌면 100만에 이르는 지구인들이 이 세계에서 위안을 얻고 있으리라. 그럴 진데, 그 세계를 제공한 나만 위안을 얻지 못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오래지 않아, 마법사의 탑 입구에 도착했다. 경비탑(watch tower)이랑 마찬가지로 비록 탑(tower)이라 칭하지만, 이는 높이 자체보다는 마법사의 권위를 상징하는 말이다. 이 세계에서- 미지의 것을 학습하고 그 힘을 이용하는 이들의 권위. 그리고 그 탑의 입구에는, 공통된 문구 하나가 양각되어있다. [빛이 있으라.] 내가 그 짧은 문구를 잠시 지켜보는데, 소라 언니는 다시 말했다. “은아야, 우리 지금이라도-” “어머, 문이 열려버렸네?” 나는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고, 소라 언니는 드디어 폭발했다. “야! 은아, 너! 오늘 진짜-” “어, 서은아?” 어머? 저 계집애가 여기있네… 내 첫사랑과 결혼한다는 공개청첩장을 올렸던 백승미였다. 쓸데없이 고퀄리티인 나의 상상력이, 영극영화과였던 그녀의 미모 역시 디테일하게 구현해놓고 있었다. 그녀는, 공개청첩장에서 입고 있던 드레스만큼이나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먼지털개가.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라 언니는 번개같은 속도로 어조를 바꾸었다. “은아, 너, 오늘 진짜 고마워! 싫은데도 이 언니 말대로 따라와줘서!” 백승미는 나와 언니를 번갈아보다 말했다. “힌데 양? …두 분 여긴 어쩐 일로?” “푸흡.” 아아. 음음. 캐릭터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웃음이 나오네. ‘소라 언니=힌데’다 이거지? 오케이. 소라 언니, 아니, 힌데 언니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더글라스 경이 저희 은아를 보고싶어 하는데, 이 애가 아시다시피 부끄럼이 많아 자꾸 피하는지라… 제가 이렇게 끌고 왔네요.” 음. 퍽이나 설득력 있겠다. 그 부끄럼 많은 은아는 구두를 꺾어신고 바지 끝단을 대충 묶은 채, 얼룩진 셔츠를 입고 입장했으니까. 백승미도 그런 내 복색을 지켜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라도 부끄러울 것 같긴 하네요.” 짓든가 말든가. 꿈에서, 그것도 일게 게임 캐릭터의 대사에 빈정상할 내가 아니다. 그녀는 들고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옷을 탁탁 털며 말했다. “그런데, 더글라스 경께서 은아씨를 보고싶어 했다고요?” “네. 괜찮으시면 좀 안내해 주시겠어요?” 두 불청객을 맞이하는 백승미의 얼굴엔 귀찮다는 표정과 의외라는 표정이 뒤섞였다. 이어 그녀는 뭔가를 떠올린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따라오시죠… 이쪽으로.” 백승미는 우릴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녀가 총총 걸음으로 나가자, 소라… 아니, 풉, 힌데 언니는 손으로 내 머리를 빗기며 말했다. “아. 그냥 줘 패서라도 뜯어 말릴 걸 그랬나…” 난 그 패턴에 대해서도 안다! 그래서 그녀에게 단호히 말했다. “안돼! 진짜, 절대 안돼! 나 이 시점에서 막, 충격받고 (꿈에서) 깨버리거나 하면, 정말 울어버릴꺼야?” “입 다물어, 이 기집애야.” 언니는 품속에서 조그만 약병 같은 걸 꺼내더니, 이를 손가락을 찍어 내 입술에 톡톡 찍었다. 살짝 쓴 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때, 문 밖에서는 백승미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더글라스 경!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잠시만 기다리시오.” 대단히 격식이 담긴 목소리였다. 곧이어 접견실로 들어온 백승미는 웃음을 띄며 말했다. “은아 너, 진짜 오랜만이다, 야.” “그러게.” “은아야. 오빠랑 나 이번 주에 결혼하는거 알지? 올거지?” 얘는 여기서도 결혼 준비 중이네. “어머. 결혼하니?” “공개 게시판에 붙여놨는데, 안봤어? …아.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 나랑 결혼하는 거라, 좀 그런가?” 니 뉴스피드에서 보긴 했다, 이년아. 백승미의 의도가 뭐였건, 타격은 없었다. 20대 때 시작했던 사랑에 헉헉거리기엔, 내 나이가 마흔이다. 이어,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가 커지더니 한 남자가 접견실 안으로 등장했다. 만화를 찢고 나온 더글라스 경이었다. “음. 외모 합격.” 나의 속삭임에 언니가 옆에서 허리를 꼬집었다. 근데, 진짜 잘생겼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모델이나 아이돌 비스무리했는데, 그런 사람이 눈 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눈호강 그 자체였다. “나는 누군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상황을 싫어하오.” 어차피 꿈인데 가서 찐하게 뽀뽀라도 해버릴까 싶다. 다행히 그런 행동을 하기도 전에, 백승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저는 그냥 조용히 청소를 도와드릴려고 했는데, 손님이 오셔서요.” 앗. 백승미 너도 불청객이였냐? 저 여우같은 계집애는 가슴 골이 슬쩍 보이도록 몸을 낮췄다. 그리고 우리의 만찢남께서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은아양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힌데 양에게 전하긴 했었소. 이런 식으로 불쑥 오라고 한건 아니었는데, 잘못 전달된 것 같군… 그런데 그대는, 어쩐 일로 온거요?” 그가 말한 ‘그대’는 백승미였다. 백승미는 백만불짜리 미소와 함께 말했다. “경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요. 마법에 관한 질문이요.” 이건 내 꿈이다. 나는 꿈의 주권자로써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백승미의 이어질 말을 차단해버렸다. “일찍이 더글라스, 풉, 경의 마법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던 터입니다. 그러다 이렇게 시간이 맞아 언니와 함께 들르게 되었네요. 혹, 너무 소탈한 모습이라 놀라셨나요?” “...조금은. 지금 그대의 모습은, 도저히 백작가의 영애로 보이지 않소.” 와. 저 얼굴로 저렇게 이야기 하니까 지적도 밀어로 들리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읊조렸다. “그래도 얼굴은 합격.” 내가 작게한 말에, 언니는 또 한번 내 허리를 꼬집었다. 아니 꿈이면서 꼬집는 느낌은 왜 이렇게 생생한거람. 더글라스 경은 조용히 덧붙였다. “그런데 방금, 내 마법에 대해, 경외심을 느꼈다고?” “아, 네.” “그 느꼈다고 하는게, 정확히 뭐요?” “에이, 일반인이 뭐 느끼는게 있겠어요?” 더글라스 경은 백승미의 말을 흘려듣고는,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튕겨보였다. 파스스- 하고 허공에 빛이 나타났다. 빛의 투영. 이는 이 세계관의 마법사들이, 가장 먼저 익히는 마법이다. 마치 당구인들이 큣대 잡는것만 봐도 고수와 하수를 구분하듯, 마법사들 간에는 저 빛의 투영만으로도 서로의 수준을 가늠해보곤 한다- -는게 기획서에 적힌 마법에 대한 설정이다. “말해보시오. 뭐가 느껴지시오?” 말 못할 것도 없지. 그래서 그 빛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파티클(particle) 처리를 꼼꼼하게 잘했군요. 이미터(emitter)를 아래쪽에 위치시키고 힘(forces)을 상향으로 잡으면 그렇게 불타는 듯한 효과가 나지요. 만약 수명주기(lifetime)을 좀 더 길게 잡으시면, 더 큰 불이 나는 듯한 효과가 날겁니다.” 백승미와 언니의 입이 벌어졌다. 나로선 아무말이나 한 게 아니다. 3D 그래픽스에 사용하는 용어라 그렇지. 이에 잘생긴 더글라스 경이 말했다. “역시… 은아양은 특별하군. 내 눈은 틀리지 않았소.” “그래요?” “혹시, 내가 왜 은아양을 보자했는지, 그 이유를 아오?” 아아, 나 이 패턴도 아는데. Eve’s Fruits에서 플레이어가 탑에 초대되는 이벤트는, 한가지. 탑의 마법사가 그 재능을 알아봤을 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거 같습니다.” 그때 백승미와 눈이 마주쳤다. ‘니가 뭐라서?’ 라는 표정을 짓고있는. 어차피 꿈이다. 뭔가 통쾌한 한방을 날리고 싶었던 나는, 그 시선을 덤덤히 받으며 말했다. “그야 물론, 제 외모겠죠.” <5> 눈앞의 마법사를 보고있자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저 잡티하나 없는 텍스쳐(texture) 처리를 강부장이 좀 봐야할텐데. 2D 이미지를 3D로 떠서 렌더링(rendering)하는 기술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을 잡아먹는 기술. 이 시간을 줄여낸 것이 ‘Eve’s Fruits’의 엔진기술력. 내가 가장 먼저 극복해낸 기술이다. 이에 더글라스 경께서는 짐짓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역시, 남들과는 다른 시선이군, 영애.” “저, 웃고 있는데요?” “표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이어 그는, 내 눈속을 들여다보다시피 말했다. “그대는 마치, 기계장치의 부품 쪼가리를 바라보듯 사람을 보고있소.” 