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라 제국력 1000년 8월 26일-.

가만히 있어도 사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낡은 여관방. 짭짤한 바다 향을 머금은 바람이 굳게 닫힌 문 틈 사이로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창가 바로 옆. 다갈색 빛의 투박한 나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소녀는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쥐어짜듯 움켜쥐고 있었다.

누덕누덕 기운 흔적이 가득한 이불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아 보였지만, 햇볕에 바짝 말린 덕에 사각거리는 감촉을 지녔고 안락하고 따뜻한 향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포근한 온기라 한들 아까부터 폭풍우를 만난 거센 파도처럼 쉼 없이 요동치는 소녀의 심장을 가라앉혀 주기에는 역부족인 듯했다.

소녀는 몸을 왼쪽으로 틀어 누군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 서 있는 것은 훤칠한 체구의 한 사내였다.

남자는 가벼운 질감의 튜닉과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 의복은 지금의 시대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수십 세기 전이나 유행했을 법한 형식이었다.

빛을 머금은 듯한 은빛 머리카락이 치골 께까지 길게 늘어져 찰랑거렸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에는 먼지조차 내려앉아 있지 않았다.
어스름한 새벽하늘을 닮은 흑청색 눈동자는 그 안에 별빛을 가득 담은 것처럼 끝도 없이 깊고도 선명하게 반짝였다.

세상을 발아래 둔 듯한 고고한 표정은 언뜻 보기에 오만해 보였지만, 소녀에게 고정된 시선 속에는 희미한 따스함이 분명히 어려 있었다.

그러나 허벅지 부근에 머문 두 손은 겉모습과 달리 착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소녀의 손처럼 단단히 움켜쥐어져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지던 두 사람의 눈 맞춤은 소녀가 먼저 낙담한 얼굴로 고개를 떨군 뒤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혹시 다른 길은 없을까, 잠시나마 기대해 보았지만 움직임 없는 남자의 동공은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희망인지를 말없이 일깨워주는 듯했다.

소녀의 작은 두 주먹이 가련할 정도로 부들부들 떨렸다. 사내는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으나 결코 그녀를 위로하거나 품에 끌어안지는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