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새하얀 페인트를 부운 것처럼 함박눈이 쌓인 주택 골목길을 가로지는 검은 형상이 또렷이 보였다.   
밤이 늦어서 아님 눈이 소음을 가두어서인지 고독한 적막 속 급한 발걸음과 가쁜 숨소리만 들려왔다. 전봇대 아래 쓰레기 봉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도, 작은 몸집은 부지런히 골목길을 가로 질렀다. 구비구비 꼬인 골목길 끝 촘촘한 스테인레스 기둥으로 막혀진 대문을 열어 재낀 여자가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자 침입자에 놀라 컹컹 개 짖는 소리가 3층 철문을 철컥 닫자 메아리처럼 멀어져 갔다. 
 "수혜야, 엄마왔다" 
이미 자고 있을 딸을 부르며 현관 문턱에 오르려던 찰나, 머리와 어깨에 소복히 쌓인 눈을 이제야 발견하고 털어내는 동안 껌껌한 집안에서 노년의 여자가 눈을 비비고 나왔다. 
"수혜엄마. 왔어? 지금 몇 시지? 아이고 시간이..." 
"죄송해요. 제가 이번 달에 꼭 더 쳐서 드릴께요." 
"매번 이런 식이면 나도 못 봐줘. 11시가 다 되어 가잖아. 내일모레 새해인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어제 오늘만 늦은 거였어요. 내일은 연말이니깐 꼭 일찍 올께요.“
여자는 발을 동동 굴리며 외투를 급히 입는 여자에게 애걸복걸하였지만 매정한 소리만 되돌아 왔다. 
”난 내일은 못나와. 수혜 엄마가 알아서 해.“
7살짜리 딸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보모는 쿵- 문 닫히는 소리로 사라지자 여자는 처진 어깨로 주방 겸 거실로 들어와 패딩을 벗었다. 동시에 지퍼 속 꼭 봉인해 놓은 날고기 누린내가 올라왔다. 
연말 특수를 누리는 정육점에서 뼈 분내가 날리는 육절기 사이, 눈치를 보다 겨우 빠져 나온거라 옷에 묻은 뼛가루를 털어낼 새도 없었다. 하루종일 서 있어 퉁퉁 부은 다리를 끌어 차가운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이 나올 동안 옷을 비벼 빤 다음, 이태리 타올로 잡내 흔적을 빡빡 닦았다. 몸을 움츠리며 냉기가 감도는 추운 거실을 가로질러 방에 들어가니 전기메트가 조용히 작동하는 소리 사이, 새근새근 곤한 숨결을 내는 아이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