뭔가 예리한 표현이긴 했다. 기계장치라기 보다는 데이타 쪼가리라고 해야 더 정확하겠지만. “난 일찍이, 그대를 본 적이 있었소.” 음. 이번엔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소개하는 스크립트인가.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이어질 대사를 기다렸다. 더글라스 경은 여전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그대는 나만 그렇게 보는 게 아니오.” “그랬던가요?” “하늘을. 땅을. 이 영지의 건물을. 또 나무를… 그 모든 것들을 그렇게 바라보더군.” 흡사 중국 무협 게임의 고수가 하는 대사같다. 아직 무공을 익히기 전의 주인공을 향해 ‘너는 눈빛이 다르군’ 하는 식의. “...그리고 그것이, 은아, 그대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이유요.” “시선이 삐딱한 여성이 이상형이셨군요?” 그리고 더글라스는 농담 따윈 모르는 캐릭터였다. “그대의 시선은 근원(根原)에 닿아있소.” 백승미는, 눈에 불을 켜고 나와 더글라스를 번갈아보았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서 피어나고 있는 빛을 보며 말했다. “아까, 내 빛을 분석하는 것으로 확신했소. 그대는 이미 그대만의 언어를 구성했고, 그대만의 규칙체계를 만들었다고.” 더글라스는 확신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는 그대가, 마법사의 재능이 있다는 증거지.” 참 재미있게 해석하네. 이어 그는, 주머니에서 네모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의 4분의 1 크기만한 그것은, 마치 쓰다 남은 까만 비누처럼 생겼다. 근데 이거, 어디서 분명 본 거 같은데… 뭐지? ‘Eve’s Fruits’의 특수 아이템은 아닌데. 내가 그 비누같이 생긴것의 정체를 고민하는데 더글라스가 말을 이었다. “마법사로 산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요.” “그래서요?” “그 삶을 받아들이겠다면, 그걸 삼켜시오. 그리곤 다시 나를 찾아오시오, 영애.” 더글라스의 대사보다 백승미의 표정이 변화가 흥미로웠다. 저 호소력 짙은 표정 변화는, 우리 회사 디자인팀이 재현해낸 폴리곤 처리의 극치다. “약속하지. 그때는 친히, 그대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리라.” “더, 더글라스 경?” 백승미가 경악하며 말했다. 이에 더글라스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 그대도 있었지. 질문이 있다고?” “...네.” “하시오.” 백승미는 나를 바라보더니 이를 한번 악 물었다가 말했다. “손을 한 번 줘 보세요.” “손?” 더글라스는 고개를 갸웃하다 자신이 구현했던 빛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가 손을 내밀자, 백승미는 접견실 테이블 가운데의 펜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그것으로, 더글라스의 손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의도가 뻔해보였고, 난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슬쩍 부딪힌 백승미의 가슴보다는 그녀가 쓴 글에 관심을 보였다. “재미있는 질문이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일까지 생각을 좀 해보겠소… 그리고 이제 다들 나가주시오. 다음 번에는 미리 약속을 잡고 와주셨으면 하오.” 어머, 아쉬워라. 나와 백승미와 언니는 인사와 함께 탑을 나왔다. 그리고 백승미는 나를 노려보더니, “어쩐지.” “어쩐지?” “네 성적의 비결이 이거였니?” “하아… 왠일이래니…” “뭐가?” 이어 언니는 장갑낀 손으로 내 턱을 딱 고정시켰다. 그녀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대체 뭐가 특별하단 건지 모르겠네.” “아아. 마법사 재능? 킥.” “웃겨 그게? 너 오늘 왜이렇게 실없니?” 이 세계관에서 마법사가 된다는 것은 일종의 큰 출세이기도 했다. 기사를 의미하는 ‘경’이라는 호칭이 마법사에게도 쓰이긴 하지만, 통상 기사보다 마법사가 더 높은 계급으로 통용된다. -는게 그 설정이다. “암튼 곧장 집으로 가. 다 큰 딸년이 맨날 극장에서 자면, 너희 부모님 걱정하신다.” 부모님이라는 말에, 뭔가 마음에 턱 걸렸다. 엄마가 전화로 했던 말이 생각나서. ‘야. 너 전화 한통 하는게 뭐라고, 그거 하나 안해주냐, 이 매정한 딸래미야.’ 서울로 상경한 이후, 가뜩이나 명절 때 말고 보기도 힘들었던 엄마 아빠다. 그리고 프로젝트에 돌입한 이후에는 명절마저 뛰어넘었었지. 나는 언제 깰지 모르는 이 꿈에서조차, 매정한 딸래미이고 싶진 않았다. “데려다 줘, 언니.” “뭐? 혼자 가, 이 기집애야.” “아잉. 언니.” “아니 얘가, 왜 안하던 짓을??? 진짜 오늘 이상해 너.” 그야 물론, 이 때가 아니면 언제 할까 싶어서다. 물론 현실에서의 소라 언니와 나는 친분이 두텁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한 회사의 대표와 그 소속의 개발자라는 현실적인 벽이 있어, 이렇게 친동생처럼 매달린다거나 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징그러워하는 그녀에게, 대놓고 몸을 비볐다. “오늘이 아니면 말 못할 것 같으니 말할께. 언니.” “야, 입술 때.” 난 언니의 얼굴에 묻어난 립스틱인지 뭔지 모를 자국을 닦으며 말했다. “매번, 이 성격드러운 개발자 꼬장을 받아줘서 고마웠어… 하지만 난 개발자니까, 오직 결과로만 답하는 걸로 할게. 프로젝트가 마무리 될 때까지, 이 주변머리없는 동생을 잘 부탁해.” “아오 진짜! 빨리 가! 가! 가!” 언니는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우리는, 나도 익히 아는 가문의 인장 앞에서 작별했다. 나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그 인장을 바라보았다. 쇠사슬을 끊어버린 꽉 쥐어진 주먹의 인장이었다. 본 세계관에서의 그 이름은 ‘레보유니’. 저택 대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현관에 들어서자, 엄마가 날보며 인사를 건냈다. “아주, 나가서 살지 그래?” 아아. 저 투박한 인사라니. 나는 이번에도 못해봤던 행동을 했다. 나는 그녀에게 쪼로록 달려가서 안겼다. “미안, 미안. 엄마. 미안해.” “야, 왜 이래?” 이에 한쪽편에서는 역시나 아는 소리가 들렸다. “와, 신기한 장면을 다 보네.” “내 동생! 아영이도 오랜만!” “아영이는 또 누구래… 언니는, 시집 간거 아니었어?” “...그건 좀 심했다, 야.” “하도 안보이길래. 아직 안간 거면 빨리 좀 가. 나 언니방으로 좀 옮기게.” 어쩜 이렇게, 생생하게 재현을 해놨지? 보정된게 있다면, 우리 막둥이와 나의 나이차 정도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쏘옥 사라져버린 저 애를, 3살짜리라고 봐주긴 힘들었으니까. 이어 엄마는 강한 힘으로 안겨든 나를 밀어냈다. 그리곤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왔다. “은아 너, 극장에서 무슨 일 있니? …술 마셨어?” “왜 다들 술꾼 취급이람… 딸래민데 이럴 수도 있지… 아빠는?” “글쎄? 서재로 가보던가.” “서재가, 2층이던가?” “그럼, 마당에 있겠니?” 나는 엄마의 이마에 멋지게 침을 묻히곤, 의아해하는 그녀를 뒤로 한채 2층으로 가는 계단을 밟았다. 삐걱- 삐걱- 디딘 층계에서는 나무의 마찰음이 났다. 힘들지 않게 아빠의 서재를 찾을 수 있었다. 책들이 많았고, 아빠는 없었다. 진짜로 생생하긴 하다. 실제로 아빠 방도 비슷한 구조였으니까. 책장에는 주로 법과 관련된 책이 많이 꽂혀있었고, 책상 위에는 줄을 치다 만 것 같은 책 한권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뚜껑이 열린 잉크통 속으로 붓펜이 담겨져 있었다. “이것도 아빠답네.” 난 희미하게 웃으며 책상 위를 정돈했다. 그리고 열쇠가 꽂혀있는 서랍은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나는 슬쩍 서재를 살펴본 다음, 그대로 열어보았다. 서랍 안에는 색바랜 양피지로 한가득했다. 나의 아카데미 수석 입학증서. 오빠가 어린 나를 엎고 있는 흑백의 목탄화. 삐뚤삐뚤하게 써져 있는, 아마도 어린 날의 나나 오빠가 쓴 듯한 편지… 그리고 갓 떨어진 한 방울의 눈물이 있었다. 내가 떨어뜨린 거였다. 같은 광경들이, 이미 SNS피드로 본 것 이라서. 음. 꿈에서도 눈물이 흘려지구나. 아빠는 노조활동을하다가 뉴스에도 나온적이 있는 분이고, 엄마 또한 오빠를 가지기 전엔 사회운동을 하셨던 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고맙다며 아빠를 찾아오는 분들도 많았고,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보낸 이들도 많았다. 아마 인생의 진짜 자랑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럼에도 SNS에는, 아빠와 엄마에 관련된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하다못해 뉴스 링크라도. 