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 마지막을 틔워내는 꽃

#. 인류의 역사와 신들의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신과 가장 닮았던 첫 번째 인류의 시작과 끝은 단순했다.

‘더 많은 것을 원하던 욕망이 그토록 사랑하던 이들을 향해 칼을 겨누는 죄책감보다 더 컸기에.’

세 번째 인류와 비슷했지만, 종족은 다양했던 두 번째 인류의 끝은 조금 복잡했다.

‘성전이란 명분으로 벌어진 신들끼리의 대리전. 인간과 마왕이라 불렀던 악신과의 전쟁.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 그 이상으로 치닫는 지상을 보던 모든 시작의 결단.’

빛과 질서, 모든 존재들의 시작은 자신에게서 비롯된 오점들을 지우고 싶어 했다.

비록, 몇 번째인지도 모를 성전과 마왕 토벌전을 틈타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려 했던 그 존재의 결단은 그에게서 비롯된 여섯의 신들에게 가로막혔지만,

‘너희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에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걸 시작으로 마주할 그들의 비명은 너희들의 진혼곡이 되리라.’

반드시 이루어질 ‘인과’의 선언은 막는다고 막힐 어떤 것이 아니었기에, 선언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여섯의 신들은 각자의 이유로 결단을 내렸다.

누군가는 종말의 끝보단 자신이 한 선택의 끝이 순수하게 궁금했기에,

또 다른 누군가는 인과의 사슬이 이제는 오롯이 인간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순간에도 지상에서 울리는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비명이 너무 끔찍했기에,

마지막으로 누군가는 분노로 눈을 가린 주인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했기에.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하나같이 가혹한 대가에도 그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저벅, 저벅, 저벅.

악신 토벌을 마친 남자와 그를 따르던 결사대는 희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끝없는 사막을 며칠 밤이고 걸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건 백성들의 환호가 아닌, 붉은 달이 비치는 스산한 폐허와 빗물에 섞여 강이 되어버린 그들의 피였다.

대륙의 중심이자 제국의 수도는 이미 최후의 순간 마법사들이 읊은 마법으로 핏빛 비와 뒤섞여 끊임없이 불타고 있었다.