여기도 마찬가지다. 알량한 나의 장학증서. 오빠가 나랑 싸우는 모습. 둘이서 나란히 벌을 서는 모습. 달리기를 하는 모습 등이- 손때가 묻어 번지고 헤진 모습으로, 서랍 속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치 제대로된 비번도 걸려있지 않은, SNS의 공개된 보물처럼. “오, 안죽었었네?” 오빠가 서재 안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맨날 밖에서 일만하더니, 뭔 바람이 불었데?” “...이제 안그럴려고.” “음, 그건 좋은 생각이네.” 오빠는 자신의 뺨을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너, 알량한 돈 몇푼 더 벌어서 효도한다 생각하지말고, 일찍일찍 좀 다녀. 가뜩이나 못생겼는데 몸이라도 건강해야지… 우리집에서 엄마 아빠가 걱정하는건, 너 하나다.” 이게 꿈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뼈아픈 말이었다. 진짜 그럴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일 또 극장 가는 날, 아냐? 일찍 자.” “예이, 예이.” 내가 고분고분 답하자 오빠가 오히려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꿈에서 하기엔 좀 이상한 표현일 수 있지만, 좀 피곤했다. 내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누워 잠들면 서울의 내 방이서 깨는 것이지 싶다. 나는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각오를 한 채였다. “이제 돌아가면 잘할께, 엄마, 아빠… 오빠는 빼고, 동생아.” 그리곤 입술을 한차례 침을 적시고 말했다. “그리고, 은아야. 잘하자.” 목조로 된 천장의 나무무늬를 바라보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잠 드는 중간에 몇번씩 깼다. 등이 베겨서. 뭔가 해서 봤더니 우리의 더글라스 경께서 줬던 까만 비누 비스무리한 거였다. 나는 이를 머리맡에 치워놓고 다시 잠들었다. 마치 겨울잠 같은 긴 잠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짐작되지 않는. 삐- 삐- 어디선가 들려오는 규칙적인 기계음. 알람 소리인가? 난 이런 알람을 맞춘 기억이 없는데. 창틈으로 쏟아진 햇살이 사정없이 눈꺼풀을 파고들었다. 순간, 잠들기 전의 다짐이 떠올랐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빠에게 꼭 전화를 걸기로 했었지. 어깨 위로 뻗은 손이 습관처럼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을 찾기 위해서였다. "으… 음?" 손끝에 닿은 촉감이 이상했다. 조그맣고 단단한… 마치 비누 같은 질감. "뭐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와중에도 , 삐- 삐- 하는 정체불명의 소리는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은아야- 눈 떠봐! 은아야!] 무슨 소리지? 난 이미 눈을 뜨고 있는데. 다급한 엄마의 목소리에 이어 처절한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어어??" 순간 눈앞이 새하얘지는 강한 충격과 함께 풍경이 바뀌었다. 목조로된 천장 대신-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그리고 코앞에는, 어디서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것인지 잠옷차림의 엄마가 있었다. [어어, 눈 떴어! 눈 떴어!!! 은아야! 정신차려봐! 은아야!!!”] 뭐지… 왜 엄마는 왜 저렇게 울면서 내 손을 쥐고 있는거지? 그리고, 내 팔뚝에 꽂혀 있는 건… 링겔? “어- 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단어가 되지 못한 말은 입김이 되어 산소마스크에 맺혔다. 치지지직- 눈 앞에서 스파크가 튀는 듯 하더니, 시야가 다시 어두워진다. 깜깜한 시야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환자분은 겨우 고비를 넘기셨습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너무 과로하셨습니다.] 의학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건조한 목소리. 그리고 반복되는 비프음. 삐이이- 삐이이- 시선이 천천히 내 손을 향했다. 꿈속에서 더글라스가 쥐여 주었던 그 까만 비누 상자가 들려있었다. "어어어어???" 삐이이이- 삐이이이- 이명처럼 웽웽거리는 소리. 그리고 비프음. 저 ‘삐- 삐-’ 거리는 기계음이- 미치도록 낯설면서도 소름 끼치게 익숙하다. [서 팀장…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빨리 눈 떠서 퇴원해야지 …] 소라 언니의 물기 어린 목소리. 나는 허공을 맴도는 기계음을 가만히 듣다가, 떨리는 손을 내 팔목에 가져다 댔다. 거기에 링겔은 없었다. 맥박을 셌다. 삐- 하는 기계음이 한 번 울린 뒤, 내 손목에서 7번의 맥박이 뛰었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삐- 소리가 이어졌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며- Eve’s Fruits의 기본 시스템 세팅이 뇌리를 스쳤다. '현실의 하루는, 게임 속의 7일.' 등줄기를 타고 섬뜩한 소름이 뻗쳐올랐다. 내가 이 기묘한 꿈을 꾸기 직전의 마지막 기억.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왈칵 코피를 쏟았던 것. 그런데 그 직후에… 내가… 침대로 걸어가서 누웠던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책상이 있던 자리를. 익숙한 내 컴퓨터가 있어야 그곳에는, 수북이 쌓인 양피지와 낡은 주판만이 놓여 있었다. [환자분 상태가 위험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안 돼요, 선생님! 우리 딸,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상상은 최악의 구렁텅이로 처박혔다. 환청 속 엄마의 처절한 오열이 터져 나왔을 때, 나는 넋이 나간 채 중얼거렸다. "어, 엄마… 엄마?" [은아야. 안 돼! 안 돼, 은아야아아악!] "엄마, 엄마?! 엄마! 엄마아아아아!" 미칠 것 같다. 현실의 엄마와 게임 속 나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겉돌았다. 서로 다른 이펙트를 씌운 사운드 파일처럼, 같은 공간에 섞여들지 못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지독하게 정교한 중세 유럽풍의 인테리어. 나는 미친 듯이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나가야 돼!" 삐이이이- 삐- 삐이이이이- 삐- 쾅쾅쾅쾅! 벽은 둔탁한 파열음만 뱉어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옆 거울 속에는, 한참 어렸을 적의 내가 멍하니 서 있었다. 주민등록증 사진에 있었던- 그리고 20여 년 전에 유행했던- 촌스러운 깻잎머리를 하고서. 끝단을 질끈 묶은 바지와- 얼룩진 셔츠를 뒤집어쓴 채. "이, 이건 내가 아니야아아아!" 챙그랑- 내 주먹이 거울을 산산조각 냈다. 유리가 박힌 손가락을 타고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상관없었다. 여기에 이렇게 ‘갇혀’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연거푸- 깨진 거울을, 단단한 벽을, 차가운 바닥을 내리쳤다. 벌컥- 닫혀 있던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이 년이 왜 아침부터 지랄을… 어? …야! 너 미쳤어?!" 단단한 남자의 팔이 발악하는 나를 뒤에서 낚아챘다. 턱시도 따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빠 새끼였다. "꺼져, 씨발! 다 꺼져! 놔!" "대체 아침부터 왜 이래 너?!!!" "나가야 돼! 여기서 나가야 된다고!!!" 나는 온 식구가 내 방으로 몰려올 때까지, 짐승처럼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 와중에도 현실을 알리는 삐- 삐- 삐- 하는 섬뜩한 이명은, 멈출 기미도 없이 내 귓가를 후벼 파고 있었다. <6> 그는 측은하다는 눈으로 내 손을 바라보다 말했다. “예상보다 일찍도 망가졌군, 영애… 그리고-” 더글라스의 말에, 나도 내 손을 바라보았다. 붕대에 칭칭 감겨있는 손이었다. “-이번에도 예고없이 들이닥치셨소.” 이번에는 그의 탑 접견실이 아니었다. 이곳은 그의 탑, 2층. 문 맞은편의 커다란 괘종시계 외에는, 가구 하나 제대로 놓여있지 않았다. 현재 시간은 2시. 이 을씨년스러운 곳은, 오후인 것이 무색하게 철저히 빛이 차단되고 있었다. 사진관의 암실 같은 공간. 그런 곳이 남자의 손에서 일어난 불빛하나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었다. 피로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새겨진 음영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살짝 삐쳐있는 머리카락 덕분에 이 남자의 휴식을 방해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예의를 논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어지럽다. 아침부터 미친년처럼 난리를 치다가 떠올린 곳이 이곳이었다. 가족들이 기겁을하며 의사를 부르러 간 틈을 타, 창문으로 도망쳐 나왔으니까. 나는 붕대 감긴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비슷한 선례가 있었으니까.” 역시. 이 남자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 남자, 더글라스를 찾아가야한다고 떠올린 이유. 바로 이 세계에서의 그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그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네크손의 PM이기 이전에- 1인 게임 개발로 대박을 터뜨렸던 남자. 그 게임의 이름은, 2019년 화제의 게임인, ‘The Mage’. 나 역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그 게임을 플레이 했었다. 그 ‘The Mage’에서 마법사가 되는 방법은 한가지. 바로 촉매를 먹어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까만 비누처럼 생긴 촉매제를. 그리고 그 게임의 주인공은, 들려오는 환청으로 인해 미쳐서 죽을 뻔했던 위기에서 그 촉매를 먹고 살아남았다. 나처럼. 난 그 징그러웠던 맛을 떠올리며 넌더리를 냈다. 그리곤 신음처럼 말했다. “난 당신이 내게 줬던 것의 이름이 뭔지 알아요.” “그럴리가.” “아뇨. 알아요.” 나는 그 촉매의 이름을 말했다. “더 메이지.” 조각되어있는 듯, 변하지않던 그의 표정이 움직인다. 눈이 커지고, 입이 살짝 벌어진다. “영애가 그걸 어떻게? 그건 나의 언어인데.” 그가 일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는 이미 그대만의 언어를 구성했고, 그대만의 규칙체계를 만들었다’고. 이에 그 게임에서 사용하던 용어는, 그의 ‘언어’로 포함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난 그걸 삼키고, 당신을 찾아왔어요.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하는 거죠?” 내가 지금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걸 삼켰던 덕분이다. 그걸 삼키자, 나를 미치게 만들 것 같았던 심장 모니터 소리와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가 뚝 멈췄으니까. 하지만 빙글빙글 눈앞이 돌아가는 것 같은, 이 어지럼증은 점점 더 심해지고 않고 있다. “말해주시오! 어떻게 나의 언어를 알고 있는 것이오!” 조각같은 얼굴이 고함을 지르니 그 박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Eve’s Fruits’ 의 세계관에 대해서 잘 안다. “...마법사라는 분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네.” “...뭐?” ‘Eve’s Fruits’에서는 마법사가 되는 방법을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는다. 다만 정해져 있는 것은 마법사가 된 다음.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 것이, 기사의 제약이라면- 마법사에게는, ‘마법사의 언약’이라는 제약이 있다. 바로 자신이 ‘약속’한 바를 지켜야한다는 제약. “경은 어젯밤에 제게 약속했던 것 같은데요? 그걸 먹고 오면, 제자로 삼아주겠다고.” “...” 자기 입으로 한 말이었다. ‘약속하지. 그때는 친히, 그대를 내 제자로 받아들이리라’ 그리고 그 때, 이를 들은 백승미가 경악한 이유는, 단순히 ‘제자’를 받아들이겠다는 그의 선언 때문이 아니다. 마법사가, 그녀의 눈앞에서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날 바라보던 마법사의 입이 열렸다. “왜인가, 영애.” “뭐가 말이죠?” “어젯밤의 그대는, 마법사가 되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소. 나를 보는 영애의 눈빛은, 마법사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 아니었어.” 나는 내 속을 대놓고 까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글쎄요… 적어도 경은, 여자들한테 그런 시선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는 내 말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아니. 반한 남자를 보는 눈도 아니었어.” “...” “날 속이려들지 마시오, 영애.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나 얻고싶은 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는, 반드시 욕망이 깃드는 법이지... 헌데 영애에게서는, 그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았어.” “그럼 뭐가 느껴지셨는데요?” 더글라스의 생각은 잘 읽히지 않았다. 그 두 눈이, 나를 해부하듯 바라보았다. 그것은 일종의 마법사로써의 흥미일까. 아니면, 그의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한 인간에 대한 흥미일까. “나는 연극을 좋아하오.” 어지러움 속에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SNS의 그의 정보에도 있었던 말이라서. “그래서요?” “아직 혼인을 한 적이 없는 배우가,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연기가 있소... 그게 무엇인지 아오?” 어지러워서, 이 증상부터 빨리 해결하고 싶은데. 이 남자, 자꾸 말을 늘인다. “글쎄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연기인가요?” “아니.” “그럼 뭐죠?” “바로 자식을 바라보는 아비와 어미의 눈이오.” 나는 구토감이 올라와 살짝 눈을 감았다. 그런 내게, 더글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상대의 탄생을 지켜본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눈이기 때문이오.” 말은 되네. 자식과 부모의 가장 큰 차이가 그것일 테니. 상대가 태어나는 모습을 봤다는 것.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차이다. “그렇군요. 그런데 왜 지금 그 말을?” “눈을 뜨시오, 영애.” “어지러운데요.” “눈을 뜨시오.” 난 그렇게 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자 그는 확신의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는, 그런 부모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소…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곳으로 오게되기 전에 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집 마이크에 대고 한 말이었다. ‘도와줘. 난 네 어머니 같은 거니까.’ 어지러움에 몸이 떨렸다. 더글라스는 이를 좀 다르게 해석했다. “두려운 거요, 영애?” “...” “말해보시오. 마법사가 되는게 두려운 거요?” 지금 내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마법사가 되는 게 두렵다’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두 세계관의 병합에 관한 것이다. 이 더글라스가 ‘The Mage’라는 게임의 마법사로써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 그의 SNS 피드에서 해당 내용이 학습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순한 이스터에그나- 오마주 수준이 아니라- 두 개의 완전히 다른 게임 엔진과 세계관이, AI를 통해 융합되어 있다는 것. 만약 이런 식의 융합까지 이뤄지는 거라면- 아무리 ‘Eve’s Fruits’의 엔진이 유연하다 하더라도, 그 감당이 가능할 것인가. 내가 우리 ‘Eve’s Fruits’에게 원했던 건, 이런 것이 아니었다. 나의 바람은, 비유하자면 나무였다. 개개인이라는 서로 다른 열매를 품을 수 있는 거대한 나무. 서로 다른 욕망들이 한 나무의 가지에서 열려 어울리게되는 나무.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줄기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나무. 그런데 이런 식으로 두 세계관이 결합되게 되면 기형적인 모습이 생겨날 수 있다. 사람의 팔과, 고릴라의 몸과, 원숭이의 다리를 이어붙이는 식의. “후우우우-” 당장은 알수 없다. 그 원인도. 결과의 파장과 그 범주도.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다름아닌 내가 가진 신조에 관한. 나는 언제나- 내가 할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빠처럼, 팔다리가 깨지는 투쟁을 할 순 없었지만- 가만히 앉아 며칠이고 책을 들여다보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세상의 어느 천재들처럼, 단숨에 문제를 해결해내진 못했지만-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고서 그 답을 찾아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오직 두려운 건, 내가 마모되는 것. 그래서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 것을 회피하는 것.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마법사가 되야 해.” “왜?” 그야, 나는 이 세계관의 마법에 대해서 아니까. 마법의 카테고리 중엔 ‘차원이동’이라는 것이 있음을. 나는 눈앞의 이 모든 현상들의 정체를 아직 모른다. 이게 꿈인지. 아니면 나의 무의식인지. 아니면 정말로 게임의 세계 같은게 있어 거기로 오게된 건지. 하지만 그 무엇이건. 이게 내가 아는 그 ‘Eves Fruits’의 세계라면- 나는 마법을 통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나는, 이 남자가 내 시선에서 느낀 것이- 그것이 창조주의 권위건 모생애적인 여유건 관계없이- 부디 내 목소리에도 있길 담겨있길 바라며 외쳤다. “그러니, 약속을 지켜요, 마법사!” 이에 더글라스의 반응은 무척 고무적인거였다. “핫! 파하하하하하핫!” 미술학원에 있을 법한 석고상같은 얼굴이, 처음으로 속시원하게 웃었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띈 채, 진지하게 말했다. “영애. 언어와 문법체계는 이미 지녔다고 가정하겠소.” “그래서요?” “그대는 그 체계가 확정되는, 완벽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하오.” “상상만 하면 되요?” “그렇소. 그 상상을 자신 머릿속에 이루기 위해 촉매를 삼킨 것이오. 이에 구체적인 형태를 그려보시오. 무엇이 있어야 그 언어와 문법체계가 ‘수행’될 수 있는지.” 말이 추상적이었지만, 나는 곧장 한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상의 드라이브. 그리고 버추얼 스튜디오의 코드창. “그리고 마법을 행한다는 그대만의 의식(ceremony)을 치르는 것이요. 주문을 외우건, 그림이나 문양을 그리건, 그 체계가 수행되기 위해 필요한 의식을.” “잠시만, 조용히.” 나는 더글라스의 말을 끊어버렸다. 나는 멀티 태스킹이 안되는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불필요한 것들은 의식적으로 꺼버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빛. 필요없다. 꺼버린다.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구토감. 역시나 필요없다. 꺼버린다. 유리에 긁혀 따끔거리는 오른팔의 통증도.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지친 허벅지도. 꺼버린다. 꺼버린다. 꺼버린다. 그러자 마음속에는 오직, 나의 심상만이 남는다. 스켈레톤만 작성되어 있는 그 코드창에, 가만히 글자를 새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없이. 마치 자동 수기 기능을 수행중인 코드 어시스트처럼. 따박따박. 코드가 채워져나간다. 이 다음으로 지금 필요한 것은. 내 머릿속의 가상의 드라이브를 회사의 서버 주소까지 연결하는 것. 지금 이 모든 모습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그 근원에. 닿을 수 없다는 생각따윈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디딘 바닥과도 이어져 있고- 하늘과도 이어져 있으며- 내 눈앞의 호흡에도 이어져 있고- 또 나의 시선 자체에도 이어져 있으리라. 그리고 코드는 완성되었다. 다섯줄 밖에 되지 않는 간결한 코드였다. 남은 것은, 빌드. 지지지지직- 마치 하드디스크를 읽는 듯한 소리가 몸에서 새어 나온다. “영애… 그대는 대체…” 코드창 아래에, 콘솔로 이루어진 결과가 표시되었다. [Build completed successfully] 심플한 코드였기에 무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이다. “준비가 완료가 된 거면… 그 수행에 어울리는 시동어를 읊으시오. 말이건 글이건 수화건 상관없소. 그저 그대의 언어 체제에 걸맞는-” 나는 손을 들어 더글라스의 말을 끊었다. 새롭게 3D상의 광원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건 코드의 낭비다. 그저 필요한 것은- 내가 이미 만들어놓은 라이브러리의 기능을 호출(function call) 하는 것. 나는 입을 열었다. 빛이 있으라- “Light.exe” -그러자, 빛이 있었다. <7> 더글라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무슨, 빛이... 그대는 도대체-” 내 눈 앞에는 있는 것은 빛나는 하얀 점 이었다. 정식 3D 용어로는 Point Light. Brightness(밝기), Color(색), Range(범위)로 정의되는 광원. 그 하나의 점이, 암실같던 이곳에 자리하던 어둠을 완전히 밀어냈다. 그리고 그 덕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텅 비어있는 이곳엔, 한가지 특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벽에, 글들이 빽빽하네?” “읽지 마시오!!!” 글들을 살짝 읽어보기도 전에 더글라스는 나를 확 밀어냈다. 그 다급함에 나는 좀 놀랐다. 내가 ‘실행한’ 빛은, 그 공간에 덩그러니 남은 채였다.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읽은 문구는 [우리의 존재는-] 까지였다. 우리의 존재는??? 그에게 떠밀려 문 밖으로 나가나고 나자, 한 아리따운 여자가 문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찻잔을 올려놓 잔바침을 두 손으로 바쳐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으신 백승미 양이었다. “뭐요?” “아, 경… 은아와 함께 차라도 드시라고-” “이전에도 2층에는 올라오지 마라고 했던 것 같은데. 1층에서 날 부르라고.” 상황을 알것 같았다. 저 계집애는 문밖에서 우리를 엿듣기위해 잔바침을 알리바이로 활용한 것. 백승미는 더글라스에게 고개를 숙인 채 내 발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쓴웃음을 짓자 백승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제, 경께서 제게 오늘 다시 오라고 하셨잖아요. 마침 은아도 올라가길래, 그래도 될 줄 알았다구요.” 더글라스는 침음하다 말했다. “그랬나... 은아 양의 경우는 그럴 사정이 있었소. 다시 말하지만 2층에는 올라오지 마시오. 그리고-” 더글라스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 말했다. “-이제 어지럽지 않나보군.” …어? 나는 목을 돌려보았다. 그랬다. 검은 비누를 삼켰던 후유증이 사라져 있었다. “그렇네요. 왜죠?” “체내의 마나가 활용되며, 촉매가 완전히 녹은 거요. 그리고-” 불쑥-. “!” 놀랐다. 남자의 손이 내 얼굴로 올라와서. 그 손은 내 인중을 지긋이 누르더니, 이를 옆으로 쓰윽 문질렀다. 그 갑작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이건, 영애에게 아직 충분한 마나 용량이 확보되어있지 않다는 반증이지. 그대는, 터무니 없이 작은 용량을 가진듯 하오.” 더글라스의 엄지에 묻어난건, 다름 아닌 코피였다. 다행히 콸콸 흐른 것이 아니라 찔끔 묻어난 것. 더글라스의 말이 이어졌다. “명심하시오, 영애. 마나 용량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나 용량 밖의 기적을 구현하면, 필시 몸에 무리가 가오.” ‘마나 용량’이라는 말이, 내게는 ‘가상 드라이브의 크기’로 들렸다. 난 곰곰히 생각하다 물었다. “어떻게 그 용량을 늘일 수 있죠?” “이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는 것이지.” 더글라스는 우리가 나온 ‘암실’에서 세어나오는 빛을 흘금거렸다. “마법은 결국, 마음의 힘에서 비롯하오. 어떤 이는 사유의 힘이라고 하고, 경험의 힘이라고도 하며, 혹은 신념이나 철학을 내세우기도 하더군… 하나 나는 조금 다른 표현을 하지.” 이어질 말을 알 것 같다. ‘The Mage’의 주인공이 했던 대사가 기억나서다. 그 게임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그래픽임에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1인 개발 특유의 상큼한 설정과 마음을 울리는 스토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The Mage’의 스토리가 관통하는 전반의 주제는- “나는 그것이 행복에서 비롯하는 힘이라고 생각하오.” -바로, 행복을 찾아나서는, 한 마법사의 여정이었다. 할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조각같은 그 얼굴이, 희미한 웃음을 띄었다. “하여 그대는, 스스로 그 방법을 찾아야 할테지.” “...그,그렇군요.” 이상하게도- 인중을 짧게 지나갔던 그의 손길이 의식돼, 심장이 둥둥 뛰었다. 그런 나를 유심히 살펴보던 더글라스가 말을 이었다. “더는 세상이, 마냥 기계부품처럼 보이지 만은 않을 거요. 내 촉매는 세상과의 결속을 단단히 맺어주는 것이기도 하니까.” 더글라스는 다시 한번 세어나오는 빛을 바라보았다. “마법은, 같은 이름을 한 저주라는 말이 있소. 마법사의 재능이란 세상에서 동떨어지고, 이계의 힘에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주어진다고들 하지. 그래서 마법사들 중엔 미치광이가 많다고도.” 아침내내 들었던, 소리가 떠올라 진저리쳤다. 나를 미치게 할 것 같았던 ‘삐-’하는 소리. 마치 내 죽음을 종용하는 것 같았던 소리. “그런 선례를 따르지 않으려면, 그대의 삶과 단단히 붙어 있으시오. 그대의 가족을 사랑하고, 그대의 친구를 아끼고, 그대의 이웃을 보살피시오. 그리하여 부디 영애가,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려 행복할 수 있길 바라겠소.” 그의 길었던 말을 두 줄 요약한다. 세상에 단단히 뿌리내리라. 그리고 행복하라. 덕담 비슷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 멋적었는지, 더글라스는 한차례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내 호의는 여기까지요. 그리고 마법사가 되겠다는 것과 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지... 그 고민을 위한 3일을 주겠소. 진지하게 생각해 보길… 그리고 아이비.” 마지막은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다. 백승미가 더글라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네. 경.” “사색을 주는 문제, 덕분에 나도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음에 감사하오.” 문제? 무슨 말인지 고민해본 나는, 어제 저 계집애가 더글라스의 손에 뭐라고 글을 적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허나 다시는, 그대의 시험문제를 들고서 나를 찾아오진 마시오. 아카데미의 교수가 학생들에게 그런 문제를 던져줄 때엔, 그대들로 하여금 보다 깊게 사유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함일거요. 이를 타인의 힘으로 해결하는 것은, 바르지 못하오.” …시험문제 풀이를 바랬던 거였냐? 백승미의 얼굴이 빨게졌다. 이어 쌩뚱맞게도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짜증을 조금 담아 말했다. “은아가 일렀나보군요.” 예상도 못했던 말인지라,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이해하고 나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야 이건. 뭐 눈엔 뭐만 보인다더니, 착각에서 비롯된 동종혐오인가? 내가 뭐라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지 않소, 아이비양. 그 문제를 낸 렌달프 교수님은 저와 친한 사이요. 오늘 아침에도 이곳에 찾아와 커피를 한 잔 하고 가셨지.” 이어 더글라스는 우리 둘을 향해 목례를 했다. “그럼 두 분, 살펴가시오.” 그 말을 끝으로, 더글라스는 나와 자신이 나왔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백승미는 더글라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곤 잠시 후, 다시 이를 악문 채 나를 노려보았다. “야. 서은아.” “뭐.” “너 때문에 이게 뭐야.” 과거의 백승미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추억과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어왔다. “대체 어느 대목에서 나 때문인데?” “아니, 왜 자꾸 이런 곳에서 여우짓인데?”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여우짓을 해본 적도 없거니와, 한다고 해도 이런 꼴로 여우짓을 하진 않아.” 그제야 백승미는 나의 팔을 바라보았다. “...뭐하다 다쳤는데?” “일찍도 물어본다… 먼저 가. 생각 좀 할테니.” 그녀는 화난 걸음걸이로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나는 더글라스의 말을 되새겨보았다.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행복하라고? 그래야 미치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이 부분을 확실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닫힌 문에 노크를 하기전, 철컥- 하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백한 축객형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타인에게 의존하여 자신의 문제를 푸는 이에게 주는 경고. 나는 짝- 소리가 나도록 양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서두르지 말자.” 서두르면 오히려 늦을 때가 더 많다. 코드 한 줄을 쉽게 짜려다가 수십줄의 코드를 수정하는 식의 바보짓은 하지말자. 그의 말대로, 우선은 이곳에 빨리 적응할 것. 마법사가 되건, 차원이동을 하건. 그것이 대 전제다. 결심이 내려지자 행동은 빨랐다. 내가 계단을 내려가자, 놀랍게도 내가 아는 세 사람이 탑의 입구 안쪽에 있었다. 카운터 같은 곳의 남자에게 제지당한 채였다. 그 셋 중 하나가 먼저, 대뜸 나를 가리켰다. “있네! 저기 봐요! 저기 있잖아!” “은아야! 괜찮아? 이 새끼들이 납치한거야? 내 친구 불러?” 흥분한 엄마와 오빠가 있고- “그래도, 더글라스 경이 계신 곳인데 ‘이 새끼’는 좀…” 하며 오빠의 옆구리를 꼬집는 언니가 있다. 날 걱정하여 찾아왔을 사람들을 보며 기분이 묘하다. 나는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거람. “엄마, 미안해…” “도대체 왜 그런 건데! 너 진짜 엄마 속터지는 꼴 볼거야?” 백승미는 탑 입구를 나가려다 말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서 약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야. 교수님께는, 오늘 시험 못본다고 말해줘?” “뭐?” “너, 몸도 안좋잖아.” 속이 뻔히 보이는 제안이다. 대체 이 년은,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내게 꽂혀있는 걸까? 한숨을 내쉰 다음, 심플하게 요약한다. 나를 어찌할 수도 없는, 그런 쓸데없는 감정소모는 무시. 그녀가 내게 뿜어내는 적의는 걸러내고, 그 정보만 취하기로 한다. 그녀의 말인 즉. 나 역시도 지금 이곳의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이고, 오늘은 마침 ‘시험일’이라는 뜻이군. “내가 가서 교수님께 잘 말해줄께. 오늘은 집에서 푹 쉬지 그래.”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께.” “그 말이 맞아! 그냥 집에 쳐박혀 있어!” 엄마가 백승미의 말에 호응했다. 나는 그 길로 오빠와 엄마, 그리고 언니에게 붙들려 집까지 다시 끌려갔다. 아빠는 여전히 집에 없었다. 아빠는 대체 어디간 거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흥분한 엄마, 오빠와 언니가 돌아가며 쏘아댔다. “아까 왜 그런건데! 진짜 죽고싶어서 그런 거야?” “은아야. 우리 제대로 검진 받아보자. 너 지금, 몸이 지금 축난 거야. 오후되면 의사선생님 시간 나실거야.” “음. 이건 어머님 말씀이 맞는 것 같은데.” “아우… 알았어, 알았어.” 나는 적당히 끄덕이며 방에 박혀있는 척 했다, 그리곤 내 방을 뒤져 장농에서 정장같이 생긴 옷을 꺼내 입었다. 흰 옷감에 까만 띠가 둘러진, 아카데미의 교복이었다. 책상에 붙어있는 시간표를 확인한 뒤, 나는 고양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가야할 목적지는 뚜렸했다. ‘Eve’s Fruits’에서의 아카데미. 이는 게임 초반에 플레이어의 능력과 인맥를 파악하고, 또 성장시키는 장소이기도 했다. 특히 초반에 일어나는 이벤트에는 교수와의 관계를 크게 향상시키는 것들도 많은데, 이는 모든 루트의 공략에 있어 필수 요소다. 발소리에 신경쓰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식탁 쪽에선 엄마와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님… 사실 은아가 어제부터 살짝? 이상한 감이 있긴 했어요.” “어떻게 말이죠?” “지금와서 제가 얼핏 느끼기엔, 몽유병 증상 같았달까요…” 음. 그녀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무사히 현관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강하게 내 뒷덜미를 잡았다. 오빠였다. “너 진짜 미친거야?” “...요새 무리했더니, 진짜~ 잠깐, 영혼이 가출했었나봐.” “그럼 더더욱 쉬어야지!” “에이, 오늘 시험날인데… 갔다와서 왕진이든 검진이든 받을께. 진짜야! 나 못믿어?” 오빠는 내가 나온 현관문을 다시 열려고 했고, 난 그 손을 꽉 잡았다. “치사하게, 엄마한테 이를려고?” “지금 그딴 이야기가 나오냐? 넌 진짜, 가족 걱정하는 것도 모르고…” 이렇게 초반부터 가로막힐 순 없다. 오빠가 아직 이 집에 붙어있다는 건, 장가를 아직 안갔다는 말이리라. 이에, 20살 쯔음의 오빠를 떠올려본 나는, 나즈막하게 말했다. 부디 이게 통하길 바라며. “오빠, 여자 소개 시켜줄께... 우리 대학ㄱ-, 아니 우리 아카데미 여자애로.” 그리고 내 말은 힘을 발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던 오빠의 손이 멈췄다. 대학은 안나온 오빠는, 예전부터 ‘똑똑한 여자’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너네 아카데미 여자애로?” “...응.” 이어 그는 붕대감긴 내 팔을 보며 내적 갈등에 사로잡힌듯 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다짐시키듯 말했다. “너, 시험 끝나고 바로 집으로 안오면 목을 뽑아버릴 줄 알아.” “네~ 오라버니.” “너 한동안은 극장도 출입 금지야.” “...알았어, 알았어.” 난 그렇게 우리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겨우 저택 정문을 나와 허리를 꺾어본 나는, 절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날씨는 좋네.” 아침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난리를 친 환자로썬 조금 민망한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길을 걷는다. 이 게임의 설정들을 되새기며. 아카데미는 항상 영지의 중앙에 위치한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성벽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걷다보면, 높은 확률로 아카데미가 나타난다. 이를 알기에 나는 길을 헤매지 않았다. 멀리 아카데미의 간판이 보였다. ‘아카데미 드 발리에르’ 직역하면 발리에르 영지의 아카데미. 그 디자인은 한국의 유명한 여대의 디자인을 많이 참고했었다. ‘Eve’s Fruits’라는 이름이 그러하듯, 우리 게임은 원래부터 잠재된 여성 유저를 끌어들이려는 목적이 다분했었으니까. 캠퍼스의 잔디밭과 공원을 지나고, 중도의 아치와 연못의 다리를 가로질렀다. 그리곤 내 책상의 시간표에 적혀있었던 이름의 강의실로 찾아 들어섰다. [마법에 대한 기초 상상]이란 이름의 소강의실이었다. 다들 교복을 입고 있었다. 대충 학생들을 살펴보니, 지정석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 각 학생들을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강단에 선 사람의 외견에, 잠시 넋을 놓고 말았다. “얼른 자리 앉아요.” “아, 네... 죄송합니다. 교수님.” 빈 자리는 젤 앞자리 뿐이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교수에게서 시선을 때기 힘들었다. 뿔테 안경을 낀 그 노교수는, 자기 몸 만한 크기의 독수리를 어깨에 올려둔 채였다. <8> 주춤 거리며 자리에 앉은 나를, 교수의 어깨에 앉아있던 거대한 독수리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나를 향해 슬쩍 부리를 벌린 독수리에게, 교수가 다정하게 말했다. “워워. 피니…” “삐익-.” “그건 먹는 거 아냐.” …네??? 저, 저기요?! 화들짝 놀란 내가 슬쩍 의자를 뒤로 빼는데, 교수는 웃으며 내게 윙크를 보냈다. 아마도 장난이었다는 뜻 같았다. 잠이 확 깨네. 그 교수의 명찰엔 렌달프라고 적혀 있었다. 뿔테안경에 까만 로브를 입은 노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으로 짐작하기론 나이는 대략, 60세 쯤. 그는 출석부와 강의실의 인원을 카운트해보더니, ‘다왔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번에 시험 문제, 많이 생각해봤지요?” 강의실 곳곳에서 ‘네에.’ 하고 억눌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수는 분필 하나를 잡고는 판서를 시작했다. 따닥. 딱딱딱. 칠판에는 ‘[마법에 대한 상상] 1학기 기말고사’ 라고 적히더니, 그 아래로 시험문제가 적혔다. 음. 저것이 백승미 그 계집애가 더글라스의 손에 적었다는 그 문제란 말이군. 뭐랄까. 참으로 이 수업명에 어울리는 문제였다. 더글라스가 백승미에게 했던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사색을 주는 문제, 덕분에 나도 많은 생각을 해 보았음에 감사하오’ 칠판에 적힌 시험문제는 이랬다. [이 세상이 누군가의 마법으로 창조되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이 복잡한 세상의 규칙을 구축하기 위해, 그가 가장 먼저 만든 규칙은 무엇일까요?] 피니라는 독수리의 눈빛에 다소 긴장한 채, 그 독특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데- 툭툭. 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이에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다름아닌, 홍보팀장인 지철이었다. 산뜻하게 하늘색 셔츠를 걸친. 그는 내 팔을 바라보더니, 격없이 말했다. “맨손으로 오크 때려잡고 왔냐?” “...그렇게 됐네.” “어쩌다가?” “그냥 뭐…” 지철이는 ‘그렇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침착하게 가방에서 펜을 꺼내더니 붕대감긴 내 손을 스윽 끌어당겼다. 그리곤 거기에 ‘오크 때려잡고 왔음.’하고 썼다. 나는 힘없이 웃다가 적당해 보이는 말을 떠올렸다. “그… 공부는 많이 했어?” “난 얌전히 있을 건데? 답 안하면 B- 준다고 하셨잖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에 지철은 대답 대신 칠판 쪽으로 턱짓을 했다. 칠판에는 교수가 쓴 하얀 시험 문제 아래, 노란색 분필로 내용이 추가되고 있었다. [채점 기준] [출석 후 답이 없다면 B-] [대답시, 그 답에 따라 A~F] ‘B-’니 ‘A~F’니 하는 건 아무래도 학점을 가리킨 말 같다. “...특이한 채점 방식이네.” “저 교수, 괴짜인건 유명하잖아.” 그러니까, 적혀있는 저 문제에 답을 하면 A~F 사이의 학점을 받게되고, 아무 답도 하지않으면 B-를 받게 된다? 시장에서의 흥정이 아니라, 도박에서의 배팅 같은거에 비교해야할 판이다. “공지한대로, 시험을 치겠습니다. 뒤로 넘겨주세요.” 양피지가 돌았다. 20명 남짓한 학생들에게 시험지가 돌려졌고, 나는 그동안 지철 외에도 아는 얼굴 둘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군계일학의 미모를 뽐내고 있는 백승미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옆에 앉은 남학생이었다. 다름 아닌. 이름도 가물가물한 내 첫사랑이었다. 딱히 이제와서 아픔은 없었다. 오래된 이야기들이, 쓰윽 머리 속으로 지나갔을 뿐. “삐익?” 자꾸만 나를 보며 입맛을 다지는 듯한 독수리 때문에 고개를 획 돌리고 말았다. 양피지가 다 전달되는 것을 확인한 교수가 다시 말했다. “시험 문제는 여기 칠판에도 적어 놨고… 자기 성적이 B- 인걸로 납득이 안된다 싶은 학생들은, 도전해 봅시다... 아, 참고로 컨닝하는 학생들은, 여기 있는 피니가 혼내주러 갈지도 몰라요.” 과한 걱정이었다. 펜을 드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이나. 이에 교수는 ‘엥?’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자신이 쓴 칠판의 글을 확인하고서 말했다. “어차피 이런 질문에 정답 같은 것은 없을 거에요. 자유롭게 상상한 바를 써보면 되잖아요.” 교실은 여전히 조용했다. 피니라고 불렸던 독수리도 고개를 휙휙 돌리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아니, 다들 왜 이래… 다들, 그냥 안적어도 좋아요. B-로 납득 안하고픈 용자들은, 그냥 자리에서 손을 들어 봐요.” “...” “정답 같은 건 없다니까요? 후하게 평가해 줄게요.” 그 말에 용기를 얻었는지, 한 남학생이 삐죽 손을 들었다. “네. 거기 둘째줄.” “네… 저는 피조물을 사랑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을 사랑할 줄 알아야 그 창조를 이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으음. 완전 땡입니다.” 아니, 저 교수. 방금, 정답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질문은 ‘창조 이전의 것’을 묻는 거잖아요. 학생은 D에요.” 우와, 학점 진짜 짠데? 아니나 다를까 D를 받은 학생은 배신감에 젖은 표정이었고, 내 바로 뒤에앉은 지철이는 ‘F 폭격기’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닫아두었던 교실 문이 화들짝 열렸다. 이어 힘찬 손가락질과 함께 고성이 터져나왔다. “렌달프, 너 이 새꺄! 너 내가, 내 실험동물 빼가지 말라고 했지!” 놀랍게도 고성의 주인공은 교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할머니였다. 이에 교수는 당황하며 말했다. “어? 여보??? …나 지금, 시험 중이잖아?” “이 영감이 노망들었나. 우리가 이혼한 지가 언젠데!” 할머니는 자신의 머리를 묶고 있던 것을 풀어내렸다. 그 형태는, 아마도, 철사? 그리고 할머니가 든 그 철사는 앞부분이 휙휙 꺾이더니 뾰족한 화살표 모양으로 변했다. “히익?” “교, 교수님들?” 놀란 학생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학생들의 반응 따윈 알빠냐’ 라고 주장하는 듯한 동작으로 손에 든 것을 내질렀다. 쒜에에에-엑- 타악!!! 렌달프 교수가 재빨리 몸을 숙인 덕에, 할머니의 화살표는 그의 이마 대신 강의실의 벽에 꽂히게 되었다. “차, 창문 열어주는 학생, A-!” “이쪽이요!” 지철이 벌떡 일어나더니, 커다란 교실 창 하나를 열어젖혔다. 이로써 용기내어 답했던 학생은, 그냥 창문을 열어준 지철이보다 못한 학생이 되었다. 이어 그쪽 방향으로 달려간 교수는 창 밖으로 몸을 던졌다. “교, 교수님!” 몇몇 여자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럴만 했다. 여긴 4층 교실이었으니까. 하지만, 교수는 투신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었다. “피니!” “빼애-액!” 독수리는 교수의 뜻을 이해한 듯, 날개를 펼치며 교수를 등에 올렸다. 펼쳐진 날개는 거의 4미터에 이를 듯했고, 허공에 흩날린 깃털은 그 탈출을 축하하는 폭죽같았다. 그리고 할머니는 그를, 고이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오늘, 저 바람둥이 새끼 장례 치른다!” 위풍당당하게 교단을 가로지른 그녀는, 벽에 꽂힌 화살표 모양의 철사를 뽑았다. 이어 그녀의 입술이 달짝거리자, 철사는 마구마구 늘어나고 또 휘어졌다. 그 형태는, 올가미? 올가미가 된 철사는 창밖을 향해 뻗어나갔다. 그리곤 의지를 가진 촉수처럼 독수리의 복잡한 비행을 뒤쫓다가, 기어이 그 발톱을 낚는데 성공했다. “빼애애액-!” “얌전히 딸려와, 이 병아리야!” 할머니의 손에, 철사가 핑그르르 감겨들었다. 그러자 마치 낚시로 낚은 물고기가 당겨지듯이, 독수리는 창가쪽으로 끌려왔다. 큰 날개를 힘차게 퍼득였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창문 안으로 끌려온 우리의 랜달프 교수는 할머니에게 귀가 잡혔고, 발톱이 철사에 감긴 독수리는 할머니의 등에 뒤집힌 채 매달렸다. “약속해! 다신 내 동물 안건드린다고!” “아니… 얘도 한 땐 하늘을 누비는 날짐승의 왕인데, 갑갑하게 실험실에만 있는 거, 불쌍하잖아.” “너가 더 불쌍하게 만들어줘?” 뭐랄까. 기승전결을 한방에 땡겨버린 드라마의 엔딩같았다. 웅성거리는 속에서도 두 노교수들은 고성을 주고받았다. “약속해!” “못해!” 학생들이 보든 말든, 두 이혼부부들께선 날선 목소리를 주고 받았다. 벙벙한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보는데, 또 한번 내 등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은아야. 너는, 이번 시험 답이 뭐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번에는 지철이 아니었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첫사랑의 목소리였다. 백승미와 나란히, 교실의 소란을 틈타 내게 다가온 것.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글쎄.” “에이. 은아야…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안 베껴.” 우.리.사.이? 갑자기 20년 묵은 흑역사가 후욱 들어오네. 대학교 시절. 그는 나와는 전공이 달랐다. 그런 주제에- 내가 동아리에서 미니게임을 만든 걸 본 후, 그는 은근슬쩍 자신의 레포트를 내게 내밀곤 했었다. 나는 고작 프로그래밍이란 것을 흥미삼아 건드려 본 국문학과 1학년. 반면 그가 내민 레포트는, 정말 컴퓨터 공학 전공자들만이 해결할 수 있는 레벨의 것이었다. ‘은아야… 나 진짜 미치겠다.’ ‘왜요, 선배?’ ‘나, 이번 레포트 무조건 해야하는데 말야-’ 그에겐 항상 자신의 레포트들을 할 수 없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타이밍 좋게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거나,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셨다거나 식으로. 그리고 갓 여고를 졸업한 신입생인 내게, 그가 뱉은 말들은 묘한 착시를 일으키곤 했다. ‘역시. 내가 제일 믿는 동아리 후배.’ ‘정말 너니까 부탁하는 거지.’, ‘동아리에 너가 있다는게 너무 행운이야.’ ‘나는 너처럼 묵직하고 논리적인 여자애들이 좋더라. 완전 내 이상형이야.’ 등등. 등등. 그리고 ‘묵직하고 논리적인 여자가 이상형’이라던 그의 결론이, 백승미라는 사실을 깨닳았을 때의 충격이란… “나 정말 참고만 하려고 그래. 어차피 나나 아이비나 다 자기 답을 정해논 상태야.” “맞아. 오빠랑 나는 맨날 같이 공부하기도 하니까.” 예전에도 딱 이랬다. 그리고 나는 이 두사람을 단번에 닥치게 했다. “두 사람 답을 먼저 들려줘.” 그들은 내 반응이 의외인 탓인지 곧장 답을 하지 못했다. 그 표정으로 보건데, 나는 여기서도 호구짓을 꽤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예비부부들이 뭐라고 하기전, 이혼부부들이 먼저 극적인 타결을 이룬 것이다. “보석 2개로 합의봐! 약속한다, 내가!” “보석 2개? 약속한 거다?” 그제야 할머니는 잡았던 랜달프 교수의 귀를 놓았다. 그녀는 득이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시험 방해해서 미안해요, 호호.” 그녀는 독수리를 두고서 복도의 창문 앞에 섰다. 랜달프 교수가 ‘보석 2개’로 독수리를 사버린 모양. 렌달프 교수는 할머니를 향해 중지를 들어올리더니, 다시 몸을 돌려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아, 흐음. 음! 자자. 다시 시험 집중합시다... 다들 각자 자리로 돌아가요.” 뭔가 폭풍이라도 한차례 지나간 듯한 교실이었다. 백승미와 그녀의 예비신랑도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웅성거리던 애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나는 칠판을 다시 바라보았다. “자, 또. 대답해볼 사람?” 교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용감함을 대가로 D를 받아야했던 첫 남학생 이후, 더이상 도전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교수는 자신의 몸에 묻은 깃털을 털어내고, 철사에 묶였던 독수리의 발톱 쪽을 살펴보더니, 우릴 향해 팍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도전들을 안한담. 재미없게.” 재미를 바랄거면 아까 C 정도는 줬어야지. 게다가 우리로썬 충분히 재미를 받다. 어느 이혼부부의 촌극으로 말이지. 더이상 교수의 유혹에 낚이는 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출석부를 뒤적였다. “그럼, 제가 호명합니다?” …답안하면 B-라더니, 랜덤뽑기 같은 겁니까? 출석부를 뒤적이던 그의 시선이, 특정 줄에서 멈추었다. “어, 이 학생 여기있네… 서은아양?”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 꽂히는게 느껴졌다. 나로선, 괴팍한 변덕쟁이 교수의 기준에 휘둘리는건 사양인데. “1학기 중간고사 때 올 A 받았다는 그 학생 맞죠? 한번 답해봐요.” “...” “약속할게요. 답이 맘에 들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줄테니.” 소원을 들어준다고?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법사’가 ‘약속’이라고 한, ‘소원’이니까. 마법사인 그는, 이제 거짓말로 ‘맘에 안든다’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다. 마음속에 정해진 답은 있다. 하지만 이를 답으로 삼기 위해선, 확인할 사항이 있었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에서의 그 마법사는, 전지 전능한 신 같은 건가요?” 교수는 자신의 문제를 다시 확인하곤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서야 문제가 안되죠. 물리적으로 명백한 한계를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두 가지 규칙을 선행했을 겁니다. ” 교수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되물었다. “어떤 기준으로 나눈 두 가지입니까?” “창조의 편의성이요.” 너무 자세하게 설명하면 추상적으로 들릴 것 같아 답변이 주저되었다. 내가 좀 오래 고민하자, 교수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오른 것 같았다. “음, 창조의 편의성으로 나눈 두 가지란 말이죠… 은아 학생이 말하는 그 두 가지가 뭡니까?”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코딩을 배울 때, 로직을 구성하는 기초가 되는 두가지. “조건(conditianal)과 반복(iteration)입니다.” 교수는 한방 얻어맞았다는 듯이 멍해있었다. 한참 후, 교수는 되물어왔다. “왜 그렇지요?” “그래야 최소한의 것(code)을 재사용하고 또 제어할 수 있을 테니까요.” 강의실은 조용해졌다. 다시 한참 후, 멍해있던 60살 교수님의 얼굴에, 신난다는 표정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